[서평] 디데이 :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디데이6점
앤터니 비버 지음, 김병순 옮김/글항아리

앤터니 비버 선생의 저서는 국내에 세 권이 번역되어 있는데, 그 중에 ‘스페인 내전‘과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이미 일전에 읽어 서평을 올린 바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의 원제는 ‘Stalingrad‘인데, 이 책의 안종설씨의 번역판은 절판되었지만 최근 조윤정씨의 번역판으로 재출간 되었다. 같은 책을 번역했으니 아마 내용이 미세하게 다르겠지만 거의 같을 듯 한데, 이쪽은 읽어보지 못했다.

비버 선생의 여러 책은 뭐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일전에 군사사의 지존이신 periskop님께서 비버 선생의 Stalingrad에 오류가 있어서 실망이 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본인으로서는 뭐 그정도로 해박한 건 아니니.. ㅋ

이 책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8월 파리점령이후 까지의 대략 3개월간 있었던 일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인데, 전반적인 전황이나 전술/전략적 측면 보다는 사병 개개인의 경험담이나 미시적 사건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런 그의 서술 스타일은 일전에 읽은 두 권의 책에서도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된다.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다량의 이야기 거리가 쏟아져 나와서 한참 읽다보면 서술상의 시간이 아직도 시간이 이정도밖에 안 지났는건지 의아할 정도다. ㅋ 일전의 ‘6일 전쟁“과 비견된다.

현재 알라딘 서평을 보면 오역이 너무 많다고 폭풍까임을 당하고 있는데, 관심있으신 분들은 개정판을 기다렸다 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완독 후 책에서 받는 느낌을 이전의 두 저서와 비교하자면, 동부전선에서 두 독재자가 충돌하는 총체적 비극에 비하면 덜 비극적이고(그렇다고 비극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페인 내전에서처럼 복잡다단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묘사보다는 덜 복잡하다. 그래서인지 과거에 읽었던 저술들 보다는 임팩트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다. ㅎ

책의 초반부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얼마나 좌충우돌이었는지를 끊임없이 묘사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야 참 이긴게 신기하다 싶다. ㅋ 거대한 작전이 아무 문제없이 물흐르듯이 이루어질리는 없겠지만 이건 좀 너무한거 아닌가. 책 가운데 헤밍웨이의 망나니짓을 묘사하는 부분도 좀 의외이다. 헤밍웨이가 이런 친구였나. ㅎ

한가지 아쉬운 점은 개별 전투병들의 미시적 사건의 묘사는 대부분 연합군쪽에 치우쳐 있다. 독일군 전투병의 경험을 묘사하는 부분은 거의 없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저자 본인이 영국인이라 그런가. ㅋ

뭐 나온지 1년이 넘은 책이라 웬만큼 전쟁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 서평을 보기도 전에 이미 읽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새삼스럽게 다시금 서평을 통해 주의를 환기시켜본다. 일전에 사진 블로그 Big Picture에서 노르망디 사진이 올라왔는 것을 링크했는데 관심있으면 한 번 보시라.

나치 독일군의 프랑스 생활

앤터니 비버 저/김병순 역, “디데이“, 글항아리, 2011

p98-100

룬트슈테트의 참모장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는 1940년 전쟁에서 진 뒤로 ‘정복자의 천국’처럼 보였다.24 주둔 부대의 입장에서 볼 때 프랑스는 러시아와 싸우고 있는 전선과 정반대였다. 실제로 동부전선에서 휴가를 얻은 미혼 장교들은 금욕적이며 심하게 폭격을 받은 베를린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어떻게든 파리로 가서 휴가를 보내려고 했다. 그들은 샹젤리제 거리의 야외 카페에 앉아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시내를 구경 하다가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 막심Maxim에서 저녁을 먹고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 가는 것을 꿈꿨다.

프랑스 국민들이 연합군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리에서 휴가를 보내던 제 9기갑사단의 한 기술 담당 장교는 편지에 ‘이곳은 첩자들이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기 때문에 적들에게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갈 게 분명해’라고 썼다. ‘어디를 가든 군인들을 환영하는 푯말이 있어. 그리고 군인과 여자들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난 여기서 정말 멋진 나날을 보냈어. 파리는 누구라도 와서 보고 경험해볼 만한 곳이야. 내가 그런 기회를 잡았다는 걸 고맙게 생각해. 네가 이곳 파리에 오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야.’25

동부전선에서 이동해온 부대들 가운데 특히 무장친위사단 같은 부대는 프랑스에 주둔한 군인들이 너무 유약하다고 생각했다. 한 장군은 ‘그들은 편안히 지내면서 자기 집에 무엇이든 챙겨 보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썼다. ‘프랑스는 위험한 나라다. 와인과 여자, 쾌락이 난무하는 분위기다.’26 프랑스 북서부에 있는 영국령 섬들에 주둔한 제 319보병사단의 부대원들은 영국인들의 혈통이 섞인 원주민들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들은 ‘독일군 제1근위보병연대영국 제1근위보병연대를 빗대서 한 말‘라는 별명을 얻었다.27 그러나 일반 병사들은 얼마 안 있다가 그 부대를 ‘캐나다 사단’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히틀러가 그들의 배치전환을 거부하고 결국 캐나다 전쟁포로들을 가두는 수용소로 보냈기 때문이다.28

프랑스에 주둔한 독일 점령군들은 실제로 프랑스인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했다. 점령군 지휘관들이 병사들에게 프랑스 국민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명령한 덕분이었다. 노르망디에 사는 농민들은 무엇보다 그들의 생활을 그대로 영위하면서 농사짓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독일군이 술에 취해 밤거리에서 총을 쏘아대며 폭력을 휘두르고 때로는 강간과 강도, 약탈 행위를 일삼기 시작한 것은 1944년 봄으로, 나치 친위대와 동방부대가 프랑스에 주둔하면서부터였다.

프랑스에 있는 독일군 장교들과 병사들 가운데는 파리뿐 아니라 다른 여러 지방에서 젊은 프랑스 아가씨들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많았다. 바이외에는 애인이 없는 병사들을 위한 사창가도 있었다. 그밖에도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는 병사들을 위한 극장과 치과를 비롯한 다양한 시설이 독일군 사택 근처에 세워졌다.29 프랑스에 주둔한 독일군들 가운데 특히 부유한 노르망디 지역의 농장 주변에 주둔한 병사들은 또 다른 좋은 점이 있었다.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은 점점 줄고 있는 군대 보급품에 의존해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가족들을 위해 그 지역에서 생산된 고기와 유제품을 나무 상자에 담아서 가지고 갈 수 있었다. 1944년 봄, 연합군 공군이 철도 시설을 맹렬하게 폭격하자 노르망디 지역의 농부들은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란처Landser’라고 불리는 일반 독일 사병과 부사관들은 보급품으로 받은 담배를 버터와 치즈로 교환해서 고향으로 보냈다. 하지만 연합군의 공습이 독일군의 우편물 수송에 집중되면서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24. Interview with General der Infanterie Blumentritt, February, 1946, Shulman. p60
25. Truppeningenieur, Stab/Pz.Pi.Btl.86, 9.Pz.Div., BfZ-SS
26. Generalleutnant Fritz Bayerlein, Panzer Lehr Division, ETHINT 66
27. Shulman interview with Generalfeldmarschall Gerd von Rundstedt, October 1945
28. Speidel, Hans, We Defended Normandy, London, 1951, p.98
29. Franz Gockel, Mémorial de Caen archives, Normandy TE 500

헐 동부전선과 너무 다르잖아!!

1838년 헤라트 공성전

1838년 페르시아가 헤라트를 공격하던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는 글이다.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명언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에 이보다 적합한 순간이 또 있으랴.

피터 홉커크, “그레이트 게임“, 사계절출판사, 2008

p238-247

포팅어가 헤라트 방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다른 영국인 장교들이 이곳에 들어와 열 달간의 포위 공격을 이겨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드러났다. 포팅어 자신은 상관들에게 보낸 공식 보고서에서 자신의 용맹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여한 부분까지도 줄여서 말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 특히 야르 무함마드의 역할도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포팅어는 일기도 썼다. 나중에 역사학자 존 케이(John Kaye) 경은 이 일기를 보고 유명한 『아프카니스탄 전쟁사(History of the War in Afghanistan)』에서 이 놀라운 사건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케이의 서재에 불이 나 이 일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11월 23일, 포대의 지원을 받는 의 군대가 서쪽에서부터 힘차게 도시를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케이는 이렇게 기록했다. “페르시아군이 진격하자 수비대가 밖으로 돌진했다. 아프가니스탄 보병들은 한 치의 땅도 내주려 하지 않았다. 기병대는 페르시아군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적이 차지한 자리에서 적을 밀어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성의 포위 공격이 시작되었다.

(중략)

포위 공격은 몇 주, 몇 달 동안 계속되었지만 어느 쪽도 결정적 우위를 보이지는 못했다. 페르시아군은 도시의 외곽 방어선은 돌파했지만 도시 전체를 둘러싸지는 못했다.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될 때에도 성벽 가까이에 있는 들판에서는 계속 경작과 목축이 이루어졌다. 포위를 당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매일 밤 페르시아 군을 향해 돌격했지만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 페르시아 군은 성벽에 계속 폭탄을 퍼부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계속 수리를 했다. 공격군은 대포 외에 로켓포도 갖고 있었다. 케이는 이렇게 말했다. “불이 붙은 비행체가 도시 위를 지나가면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지붕에 모여 기도하거나 울었다.” 박격보는 대포나 로켓포보다 더 정확해 몇 주동안 많은 집과 가게와 건물을 파괴했다. 박격포탄 하나가 도화선에서 불꽃을 반짝이며 포팅어의 옆집 지붕을 뚫고 잠자고 있는 아기 옆에 떨어졌다. 공황에 사로잡힌 아이 어머니는 폭탄과 아기 사이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몇 초 뒤에 폭탄이 터지면서 어머니는 몸이 잘리고 날아간 그녀의 몸이 아기 위에 떨어져 아기는 질식해 숨졌다.

(중략)

포팅어는 내내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하며 방어군의 결의가 무너질 때마다(자주 있는 일이었다) 격려를 하고, 최신 유럽 군사 지식에 따라 기술적 조언을 해주었다. 케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활동은 끝이 없었다. 그는 늘 성벽에 서 있었으며, 늘 조언을 하고 …… 활기찬 모습으로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포팅어 자신은 헤라트가 살아남은 것이 페르시아 군과 러시아 고문관들의 무능 덕분이라고 보았다. 영국의 연대 하나면 별 어려움 없이 헤라트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시모니치 백작과 러시아 고문관들의 말을 믿고 금세 승리할 줄 알았던 샤는 엄청나게 우월한 군사력으로도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항복을 했던, 야르 무함마드의 친동생 세르 무함마드(Shere Muhammad)를 보내 헤라트 사람들에게 항복을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총리는 변절한 동생과는 의절을 했다면서 만나지도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세르는 페르시아 진영으로 돌아가기 전에 샤의 군대가 헤라트로 진격하면 야르는 개처럼 목을 매달고 노새몰이꾼들이 그의 처자식을 사람들 앞에서 욕보일 것이라고 야르에게 경고했다. 만일 헤라트가 계속 샤에게 저항하면 세르 자신도 페르시아인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덧붙엿다. 그러자 야르 무함마드는 샤가 셰를 처형해준다면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니 기쁠 따름이라고 답했다.

(중략)

헤라트 사람들은 얼마 후에 진실을 알았지만, 이미 러시아에 항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1838년 6월 24일에 시모니치 백작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포팅어 중위의 영광의 시간이 시작된다. 공격군은 사방에서 도시를 향해 먼저 대포로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이어 다섯 지점에서 동시에 보병이 대규모의 공격을 시작했다. 네 지점에서는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싸워 페르시아군을 격퇴했으나, 다섯 째 지점에서는 대포가 성벽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적이 들어어오는데 성공했다. “전투는 짧았지만 치열했다.” 케이는 그렇게 썼다. 방어군은 자기 자리를 지키다 죽어갔다. “공격군 가운데 가장 과감한 몇 사람은 동료들보다 앞서서 밀고 나와 갈라진 틈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군의 지원군이 몰려나와 아슬아슬하게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공격군은 “계속 되풀이하여, 필사적인 용기를 내어” 열린 틈을 이용해 도시로 들어오려 했으며, 거의 성공할 만하면 다시 밀려나곤 했다. 한 시간 동안 양군은 진퇴를 거듭했으며, 헤라트의 운명은 여느 쪽으로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포팅어와 야르 무함마드는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제까지 겁쟁이라는 욕을 들은 적이 없었던 총리는 페르시아군이 도시로 돌진해 들어올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마음이 약해졌다. 성벽의 열린 틈으로 향하는 총리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마침내 멈춰섯다. 이내 총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포팅어는 깜짝 놀랐다. 총리와 포팅어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던 방어군도 그 모습을 보았다. 뒤에 있던 병사들은 부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는 핑계로 하나 둘씩 빠져나갔다. 포팅어는 이러다가는 순식간에 도망자의 수가 불어나 방어군이 모두 달아날 것임을 알았다. 포팅어는 간청도 하고 조롱도 한 끝에 간신히 야르 무함마드를 일으켜 세워 흉벽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총리가 부하들에게 알라의 이름으로 싸우라고 외친 덕분에 잠시 파국은 피한 것 같았다. 총리의 이런 행동은 늘 마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병사들이 총리의 망설임을 보았다. 병사들은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자 총리도 다시 용기를 잃었다. 총리는 지원군을 데려와야겠다고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포팅어는 자제력을 잃었다. 포팅어는 야르 무함마드의 팔을 잡고 큰 소리로 욕을 하며 성벽이 부서진 곳 까지 끌고 갔다. 결국 총리가 방어군에게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외쳤지만 병사들은 계속 달아났다. 그러자 그다음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케이는 이렇게 말했다. “야르 무함마드는 커다란 지팡이를 잡더니 미친 사람처럼 병사들의 맨 뒤로 달려가 지팡이로 병사들은 두들겨 패며 앞으로 몰았다.” 병사들은 달아날 곳이 없었다. 게다가 적보다 총리가 더 무서웠다. 병사들은 “사납게 흉벽을 넘어 바깥 비탈의 페르시아 공격군을 향해 달려 내려갔다.” 공격군은 이 갑작스러운 반격에 당황하여 달아났다. 눈앞의 위험은 사라졌다. 헤라트는 구원을 받았다. 케이의 말에 따르면 “엘드리드 포팅어의 불굴의 용기 덕분이었다.”

포팅어 중위가 헤라트를 방어하여 러시아의 야심을 꺾었다는 소식이 런던과 캘커타에 전해지자, 그는 오 년 전 카불부하라에서 귀환한 알렉산더 번스처럼 찬사를 받게 되엇다. 그러나 번스와는 달리 포팅어는 찬사를 받는 자리에 없었다. 가장 큰 위험은 지나갔지만, 시모니치가 포기하지 않아 공성전이 그 후에도 석 달을 더 끌었기 때문이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낭만주의 소설가 모드 다이버(Maud Diver)는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헤라트의 영웅(Ther Hero of Herat)』에서 포팅어의 공적을 찬양한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에서 최고의 찬사는 얄궂게도 페르시아의 샤가 보여준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샤는 헤라트가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 포팅어라는 존재 때문임을 알고는 맥닐에게 무사통과를 보장할 테니 포팅어에게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맥닐은 포팅어가 자신의 지휘를 받지 않기 때문에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버텼다. 오직 캘커타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샤는 헤라트 사람들을 시험했다. 포팅어가 남아있는 한 그들과 휴전 협상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 역시 실패했다. 헤라트 사람들은 언제든지 사소한 구실로 공격이 재개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귀중한 포팅어만 잃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포팅어도 샤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교착 상태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빗케비치가 카불에서 승리를 거둔 것에 놀란 데다 러시아가 헤라트에서도 비슷한 성과를 거둘 것을 두려워한 영국 정부가 마침내 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질러 포위당한 도시까지 구조대를 보내는 행동은 너무 위험하고 더뎌서 배제했다. 대신 특별 부대를 페르시아 만으로 보내기로 했다. 샤가 동쪽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동안 그의 영토의 반대편을 위협하면 헤라트를 움켜쥔 손을 풀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파머스턴은 러시아 외무장관 네셀로데에게 시모니치의 매우 비정상적인 활동을 중단시키라고 압력을 높였다. 두 가지 행동는 신속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서평] 청일 러일전쟁

청일.러일전쟁10점
하라다 게이이치 지음, 최석완 옮김/어문학사

어문학사에서 일본근현대사 시리즈가 발간되었길래 전권을 읽어볼 요량으로 순차적으로 구입하고 있다. 그런데 2권부터 7권까지만 있고 1권이 없는게 이상한데, 이유는 본인도 모른다. ㅋ

뭐 여하간 이 책은 청일전쟁 전후부터 러일전쟁까지 일본 국내의 사회 문화적 배경, 정치적 사건 및 국제관계 등 다양한 사회상을 조망하는 책이다. 일전에 읽은 ‘러일전쟁의 세기‘와 비슷한 부류의 책이라 볼 수 있다. ‘러일전쟁의 세기’는 러일전쟁을 중심으로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청일전쟁에 상대적으로 적은 무게를 두고 있으나, 이 책은 청일전쟁쪽에 더 무게를 실어 설명해준다. 두 책을 보완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전술이나 전략적 설명 및 전황의 진행 등 전쟁 자체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이 부분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읽을 것이 거의 없다. 대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내각의 형성과정과 번벌파 등에 관한 정치적 설명이 매우 많으니 이 부분을 참고한다면 볼 것이 많다.

책의 앞부분에 입헌군주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정치권의 분위기를 약간 느낄 수 있는데, 이 부분을 보니 메이지 유신에 대해 더욱 조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기회에 메이지 유신에 대한 독서를 해볼까 한다.

p40에 1891년 12월 2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시행했던 가바야마 스케노리 해상의 연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여기에서 왜 분란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연설은 일전에 소개한 나카무라 키쿠오의 책 앞부분에서 메이지 유신 당시 번벌세력에 의한 정치를 언급하면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그 책에서는 번벌세력의 지배성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발언이라는 해석을 하는데, 아마 이 부분을 이해해야 분란의 정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p226에 아시오 광독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일전의 포스트RLamiel님의 포스트를 참조하기 바란다.

전반적으로 지식이 조금 더 늘어서인지 과거에 나카무라 키쿠오의 책을 읽으며 고생한 것 보다는 조금 더 쉽게 읽힌다. 근대 일본사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반적인 측면에 대해 알고 싶다면 어문학사의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를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 본인도 이제 이게 시리즈 첫 독서이지만… ㅎㅎ)

[서평] 러일전쟁의 세기 : 연쇄시점으로 보는 일본과 세계

러일전쟁의 세기10점
야마무로 신이치 지음, 정재정 옮김/소화

본인은 여행을 갈 때는 항상 작은 책을 하나 휴대하는 습관이 있다. 여행을 간다고 하더라도 하루종일 관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나 자기 전에 가지고 온 책을 읽는 것을 즐기는데, 일전에 구마모토를 답사할 때 들고간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다다미 방에 앉아서 이 책을 읽었는데, 너무 내용이 흥미로와서 추위를 잊고 읽어내려갔다. ㅎㅎ

이 책은 러일전쟁 앞뒤로 약 50년, 즉 백년간 일본을 중심으로 한 국제 정세의 변화를 묘사하는 책이다. 사상적 흐름부터 미시적 사건들까지 러일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가는데, 개인적으로 러일전쟁에 관심이 있어서인지 무척 유익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서남전쟁을 전후로 일본내외의 정세변화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는데, 책을 읽던 당시에 방문했던 구마모토 성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군이 정부군을 상대로 농성했던 성이다.

러일전쟁을 전후로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국제정세의 변화를 해설해나가는데, 오쓰 사건 등의 국제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부터 시작하여 일본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이 시기에 관한 대부분의 국내저서가 일제의 조선 침탈에 과도하게 집중해서 해설하므로 다른 시점의 국제 정세 및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은가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왔던 부분은 러일전쟁을 인식하는 아시아 인들의 관점이었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읽어보면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이 대외적으로 외친 ‘동양의 평화’라는 구실을 글자 그대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부분이 여러 번 나온다. 이것을 안중근 의사가 순진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듯 하다. 당시 많은 아시아인들이 서구열강대 아시아인 이라는 대결구도로서 러일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p203 (강조는 본인)

근대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은 수에즈 운하를 항행하던 중 동해 해전에서 일본이 이겼다는 보고를 접한 아랍인들이 환희하는 모습을 회고하면서 일본인을 대상으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한 그날로부터 전 아시아의 민족은 유럽을 타도하고자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집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페르시아나 터키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아프카니스탄이나 아랍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인도 사람도 이 시기부터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한 결과로서 아시아 민족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大アジア主義」, 1924)

이 강연 자체는,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희망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에는 아시아에 대해 서구와 마찬가지로 침략적인 정책을 취한 것에 강하게 반성을 요구하고, 일본에게 아시아 민족독립운동을 지지할 것을 호소한 것이지만, 적어도 전승 직후에 러일전쟁이 아시아의 민족독립운동을 자극했음은 틀림없다.

그 밖에 재미있는 사실들이 많이 나오는데, 중간에 ‘아무르 강의 유혈이여アムール川の流血や‘에 관한 이야기(p118)도 나온다. 이 노래의 멜로디가 뭔지 무척 궁금했는데 지금 검색해보니 이곳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가사 자체는 무척 일본의 제국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 ㅎㅎ

일전에 여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전기를 읽으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사회로의 변화 요인에 대한 궁금증이 좀 있었는데, 완전히는 아닐지 몰라도 이 책에서 어느정도 도움이 될만한 해설을 포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과하는 사상적 격동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언급이 책 속에서 거의 없는 점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니 일본 근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서평]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3 : 예루살렘 왕국과 멜리장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36점
김태권 글.그림/비아북

전작 1,2 권에 이어 6년만에 3권이 나온 십자군 이야기이다. 3권이 왜 안 나오나 목빠지게 기다렸더니만 이제사 나왔구만. 켁. 이 책은 책 제목 그대로 중세 십자군 원정사를 만화로 해설해 주는 역사 만화이다. 개인적으로 1,2권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3권을 발간 즉시 샀다. ㅎㅎ

1,2권이 발간될 당시에는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한창인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사적 비판을 십자군 원정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포개어 해설해나가는 아주 훌륭한 내용이었다. 역사 해설과 더불어 시사성을 띠는 내용이라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었는데, 애석하게도 3권을 내는데 6년이나 지연시키는 바람에 내용의 연속성에 있어서든, 팬덤의 유지라는 측면에 있어서든 너무 늦은 감이 많다. 그래서인지 내용상에 있어 작가가 해설하는 톤과 심지어 그림체 조차 연속성을 못 갖추는 느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다.

그렇지만 만화가 주는 파급력이랄까 흡수성이랄까, 다시말해 대중에게 주는 임팩트는 역시 남다르다. 일전에 네이버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미닉스 씨의 웹툰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만약 이 사람이 그냥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글을 썼으면 이만한 대중성을 얻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역시 대중성을 노리는 데는 만화만한 도구가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컨텐츠의 만화는 동일한 정도의 훌륭함을 갖춘 일반 저서보다는 더 대중성이 있고, 동시에 더 매력이 있다. 이 책 뒤쪽에는 김태권씨가 만화를 그리는데 참조한 여러 역사서 및 참고 저서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만화를 완성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플러스 점수를 받는다.

물론 십자군 원정사와 중세사를 빠삭하게 알고 있다면 읽을 필요가 없겠지만, 단지 세계사 교과서 몇 줄을 통해서만 알고 있던 십자군에 관한 지식을 좀 더 풍부하게 넓히기를 원하는 일반 대중이라면 한 번쯤 읽을만 하다. 물론 내용이 이어지므로 1,2권을 먼저 읽어야 할 것이다. ㅎㅎ

엔하위키의 항목도 참조하시길 바란다.

[서평]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8점
국립진주박물관 지음, 장원철.오만 옮김/부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은 당대의 것과 후대의 것을 합하면 무척 방대한 양이 된다. 본인이 직접 그 기록들을 읽는 수준은 아니어서 주로 대중서를 중심으로 재미로 보고 있지만, 대중서의 상당부분은 국내사료를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제 3자의 기록도 참조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검색해봤더니, 이 책이 나와서 한 권 구입했다.

이 책은 천주교 포교를 위해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건너온 포르투칼 선교사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라는 책에서 임진왜란과 관련된 부분을 뽑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프로이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1년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그 자신이 전쟁의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을 내시는 분들이 이를 신경쓴 것인지, 책의 말미에 같은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빠시오(Francisco Passio)가 쓴 히데요시 임종에 관한 보고서를 싣고 있다.

책의 서문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일본내에서는 히데요시의 영웅적 성격이 부각되어 있어서 히데요시가 육손이라든지 하는 신체적 결함을 과감히 기록하고 있는 자료는 프로이스의 이 기록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제 3자의 기록이 어느정도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웬만큼 임진왜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서 맹활약을 했던 유명한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음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는 그의 세례명인 ‘아고스띠뇨’로 부르고 있는데, 아마 임진왜란과 관련된 정보는 그에게 대부분 얻었을 것이라고 본다.

원문이 포르투칼어이니만큼 일본어를 거치는 중역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일본인과 한국인 두 명의 역자가 신경쓴 부분이 여러군데 보인다. 그러므로 번역에 대해 안심해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사’ 원고 전체가 완전히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임진왜란부분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을 터이다.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소개해 보겠다. 여태까지 조선 수군은 함포사격 위주의 해전을, 일본 수군은 근접 백병전 위주의 해전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약간 다른 구절이 있다.

p234-235

그런데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 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의 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높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 배를 압도하였다.11 우선 조선 수군쪽에서 화기에 의한 공격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인을 몹시 애먹이고 괴롭혔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이 성가신 접근 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바다쪽으로 멀리 나아가는 전술로 응전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노를 저어 배와 함께 달아날 수 없게끔 튼튼한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을 위에서 집어던졌기 때문에 일본 배들은 쉽게 빠져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11 기록에 따르면 이 당시 일본 수군의 배인 안택선(安宅船)은 흡사 나무 판자를 철판으로 얽어 연결하고서 풀로 물이 새는 것을 막을 정도로 허약한 군선이었다고 한다.

사실 썩 흥미없는 부분도 있어서 그 부분은 대충 읽었지만, 흥미있는 부분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아래 초록불님의 서평을 참고하면 책을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by 초록불

 


2012.5.15
프로이스의 책을 직역한 책이 출간되었으니 이쪽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묘사된 충주 탄금대 전투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칼의 선교사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라는 책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의 기병을 전멸시킨 탄금대 전투를 묘사한 부분이 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정규군이 궤멸되면서 일본군은 서울을 직접 압박하게 되고, 선조는 피난을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전투이다.

국립진주박물관 저/오만,장원철 공역,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키, 2003

p210-212
계속 읽기

더글라스 맥아더의 성격

일전에 소개한 ‘인천상륙작전은 과연 기습이었나?‘와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저/정윤미, 이은진 공역,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p149-

맥아더는 일흔 살로 미군에서 가장 연장자였으며, 오직 신만이 그의 상급자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포인트의 노회한 신동이었다. 웨스트포인트 4년동안 역대 최고 점수인 98.14를 기록했고 촉망받는 젊은 장교로서 화려한 경력을 이어나갔다. 어떤 직책을 맡든지 언제나 최연소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에서 최연소 사단장이 되었으며, 최연소 웨스트포인트 교장, 최연소 육군 참모장, 최연소 소장, 최연소 대장을 역임했다. 화려한 경력은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고 언론의 찬사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가꾸는데도 열성적인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렸기에 부하들에게 돌아가는 영예는 초라했다. 대원수 맥아더는 역사라는 무대에서 세계라는 관객을 대상으로 연기하는 배우였다. 그래서 늘 극적인 행동을 하느라 분주해 보이는 다분히 과장된 인물이었다.

(중략)

맥아더가 출판사와 편집자들의 비위를 훌륭하게 맞추긴 했지만 현직 기자들은 맥아더의 과장과 허영에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상당수는 아첨을 일삼는 그의 참모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맥아더가 참석하는 회의는 단순한 브리핑이 아니라 방문자의 중요도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펼치는 공연과도 같았다. 조지프 스틸웰 장군은 맥아더의 수석 보좌관 프랭크 돈(Frank Dorn)에게 맥아더의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장군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5) 맥아더가 미국의 승인 아래 점령국 일본의 황제처럼 군림하기 전인 1944년에 스틸웰은 이렇게 언급했다. “맥아더 장군은 1918년에 처음 별을 달았기 때문에 삼십 년을 장군으로 지낸 셈입니다. 삼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위를 맞추며 굽실거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해왔죠. 이는 모두에게 좋지 않은 일입니다.”

1950년의 맥아더는 너무 거물이라 모든 사람이 그의 규칙에 따라야만 했다. 실제로 그는 군대 내에 자신만 지휘할 수 있는 소부대와 자신만 통치할 수 있는 작은 세상을 만들엇다. 그리고 워싱턴에서 온 지침과 명령 및 제안을 자주 무시하곤 했다. 설령 그것이 상관에게서 온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중략)

뜻밖에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98년 전인 19세기에 태어나 18년 전에 세상을 떠난 여성이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전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셈이다.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했던 맥아더의 아버지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폭군 같은 어머니를 두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비롯한 역사상 그 어떤 인물보다도 마마보이였다.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고 적의 공격에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맞섰지만 마마보이였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웅적인 미군 장교들 가운데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는 아들을 따라 허드슨의 작은 마을로 이사하는 어머니를 둔 경우는 드물 것이다. 핑키 맥아더는 육군 사관학교 4년동안 더글라스 맥아더가 기대 이하로 도태되거나 평범한 생도로 전락하지 않도록 현지 최고급 호텔에 거처를 마련하고 아들을 지켜봤다. 웨스트포인트는 미국에서 가장 엄격한 4년제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 감독관이 자기 아들에게 소홀하거나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몰라줄 때 몸소 나서서 이를 일깨워주었다.

핑키 맥아더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력을 이뤄낸 주요 설계자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의 틀을 만들고 때로는 맥아더의 위대한 재능을 덮어버리거나 반감시키기도 했던 아주 독특한 자아도취를 창조해낸 인물이다. 어머니가 일군 뛰어난 재능에 이기적인 맥아더와 공인으로서 헌신적인 맥아더가 40여 년간 동고동락한 셈이다. 시쳇말로 치맛바람이 드셌던 맥아더의 어머니는 원대한 야심을 품고 아들의 성공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이다. 아들이 곧 자신의 인생 자체였으므로 어찌 보면 그녀는 세계적인 수준의 출세주의자라 할 수 있다. 맥아더가 출세하면 그녀 역시 출세한 것이고 맥아더가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도전을 극복하면 그녀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가 명성을 얻으면 그녀도 명성을 얻은 셈이었다. 이리하여 맥아더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다른 자질 따위는 기꺼이 저버릴 수 있는 인물로 자랐다.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는 순간 상대방에게 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을 자기도취적이고 스스로 고립되기 쉬운 외골수로 길렀다. 그래서 애초부터 동료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의 결혼식은 대개 신랑과 교우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교 행사였다. 그런데도 그의 첫 번째 결혼식은 친구와 동료 하객이 너무 적어서 주목을 끌 정도였다. 결혼식에 참석한 친구는 한 명뿐이었다. 군생활 중에도 아첨을 일삼는 부관들만 감싸고 다른 장교들은 모두 외면하는 바람에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다. 마음속에 동료 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관계에 서툴 수밖에 없었다.

 


5) 존 하트 인터뷰

p450-

맥아더는 예전부터 극적인 연출을 좋아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승마용 바지와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를 입고 스카프를 두르고 다녀서 부하들이 ‘호전적인 멋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저 주목받으려는 욕구가 강했던 것이 아니라 그런 순간에 중독된 상태였다. 언제나 카메라 위치를 의식하면 움직였고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각도로 턱을 내밀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부하들이 모든 사진을 일일이 검열하여 영웅답지 못한 사진이 유출되지 않게 했다. 카메라의 각도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따라서 기자들은 항상 정해진 각도에 따라 사진을 찍어야 했다. 한번은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Stars and Stripe)」지 사진 기자에게 맥아더가 더 위엄있어 보이게끔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으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안경을 썼지만 안경 쓴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그 또한 사진을 피해야 할 순간이었다. 이렇든 매순간 맥아더의 모습은 연출되었다.

(중략)

그 시절에 맥아더는 자신이 국가의 살아 있는 역사, 즉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으며, 주변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포장하려 했다. 맥아더와 대면하는 것을 큰 영예로 여기고 그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살아 있는 기념비나 우상을 대하듯 깍듯이 행동해야 했다. 사실 매일 맥아더의 비위를 맞추는 의식을 따로 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VIP 방문객을 환영하는 점심식사 자리에서는 맥아더의 아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간부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아, 저기 장군님이 오시네요.”라고 말하면 그제야 맥아더가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그는 아내에게도 인사를 건넸는데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수년 동안 아내를 보지 못한 것처럼 아주 반가운 척을 했다.”12)

 


12) John Allison, Ambassador from the Plains, p.168

제대로 맛이 간 놈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