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나에게 소개해 준 시.
반성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김영승, 반성, 민음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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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 ![]() 김수영 지음/돌베개 |
일전에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소개한 일이 있지만, 본인은 시인 김수영에 관해서는 오직 시 외에는 접해본 일이 없었다. 이런 무지를 타파하고자 한 권 사 봤다. 이 책은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이 그대로 드러나는 문집이다. 일기나 편지도 있고 시론에 관한 글도 있다. 인간 김수영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게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4.19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논조 등 정말 맨 뒷페이지의 약전대로 ‘온 몸으로 살다간’ 사람인 것 같다. 다만 그가 글을 쓴 당시의 한탄하는 사회문제가 아직도 본질적으로는 개선되지 않은 것 같아, 마치 요즘 쓰인 글을 읽는 듯이 시대를 초월하는 답답함을 느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서 그와 관련된 여러가지 배려가 되어 있다. 몇몇 용어는 단어 옆에 첨자로 되어있고 몇몇 용어는 해설이 뒤쪽에 첨부되어 있는데, 너무 쉬운 용어는 옆쪽에 부기해놓고 어려운 용어는 뒤쪽에 첨부되어 있어,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반대로 주석을 달아야 적절한 편집이 아닐까 싶다.
또한 여러가지 시대상을 반영하는 글들이 많은데, 왜 이 책의 출판사는 글의 출처와 연도를 모두 생략하였는지 의문이다. 또한 이어령과의 논쟁을 언급하는 부분이 일부 있는데, 이러한 글의 배경이나 최소한 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는 출처라도 써 줘야 진짜 청소년을 위한 책이 아닐까 싶다. 편집자는 책의 개정을 깊이 고려하였으면 한다.
책의 뒤쪽에 한 군데 잘못된 부분이 있어 지적하고자 한다.
p142에 ‘나츠가레’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뒤쪽 용어해설에는 이 단어의 의미를 ‘여름’이라고만 해설해 놓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설이고, 이 단어의 의미는 여름철 불경기를 의미하는 일본어 夏枯れ이다. 이 의미로 읽어야 문맥의 앞뒤가 맞게 된다. 편집자는 개정시 이 부분을 수정해 주었으면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 인용해본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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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후의 우리 사회의 문학 하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서 술을 훨씬 안 먹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것으로 그 이상의, 혹은 그와 동등한 좋은 일을 한다면 별일 아니지만, 그렇지 않고 술을 안 마신다면 큰일입니다. 밀턴은 서사시를 쓰려면 술 대신에 물을 마시라고 했지만, 서사시를 못 쓰는 나로서는,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 하는 젊은 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
파하하 100% 동감한다. 예전에 정지용 문학관에 갔을 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인 정지용도 한 술 했던 모양이다. 역시 걸출한 문인의 옆에는 항상 술이 있어야 하는 법인 것 같다. ㅎㅎㅎㅎ
그의 마지막 시 ‘풀’을 인용하면서 서평을 마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거대한 뿌리, 민음사, 1974>
미스터 리에게
김 수 영
그는 재판관처럼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니라
구제의 길이 없는 사물의 주위에 떨어지는
태양처럼 판단을 내린다
—- 월트 휘트먼
나는 어느날 뒷골목의 발코니 위에 나타난
생활에 얼이 빠진 여인의 모습을 다방의 창너머로 별견하였기 때문에
다음과같은 쪽지를 미스터 리한테 적어놓고
시골로 떠났다
[태양이 하나이듯이
생활은 어디에 가보나 하나이다
미스터 리!
절벽에 올라가 돌을 차듯이
생활을 아는 자는
태양아래에서
생활을 차던진다
미스터 리!
문명에 대항하는 비결은
당신 자신이 문명이 되는 것이다
미스터 리!]
<1959>
지하철을 타다가 문득 멋진 시가 있어 휴대폰 카메라로 급하게 찍어, 그 사진을 보며 여기에 옮겨본다.
문기만 – 허수아비
모두가
다 챙겨 떠난
세상 들녘
거둘 것 없는 시간에 이르러
비로소 넉넉해지는 빈자(貧者)버림으로써
충만해지는
우주의 약관(約款)
심을 것 없는 말세에 이르러
비로소 부활하는 성자(聖者)혼자서도
여럿이 되는
본래의 면벽
얼음돋는 땅에서야
비로소 뿌리내리는 동목(冬木)
그런데 검색해보니 경향신문 1994년 5월 4일자에 실려 있는 시이다. 그냥 독자의 시 같은데, 이 시가 어쩌다가 지하철에까지 흘러들어와 걸리게 되었을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