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과 안나푸르나

결국 박영석 대장, 신동민 대원, 강기석 대원의 영결식이 진행된 사실을 이제사 알게 되었다.

연합뉴스 <”박영석 정신 살아있으리”영결식 눈물바다>(종합) 2011/11/03 12:09

박영석 대장의 등반기록은 다음과 같다. 출처

◇박영석 대장 등반 기록
○세계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세계 최단기간 등정 (8년 2개월)
○세계 최초 6개월간 최단등정 히말라야 8,000m급 5개봉 등정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최다등정 (6개봉) 달성 (기네스북 등재)
○아시아 최초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1993년 달성)
○동계 랑탕리 세계초등 (1989년 등정)
○세계 최단기간 무보급 남극점 도달 (2004.1.12.)
○북극점 도달 (2005.4.30.)
○인류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 (2005.4.30.) (기네스북 등재)
○단일팀 세계최초 에베레스트 횡단 등반 성공 (2006.5.11.)
○2007 중국사천성 희조피크 세계초등
○2009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신루트 등정

박영석 대장의 14좌 최단기간 등정기록은 사실 폴란드 산악천재 예지 쿠쿠츠카와 그리 차이나지 않는다. 예지 쿠쿠츠카가 산이 되었듯이 그도 산이 되었다.

안나푸르나는 eight thousander중의 하나인데, 네팔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주봉인 안나푸르나 1봉은 8000미터가 넘어 세계에서 10번째로 높은 곳이고, 그 주변으로 2, 3, 4봉이 모두 7500미터가 넘는다. 안나푸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8000미터 14좌 고봉중에서 인류에게 정상을 허용한 첫번째 산이기도 하다.

8000ers.com의 2008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안나푸르나 1봉은 14좌 중에서 등반시도가 가장 적은 산에 속하면서 동시에 사망률이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다. 이 통계 자료를 보고 조금 놀랐는데, 일명 ‘죽음을 부르는 산’인 K2 보다 안나푸르나가 더 사망율이 높다는 게 좀 의외다. 헉.

이번에 박영석 대장이 시도한 안나푸르나 남벽은 난이도가 높은 코스라고 하는데, 미디어 오늘 기사에 따르면, 이미 크리스 보닝턴이 1970년에, 그리고 국내에서는 조형규 박정헌 원정대가 이미 성공한 바가 있다고 한다.

여하간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가 생명을 또 삼켰다. 죽는 것도 삶의 일부라고 했던가. 산사나이가 산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운명이 그러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낭가 파르바트 아래의 Fairy Meadows 도로

8000미터 고봉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높은 산인 낭가 파르바트의 북쪽능선에 Fairy Meadows 도로가 있다고 하는데, 위키의 낭가 파르바트 항목의 사진은 이 도로에서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을 올려다 본 사진이 등록되어 있다.

Foog님의 블로그를 보니 이 도로에서 자동차로 주행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어 이 링크를 옮겨본다.

계속 읽기

예지 쿠쿠츠카(Jerzy Kukuczka, 1948.3.24 – 1989.10.24, 폴란드)

예지 쿠쿠츠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14좌를 완등한 폴란드의 천재 산악인이다. 메스너가 16년만에 한 일을 단 9년만에 해낸다. 3개의 동계 초등정, 10개의 신루트 개척을 거침없이 해내는 이 철인은 1989년 악명높은 로체 남벽 등반도중 정상 160미터를 남겨둔 지점에서 낙상사를 하고 만다.

예지 쿠쿠츠카 by 마루금

출처 한국 산악회 대구지부 게시판

친구들이 유레크라고 부르는 예지 쿠쿠츠카는 라이홀드 메스너보다 일년이 늦은 1987년 시샤팡마를 끝으로 14좌를 완등했다. 그를 철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 아무리 쉽게 올라도 어려운 히말라야 고봉을 어렵게 등반한데 있다. 그는 불과 8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에 지상에서 가장 높은 14개 고봉을 모두 올랐으며 그 가운데서 두곳은 두번씩 올랐다. 또한 그는 새로운 루트를 열군데 개척하였고 산소없이 동계 초등정을 네번이나 했다. “좀더 어렵게, 좀 더 다양하게”라는 머메리즘을 좇아 그는 최소의 장비와 차림으로, 속공으로, 거의 새로운 루트로, 14좌를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등반을 했다.

그는 [하켄 몇개,해머 하나,오래 입어서 색이 바래고 헤어졌으며 유행에 뒤진 윈드 자켓 등] 정말 초라한 장비로 지독한 등반을 했다. 그것은 그의 조국이 사회주의 국가여서 돈도 스폰서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그는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냥 첨예한 어려운 등반을 계획하고 몸소 실천했다. 그는 가리지 않고 온 몸으로 무서운 등반을 했다. 초등이 많지 않고 야단 법석이고 좋은 장비 넉넉한 제정의 메스너와는 등반 스타일이 달랐기 때문에 그는 메스너에 연연하지 않았다. 메스너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는 둘다 멋쟁이다.

그러나 말많은 주위의 사람들은 두 사람을 “세기의 레이스”라며 비교를 했고 세상사람들이 주목을 하도록 떠들어 되었다. 14좌 완등후 쿠쿠츠카는 조국 폴란드에서 인기투표 1위를 기록했다. 그런 그가 로체 남벽 8350M에서 등반을 하다가 자일이 절단되어 1989.10.24 추락사했다.

쿠쿠츠카는 로체 남벽을 등반할 당시 한국의 허영호가 로체 서면 등반에 성공했는데 4켐프를 철수하지 않은 것을 초마롱마 쪽의 멕시코 산악인 카를로스 카르솔리오와 무전 통화로 알았고 날씨가 나빠지면 정상에서 서면으로 하산할 생각을 했다. 로체 남벽의 악명높은 고난도 벽등반을 끝내고 정상을 160M남겨둔 설능에서 날개도 없이 3000M아래의 빙하로 자유낙하를 했다. 쿠쿠츠카와 한국인과의 인연은 그가 허영호의 켐프를 사용할 뻔 하다가 추락사함으로 무산되기 전에도 세번이나 된다.

첫번째 인연은 1982년 세계 5위봉 마칼루 등반이다. 그는 혼자서 새로운 루트로 마칼루 정상에 올라 자기 아들의 장남감 무당벌레를 정상에 두고 하산했다. 그의 초인적인 등반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결정적인 인물은 네팔정부에서 파견된 연락관이었다. 등정여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일에서 그는 등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셀파도 없이 단독등반을 했으니 증언을 해줄 사람도 없고 정상 사진도 없으니 쿠쿠츠카의 등정시비는 그에게 불리했으며 미등으로 처리될 뻔 했다. 누가 목숨을 걸고 정상에 있다는 무당벌레를 확인할때까지 그 시비는 내내 그를 괴롭혔고 그의 도덕성까지 의심받을 처지에 이르렀는데 정말 목숨을 걸고 한국의 허영호가 무당벌레를 가지고 내려와서 쿠쿠츠카는 긴 악몽에서 헤어나게 되었다. 이 내용은 예지 쿠쿠츠카의 “14번째 하늘에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두번째 인연은 1986년 “죽음을 부르는 산”인 K2등반 때이다. 우리나라는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많은 물량과 인원이 투입되고 등반력도 대단했지만 하늘이 도와서 무사히 장봉완,김창선,장병호를 정상에 올랐다. 그해 K2는 참으로 많은 인명을 요구한 진짜로 죽음의 산이었다. 그때 등반을 나선 쿠쿠츠카는 그의 동료 타데우스 피요트로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정상에 오르고 둘은 하산하면서 두번의 비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 타데우스는 쿠쿠츠카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추락사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한국원정대의 제2켐프에 도달 송영호대원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살아났다. 그 기록은 김병준의 “죽음을 부른 산” 180~187쪽에 보면 자세히 알 수가 있다. 나는 할일이 없어 그 책을 다섯번이나 읽었다. 어느 보고서와 다를것이 없는 그 책에는 대원들의 솔찍한 심정이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없었으며 돈이 얼마나 들었다는 내용이 없다. 당시 각국 원정대에서 18명이나 희생이 되었다고 하니 그의 생환은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세번째로 유레크는 1987년 안나푸르나 동계등반에 나서 2월 3일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유레크의 등정은 1984년도 한국의 은벽산악회 안창열 대장의 김영자가 어렵게 이룩한 등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유레크에 의해 등정 의혹이 제기된 것이었다. 이것은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다. 김영자의 초등이 확실한 것이라면 그는 두번째 등정자가 되는 셈이었다. 그는 한국팀의 동계등정은 조작된 것이고 자기가 안나푸르나의 동계 초등자라고 했다. 등정 의혹설에 접한 은벽산악회팀은 등정 진위 여부를 가려줄 분명한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었다. 정상 사진은 하산중 추락한 셀파의 배낭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등정을 둘러싼 각종 구설수가 난무하기만 했다. 명확한 해명이나 항의가 없이 시간을 넘김으로써 이 등정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폴란드대의 예지 쿠쿠츠카의 등정이 동계 초등정으로 기록됨으로써 공식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들이나 한국산악계가 공식루트를 통해 보다 논리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서구 산악인들의 멋대로 해석 여부를 떠나서 같은 민족끼리의 물고 뜯는 반목과 질시로 이전투구한 한국산악계의 맹점이었다. 내가 군대에서 사랑했던 지금은 나이 오십줄 일 영자누나도 추락사한 예지 쿠쿠츠카도 둘중의 하나는 바보다. 그러고 보면 시시비를 가려줄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으며 그 잘난 인간들의 주둥아리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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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중 두번은 한국인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고 마지막 한번은 악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초등과 입은 은혜 그게 무슨 소용이랴. 내가 본적도 이야기 한적도 영자 누나도 산을 접었고 불사신 같은 쿠쿠츠카도 이미 죽고 말이 없는데…………..

이제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트위터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