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프린스턴의 풍경

시오반 로버츠 저/안재권 역, “무한공간의 왕”, 승산, 2009

p139

193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프린스턴이 세계 수학의 중심으로서 괴팅겐을 따라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32년, 나치가 권력을 잡고 나서 히틀러는 독일의 대학에서 모든 유태인 학자들을 추방했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밀려났다.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에 온 것은 1933년이었다. 그는 이 도시를 “놀랄 만큼 작은 곳, 보잘것 없으면서 허풍스러운 위인들이 사는 기묘하고 엄숙한 마을”이라고 불렀다.23)

(중략)

1931년에 지어진 파인홀은 고금에 설계된 거들 중에 가장 퇴폐적인 수학과 시설이었다. 수학자들이 떠나기 싫어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설계된 것이었다.26) 개인 연구실들은 안식처로서 사무실이라기보다는 거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는데, 각각의 방들은 커다란 책상, 푹신한 의자들, 동양산 융단, 옷을 거는 벽장으로 잘 갖춰져 있었다. 벽에는 건축 예산의 오분의 일을 들여 영국에서 실어온 어두운 색조의 오크 장식판자가 붙어있었고, 선택된 벽 장식판자들을 붙박이장처럼 열면 숨겨진 칠판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내벽과 열려진 날개모양 부분에는 모두 상감장식이 되어 있었다. 납유리가 달린 유리창조차도 설계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수학공식과 도형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공기에는 수학적 개념과 공식들이 가득했다고 인펠트는 말했다. “손을 폈다가 재빠르기 오므리기만 하면 수학적 공기를 잡아서 공식 몇 개가 손바닥에 들러 붙었다고 느끼게 된다. 심지어는 창문을 통과하는 태양빛조차도
하느님과 뉴턴,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의 의지에 따라 복종해야 할 법칙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27) 교수 휴게실에 달린 창문들(유명한 뉴욕의 건축회사 맥킴, 미드 & 화이트가 장식하였고 학부 교직원 부인 한 사람이 이를 감독하였다)에는 아인슈타인의 중력법칙과 일반 상대성 이론이 지워지지 않도록 기록되어 있었고, 서재 한 곳은 플라톤 입체의 상징을 그려 놓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굴절되게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욕실에도 독서등이 달려 있었고 – 파인홀은 영감이 찾아오는 예측할 수 없는 시점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 현장에 설치된 샤워 및 탈의실 덕으로 뒷마당에 있는 코트에서 열린 테니스 경기에서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어 원기를 회복한 수학자들이 연구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학부가의 무사태평한 가사에 따르면 파인홀은 “수학을 위한 컨트리클럽이며, 목욕도 할 수 있다네.”28)

프린스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콕세터는 자신을 데려온 레프셰츠교수와 만나 하루에 30시간은 족히 잡아먹을 대략적인 연구과정을 계획했다.29)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고 떠들썩한 레프셰츠는 대학원생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공학자로 훈련받은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일자리를 찾으러 미국으로 왔다. 1907년, 그는 피츠버그에 위치한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에서 발생한 변압기 폭발사고로 두 손을 잃었고,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그는 보다 철학적인 수학 분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결국 1924년 프린스턴에 안착하게 되었다.

(중략)

콕세터는 헝가리인 수학자이자 역시 록펠러 특별연구원인 요한 폰 노이만의 강의에도 출석했다. 폰 노이만은 언제나 한 치수 작은 옷을 입고 다녔다. 마술사와도 같은 강사였던 그는 주어진 바를 이해할 수 있었고 철저하고도 환상적인 수학적 요술로 논리적인 결론을 밝혀낼 수 있었다. 강의를 어찌나 빨리 했던지 학생들은 오로지 속도를 늦추려는 목적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폰 노이만은 스위스의 수학자 헨리 프레데릭 보넨블러스트Henri Frederic Bohnenblust(보니Boni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와 진행중이던 게임에 즐겁게 임했는데, 이 게임은 한쪽이 상대방이 연구하는 현장을 덮치는 것이었다. 규칙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파인홀에 있는 상대방의 사무실에 수시로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설 수 있었는데, 상대방이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을 잡아내려는 것이었다. 잡히면 진 사람이 10불을 주어야 했다. 폰 노이만은 잡힌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 까닭은 연구는 밤늦게 하였고 낮 시간에는 외견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36)

 


23) Alice Calaprice 편, The New Quotable Einstein, 48.
26) 수학부 학부장으로서 수학과 물리학에서 프린스턴이 세계적인 기관으로 성장하도록 조직한 수학자 헨리 버처드 파인(1858-1928)이 자전거 사고로 인하여 비극적으로 사망한 일은 프린스턴 졸업생이자 법률가로서 파인의 평생에 걸친 친구이기도 했던 토머스 D. 존스Thomas D. Jones 일가가 기부를 하여 파인홀의 건축에 자금을 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Sylvia Nasar, A Beautiful Mind, 52-53
27) Infeld, 294
28) Simon Kochen(프린스턴 대학교 헨리 버처드 파인 수학 석좌교수), 2004년 6월 22일 프린스턴에서의 인터뷰; Conway, 인터뷰.
29) 콕세터가 케이티 콕세터에게 보낸 1932년 10월 2일자 편지.
36) O’Connor와 Robertson, “John von Neumann,”http://www-groups.dcs.st-and.ac.uk/~history/Mathematicians/Von_Neumann.html (2006년 1월 23일 현재); Princeton Mathematics Community Oral History Project

노이만 형.. 대단하군..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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