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보이는 사람

올리버 색스 저/조석현 역,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이마고, 2006

p362

쌍둥이 형제를 처음 만나보면 그들에게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따위의 매력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괴이쩍은 트위들덤과 트위들디와 같으며 서로 모습이 빼다박은 것처럼 닮았다. 꼭 거울을 보고 있는 것 처럼 얼굴의 생김생김이나 몸놀림은 물론 성격과 두뇌작용, 나아가 뇌조직의 결함상태까지 완전히 빼닮았다. 두 사람 다 키가 정상인보다 작았으며, 머리와 손은 어울리지 않게 크고 위턱과 다리는 활처럼 휜 모양이었다.

(중략)

그러나 그들의 계산 능력을 테스트해보면 놀랄 정도로 형편없다. 계산 능력이야말로 셈의 천재 혹은 인간계산기가 가장 자랑할 만한 능력임에도 어쩐일인지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그들의 지능지수는 60이었고, 거의 60에 어울리는 정도의 계산 능력밖에 없었다. 간단한 덧셈이나 뺄셈도 정확하게 해내지 못했다. 곱셈과 나눗셈에 관해서는 대체 그게 뭔지 의미조차 알지 못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들은 ‘인간계산기’이지만 계산을 전혀 모르고 계산상의 아주 초보적인 능력조차도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중략)

탁자에 있던 성냥갑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그 안의 성냥이 쏟아졌을 때였다. 두 사람은 동시에 “111.” 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서 존이 “37.”이라고 중얼거렸다. 마이클도 마찬가지 말을 했다. 존이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끝났다. 내가 직접 그 성냥개비들을 일일이 세어보니 정말 111개였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셀 수가 있지?”하고 묻자 그들은 “세는 게 아녜요. 111이 보였어요.”라고 대답했다.

(중략)

쌍둥이 형제를 두 번째로 보았을 때는 그들 모두 방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미소로 어쩌면 두 사람만의 기묘한 기쁨과 평화를 맛보고 있는 듯 했다.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들은 둘이서만 숫자와 관련된 기묘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존이 어떤 숫자를 말한다. 6자리 숫자였다. 마이클은 그 숫자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생긋이 웃음 짓고 마치 문제를 풀며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엔 마이클이 6자리의 다른 숫자를 이야기한다. 다시 존이 받을 차례인데 그는 그 숫자를 천천히 반추한다. 그날 그들의 모습은 마치 포도주 애호가가 진귀한 포도주를 한 모금 물고 그 맛과 향에 도취되어 있는 듯헀다. 그들은 아직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며, 최면술에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그저 멍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도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보통의 게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신중함과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두 사람 다 깊은 생각에 잠겨서 범하기 어려운 신성한 분위기를 풍겼다. 늘 흥분하여 떠드는 모습만 보아왔는데 그때는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엄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숫자를 메모나 하기로 작정했다. 그들에게 큰 기쁨의 샘 역할을 하는 숫자, 깊이 생각하고 느긋하게 맛을 보고 두 사람 사이에서만 비밀스럽게 오가는 그 숫자를 받아적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숫자들이 과연 무슨 의미를 띠고 있을까를 줄곧 생각했다. 확실한 의미.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뚜렷한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형제끼리만 통하는 터무니없는 말로서 그저 일시적인 특수한 의미밖예 없는 것일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전을 하면서 루리아가 쓴 쌍둥이 료사와 유라를 생각했다. 그들은 뇌와 언어기관에 장애가 있는 일란성 쌍둥이였는데, 자기들만 아는 독특한 원시적인 말투로 같이 놀며 이야기했다(루리아와 유도비치의 공저, 1959년). 존과 마이클은 단 한마디의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방에게 숫자를 들려줄 뿐이었다. 이들 보르헤스적인 즉 푸네스적인 숫자는 이 쌍둥이만이 아는 포도나무인가, 조랑말의 거친 갈기인가, 하늘의 별인가?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서만 통하는 일종의 부호로서 숫자에 지나지 않는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제곱, 약수, 함수, 소수등이 실려있는 숫자표를 찾았다. 아득히 먼 어린 시절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렸을 적에 나 또한 숫자에 유달리 능해 ‘숫자가 보이는 사람’이라고 불린 적도 있고, 사실 숫자에 남다른 정열을 쏟기도 했었다. 숫자표를 보기 전에 예감하고 있기는 했지만, 역시 생각한 대로였다. 쌍둥이 형제가 주고받았던 6자리 숫자는 모두 소수였다. 소수란 1과 그 자신의 수 이외에는 약수가 없는 양의 정수를 말한다. 두 사람은 내가 간직한 숫자표와 같은 걸 본 것일까, 아니면 갖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들은 111이라는 수가 (또는 37이 3번 있든지)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수가 보였던 것일까? 그것이 계산 결과 얻어낸 숫자일 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산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틑날 나는 소수가 적힌 표를 소중하게 끼고서 병동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역시 방의 한쪽 구석에 앉아 숫자 대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이번에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 앉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흠칫했지만 내가 방해되지 않음을 깨닫고는 6자리 소수 게임을 계속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도 그들의 놀이에 끼어들기로 하고 어떤 숫자 즉 8자리 소수를 말했다. 두 사람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얼굴에는 긴장과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침묵 속에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처럼 오랫동안 그들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지낸 적은 없었다. 30초나 그 이상이 지났을까. 갑자기 두 사람은 동시에 씽긋이 웃었다.

그들은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방법인가를 동원해 내가 말한 숫자가 소수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에게 정말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 이중의 기쁨이었다. 하나는 내가 그들에게 새롭게 즐거운 놀이 한 가지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그들은 8자리 소수는 대해본 적이 없었다. 또 하나는 그들이 즐기고 있는 놀이를 내가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나 역시 숫자놀이를 좋아하고, 그저 보고 관심을 보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함께 끼어 앉아 친구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자를 조금씩 밀어서 나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그들의 세 번째 놀이친구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더니 언제나 먼저 문제를 내던 존이 이상하게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적어도 5분간은 그러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드디어 9자리 숫자가 나왔다. 역시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마이클이 똑같이 9자리 숫자로 되받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나는 숫자표 책을 몰래 들여다보고 꾀를 써서 책에 써 있는 10자리의 소수를 말했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상하게 전보다 훨씬 오랜 침묵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존이 경이로운 정신집중을 거듭한 끝에 12자리 숫자를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책에는 10자리 이상의 소수는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 이상의 책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은 도전에 응해, 시간이 비록 5분 정도 걸리긴 했지만 대답을 찾아냈다. 한 시간쯤 지나고 나자 이 두 사람은 20자리 소수까지 주고받았다. 나는 비록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그것들이 소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1966년 당시에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한, 20자리 소수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아니, 컴퓨터를 사용한다 해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른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 방식으로 꾸준히 풀어가든, 그 이외의 어떤 ‘알고리즘’을 이용하든 소수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큰 소수가 되면 간단한 방법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두 사람은 그걸 하나의 놀이로 즐겼다.

(중략)

이 쌍둥이는 겉으로는 아주 고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친구들이 가득 차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몇천, 몇백만이나 되므로, 때로는 그들이 숫자에게 “어이!” 하고 말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숫자가 그들에게 “어이!” 하고 말을 걸어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 숫자나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설명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말이 되고 말 수도 있지만, ’62의 제곱’과 같이 각각 무언가 이유나 근거를 지닌 숫자만이 그 대상이 된다. 특히 보통방법으로는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숫자가 그들의 친구가 되는 셈이다. 쌍둥이 형제는 천사와 같은 직접적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별 노력 없이도 그들은 숫자로 가득 찬 우주나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두 사람의 주위에는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일종의 고요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평온함을 방해하거나 깨뜨리면 비극이 초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기묘하고 이상하게 여겨질지라도 이를 ‘병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부를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좋다’는 주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만의 불건전한 관계’를 중지시켜야 하며, ‘지금처럼 바깥 세상과 격리시켜 놓으면 그들은 영원히 사회성이 결여될 것’이라는 게 그러한 주장의 논거였다. 이리하여 쌍둥이 형제는 1977년에 헤어졌다. 그 결과가 좋았는지 비참했는지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두 사람은 ‘중간시설’에 따로따로 수용되어 심한감시 속에서 용돈벌이 정도의 시시한 일을 하게 되었다. 단단히 주의를 주고 승차권 대용의 금속제 토큰을 주어 외출시키면 버스에 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우둔하고 정신적으로 이상하다는 것은 척 보아 알 수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도 별 이상 없이 혼자서 처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들이 긍정적인 면이라면,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기록카드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만이 나누던 숫자로 된 대화는 금지되고 명상이나 교감의 기회 혹은 시간조차 모두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일에 시달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숫자에 대한 지난날의 신비한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와 함께 삶의 기쁨이나 살아있다는 감각조차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된 까닭은, 쌍둥이를 떼어놓은 사람들이 그들을 어느 정도 독립 가능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만들기 위해 신비한 능력의 손실 따위는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사소한 희생이라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디아에게 가한 조치를 떠올렸다. (나디아는 스케치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폐증 소녀이다. ‘자폐증을 가진 예술가’ 참조) 나디아 또한 ‘스케치 이외의 분야에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가차없이 치료체제에 따르도록 하는 조치를 받았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사물에 대해 몇 마디 정도는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스케치는 완전히 그만두고 말았다. 나이젤 데니스는 이렇게 썼다.

이리하여 천재소녀에게서 천재성을 빼앗아버리고 말았다. 그 다음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 하나의 뛰어난 재능이 사라지고 어디를 보아도 보통사람 이하인 결함투성이의 소녀가 되었다. 이런 기묘한 치료법이나 고안해내다니, 도대체 우리는 무얼 하는 인간이란 말인가?

또 한 가지 덧붙여 적어두어야 할 점이 있다. (이것은 마이어스도 깨닫고 있는 점이다. 그는 추에 관해 경이로운 능력을 지는 사람들을 깊이 고찰하여, 그 결과를 ‘천재’라는 제목의 장 앞머리에 실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천재성으로 가득 찬 경이로운 능력이란 기묘하기 짝이 없고 불가사의한 것으로, 평생 계속될 수도 있지만 저절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쌍둥이 형제의 경우 그들의 천재성은 단지 ‘능력’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며, 인격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부터 그들은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았고 중심 또한 사라지고 말았다.

이걸보니 ‘찬드라 쿠마리 구룽‘ 사건이 생각나는데,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6 thoughts on “숫자가 보이는 사람

  1. 자폐인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고 이런 건 그렇다 쳐도, 사칙연산을 못하는 사람이 20자리 소수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떤 방식일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네요.

    • 저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올리버 색스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얼굴의 표정이 어찌되었건 얼굴을 기존의 지식과 대조해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인식하지만,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사람은 그런 능력을 상상할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이들이 소수를 보는 능력도 어쩌면 인간이 한 번에 얼굴을 인식하듯이 한 번에 소수를 인식해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 무신론자였던 하디가 라마누잔의 신기에 가까운 직관적 능력을 보고 항상 그때마다 라마누잔이 인도의 어떤 신이 알려주었다고 해서 신이 있는게 아닌 가라는 생각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라마누잔도 수 많은 직관력을 저런 식으로 발휘한게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추측을 해봅니다. 저런 한 쪽에 대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폐인이 아닌 정상적인 사람으로 어느정도 높은 아이큐를 갖고 태어난다면 라마누잔과 같은 시대에 남는 수학자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여튼 많은 걸 느끼게 한 글이네요. 특히 그들이 같이 논의하였던 20자리수가 정말 소수였는지 어떻게 그 소수를 그들이 생각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그 당시에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는게 너무나도 아쉽네요……

      • 댓글을 이제 확인했네요^^ 제가 잘 몰라서 그러니 자리스키님께서는 왜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 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설명부탁드려도 될까요?ㅎㅎ

        토론하자거나 자리스키님을 설득하는게 목적이 아니고 저는 솔직히 어떻게 다른지 잘 감이 안와서 드리는 질문입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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