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오 광독 사건 足尾鉱毒事件

아시오 광독 사건에 관해서는 일전에 포스트[1]한 적이 있지만, 최근 읽는 책에 좀 더 상세한 내용이 있어 인용해본다.

하라다 게이이치 저/최석완 역, “청일 러일전쟁”, 어문학사, 2012

p226-229

후루카와 이치베(古河市兵衛)가 경영하는 아시오동산(足尾銅山)은 1877년에 조업을 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광원을 발견한 것에 힘입어, 1884년에는 일거에 연간 2,286톤 생산, 전국 동 생산량의 26%를 차지하는 우량 광산이 되었다(東海林吉郎 菅井益郎, 『通史足尾鉱毒事件』). 그러나 같은 해 말에는 광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때문에 주변 산림이 그대로 말라죽는 피해가 발생했으며, 87년에는 와타라세천(渡良瀬川)의 물고기와 어부가 모습을 감췄다. 그해 가을 도쿄전문학교에서 광독(鉱毒)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여론을 환기시키게 된 것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난 1890년의 일이다. 8월에 발생한 홍수 피해가 크자 도치기 현 야나카무라(谷中村)의 촌회는 후루카와 이치베에게 손해 배상과 제련소 이전을 요구할 것을 결의하였고, 아즈마무라(吾妻村) 촌회도 제동소(製銅所)의 채굴 중지를 지사에게 상신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각 촌과 도치기 현에서 선출된 중의원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등이 운동을 계속했지만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1900년 2월 광동 피해민 3,500명이 네 번째 도쿄청원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군마 현 가와마타(川俣)에서 처참한 탄압이 벌어져 1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51명이 7월에 흉도취집죄(凶徒聚集罪) 등으로 마에바시(前橋) 지방재판소에서 심의를 받게 되었다(가와마타 사건). 12월의 판결에서는 흉도취집죄가 부정되었으나 같은 해 3월 10일에 공포, 시행된 치안경찰법을 적용하여 19명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피고와 검사 양측 모두가 항소했기 때문에 도쿄공소원에서 1901년 9월부터 공판이 시작되었다.

피고들의 주장은 신문 보도를 통해 알려졌고, 10월에 1주일 동안 실시된 피해지 현장 검사는 국면을 일거에 전환시켰다. 재판장ㆍ배석판사ㆍ검사ㆍ변호사에 전문가인 요코이 도키요시(横井時敬, 제국대학 농과대학), 그리고 도쿄의 8개 신문사(마이니치, 일본, 시사, 아사이, 요로즈초, 니로쿠, 호치[報知], 일출[日出])로 구성된 일행은 ‘마치 이승의 지옥’이라 할만한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각 신문은 광독사건 보도에 열중하게 되는데, ‘광업 정지’의 논진을 펼친 것은 『마이니치신문』과 『요로즈초호』였다.

『마이니치신문』의 주필 이시카와 야스지로(石川安次郎)는 같은 해 6월 8일 자택에서 다나카와 면담할 때 ‘지금은 단지 한 가지 방책만이 있을 뿐'(「当用日記」)이라며 직소책을 전수한 인물이다. 이시카와는 이전 『중앙신문』의 동료였던 『요로즈초호』의 고토쿠 덴지로(幸徳伝次郎,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의 본명)를 직소문 집필자로 정하였다. 결국 세 사람은 ‘모의’하여 대사건을 일으킨다(松尾尊兌, 「田中正造の直訴について」). 다나카 쇼조는 12월 10일 오전 11시 45분 제16의회의 개원식을 마치고 나오던 천황의 마차에 다가가, 광독사건의 직소를 결행했다. 불경죄를 의미하는 대사건은 전국의 각 신문사가 호외를 발행해 보도하였다. 그 결과 한 달 동안 광독문제ㆍ직소사건이 독자까지 끌어들이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요로즈초호』는 광독 피해민의 호소를 ‘의회도 듣지 않고, 정부도 돌아보지 않고, 사회도 도와주지 않으니, 쇼조가 결국 이렇게 하기에 이르렀다'(1902년 1월 1일)고 옹호했다. 이와테 현의 중학생 이시카와 하지메(石川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본명) 소년은 신문을 팔아 모은 돈을 아시오 광독 피해민과 핫코다산(八甲田山) 조난자를 위한 모금 운동에 냈고, 도쿄제국대학 학생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도 연설회에서 감동을 받아 입고 있던 외투와 하오리(羽織, 짧은 겉옷)를 벗어 기부하였다. 다나카 쇼조는 제국 의회에서 고립되어 중의원 의원을 사직(1901년 10월)하였다. 그러나 구원 활동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학생과 여성의 활동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어느 블로그[2]에 설명이 매우 잘 되어 있으니 참조 바란다.

 


[1] http://zariski.egloos.com/2372353
[2] 일본 근대의 표상 : 아시오 광독 사건 by RLam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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