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준의 정규분포

김경준 저, “BBK의 배신“, 비비케이북스, 2012

p131-140

‘나의 기적’은 반드시 일어난다.

남들은 3~4년 받을 징역을 8년이나 받아 총 13년의 형기를 살고 있는 나를 딱하게 보아 격려해주신는 분들이 많다.
“힘내. 긍정적으로 생활해. 곧 좋아질 거야.”
하지만 나를 괴롭히고 어떻게든 죽이려고 하는 현 정부와 검찰이 있는 한 무엇이 잘될 확률은 사실상 없다. 검찰은 지금 나의 ‘형기를 더 늘린다’는 식의 협박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하겠다면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들이어서 어쨌든 나는 ‘무기징역’ 선고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다.

교도소 수용자들, 특히 무기수ㆍ사형수들은 모두 기적을 바라면서 하나님, 부처님에게 기도를 한다. 과연 그분들이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적’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상당히 다르지만.

Pasadena School District(L.A. 북동쪽 지역)의 Field 초등학교 4학년 때, 지금 생각해보아도 나는 참 훌륭한 수학선생님을 만났다. Mr. Goodwin 선생님인데, 학생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수학에 대한 관심을 끌어냈던 분이다. 나의 수학에 대한 관심은 그분 덕분에 증폭되었는데, 그분에게서 나는 주식의 시가총액과 변동 폭 등을 계산하는 방법도 배우고 DowJones가 무엇인지도 배웠다. Mr. Goodwin은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참 잘해주셨다. 엄청나게 귀찮은 질문을 해대는 꼬마였는데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모두 답해주셨으니.

그 당시 매년 지역 전체 수학시험이 있었는데, 나는 4학년 때부터 지역 전체에서 1등을 하기 시작했다. Mr. Goodwin은 학생들의 기초 수학문제 풀기 속도를 키우기 위하여 매주 1회씩 ’30문제를 정해진 시간 안에 풀기’를 실시했다.

처음에는 ‘4+7=11’처럼 쉬운 문제에서 구구단을 거쳐 나눗셈, 그리고 분수까지 올라갔는데, 100점을 받지 못한 학생은 전 단계를 100점 받을 때까지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매번 100점을 받아 다른 학생들은 반도 못한 시점에 이미 선생님이 만든 모든 시험을 끝냈다. 고심하시더니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저런 수학 게임과 Puzzle를 주면서 다른 학생들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가지고 놀라고 하셨다.

bbk1그런데 게임들 중 나에게 특별히 흥미를 끄는 게임이 있었다. 젋은 분들은 그 당시 게임기도 없었고 PC, 스마트폰 따위가 없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으시라.

게임기는 대강 다음과 같이 생겼다.

전체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는데, 구부러진 윗부분은 피라미드식 모형으로 똑같은 길이의 못들이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꽂혀 있다. 통계학 단어로 ‘파스칼의 삼각형‘이라고 불린다. 구부러진 아랫부분은 구슬이 못 사이를 지나 떨어져 들어가는 칸들이 있었다.

게임은 위에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구슬들을 계속 떨어뜨리는 것이다.bbk2
그럼 구슬이 여기저기 못에 튕기다 아래 빈칸들 중 하나로 들어간다. 그때는 몰랐지만 대부분 중간 쪽으로 구슬이 들어갈 확률이 높다. 200~300개의 구슬을 떨어뜨리면 어느 column에 몇 개가 들어가는지 그 통계 결과를 그래프로 그리면 ‘Bell Curve(종형 곡선)’가 형성된다.bbk3
계속 몇 백 개의 구슬을 떨어뜨리면 ‘종형 곡선’ 이 형성되는 것을 보니 참 신기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게임에 한동안 미쳤다. 계속 구슬만 떨어뜨리고 종형 곡선이 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을 되풀이하다가, 몇 번째인지 구슬이 제일 왼쪽 칸으로 떨어진 것이다.bbk4
그때까지만 해도 제일 왼쪽이나 오른쪽 column(Ⓐ나 Ⓑ)에 구슬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상세히 기억이 나는데, 처음에는 구슬이 오른쪽을 향하더니 갑자기 급한 각도를 그리다가 왼쪽으로 튕겨 가서는 Ⓐcolumn에 떨어졌다.

4학년짜리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정상일 지는 모르겠지만 참 신기했다. 왜 어떻게 저기 떨어졌을까? 중간 쪽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은데.

나는 처음에는 내가 무슨 새로운 기법을 발견했다고 착각했다. 즉, 나의 무슨 특별한 동작이 구슬을 그쪽으로 떨어뜨리게 했다는 착각을 했다.

그래서 그쪽으로 아니면 반대 Ⓑcolumn으로 다시 떨어뜨리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떨어뜨릴 때 구슬을 ‘Spin’도 시키고 기준 위치보다 더 높이 떨어뜨리든지, 또 일부러 제일 위 못 중 한쪽에 구슬을 대고 일부러 그 쪽으로 가도록 밀기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구슬은 다시 Ⓐ나 Ⓑcolumn으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또다시 ‘Bell Curve’ 모양으로 떨어졌다.

그날부터 선생님께 부탁하여 그 게임기를 집에 가져갔다. 그리고 밤새 구슬만 떨어뜨렸다. 수백 번을 넘도록, 구슬이 차면 다시 꺼내 다시하고 다시하고 되풀이했다. 그러다 갑자기 또 구슬이 Ⓐ쪽으로 떨어졌다. 저번과 전혀 다른방향으로 튀어 이리저리 가더니 구슬이 갑자기 날개가 달린 듯 빠르게 한쪽으로 달려가 떨어졌다.

나는 미련하게도 Ⓐ나 Ⓑ로 구슬을 매번 떨어뜨릴 수 있는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다고 착각했다. 구슬이 떨어질 때 내가 무엇을 다르게 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르게 한 것이 없었다.

참 할 일이 없었나보다. 계속 그 짓을 몇 주 동안 했으니.

선생님께도 물어보았는데, ‘Bell Curve’에 대한 설명을 들어도 왜 Ⓐ에 떨어지는지에 대한 답을 못해주셨다. 아니, 아마 해주셨는데 내가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계속 구슬을 떨어뜨리는 일만 하니 구슬 떨어뜨리는 일을 빨리 할 수 있게 됐다. 전에는 한 개씩 떨어뜨리다가 이제는 종이 박스를 접어 구슬을 거기 부어서 몇 십개를 자르르 떨어뜨리니 금방 수백 개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자꾸 이러다 보니 2가지는 확실한 것 같았다.
① 거의 매번 ‘Bell Curve(종형 곡선)’ 같은 모양이 형성됐다.
②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하다 보면 구슬이 Ⓐ나 Ⓑcolumn에 가끔이지만 반드시 떨어졌다.

나는 매번 Ⓐcolumn에 구슬을 떨어뜨리는 방법 찾기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적어도 정당한 상식으로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몇 주 후에 게임기를 선생님에게 돌려주고 비슷한 게임기를 백화점에서 구입하여 계속했다. 그 결과, 4학년 당시 모두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확실히 예측할 수 없고 예외적인 일들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리해보니 columnⒶ에 구슬이 떨어지는 것은 통계적으로 ±99% 신뢰구간 밖의 일이었다. 즉, 기적이었다! 나는 그 기적을 4학년 때 처음 인식하면서 몹시 흥분한 것이다.

구슬들은 대부분 중간에 떨어졌다. 마치 인생같이.

그런데 가끔이지만 분명히 Ⓐcolumn에도 떨어진다. 마치 인생같이. 왜, 어떻게 떨어지는지는 설명이 안 된다. 구슬을 Ⓐcolumn에 들어가게 – 다시 말하면, 기적을 이뤄내려면 그냥 무식하게 계속 수없이 구슬들을 떨어뜨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게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했나 보다.
“나는 한 번의 성공을 위하여 수천 번을 실패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떤 때는 단 1번으로 구슬이 Ⓐcolumn으로 떨어질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수천, 수만 번을 해도 Ⓐcolumn으로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게 바로 ‘인생의 갈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계속 수없이 하면 반드시 한 번은 기적이 일어나는데, 도대체 그게 언제인지를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우리는 단 한 번만에 Ⓐcolumn에 구슬을 떨어뜨리는 신화에 대한 뉴스를 매일 본다. 환장할 노릇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무리 떨어뜨려도 Ⓐcolumn에 구슬이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을 ‘무능’, ‘게으르다’는 식으로 매도하고, 단 1번에 떨어뜨린 사람은 훌륭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럼 단 1번에 떨어뜨린 사람은 자신이 무슨 특별한 기법이라도 있는 척하고, 그런 있지도 않은 기법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나 이 또한 모두 착각이다. 내가 4학년 때 알아낸 확실한 사실은 Ⓐcolumn으로 떨어뜨리는 특별한 기법은 없다. 그냥 무식하게 되풀이 도전을 하면 된다. 언젠가는 된다. 죽지 않으면.

이렇게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사람들에게 ‘게을러서’, ‘무능해서’, 또는 요새 인기 있는 개콘의 ‘용감한 녀석들’ 식의 매도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안 될 놈은 안 돼!”
이건 ‘게으름’이나 ‘무능’과는 상관이 없다. 이래서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하는 것이다. 모두 “나는 왜 안 될까? 다른 사람은 1번에 되는데” 라면서…

더욱더 큰 문제는, 어떤 사람들은 ‘안 되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안 해서’,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지 못해서’라고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아무리 구슬을 Ⓐcolumn에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해도 기도를 안 할 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구슬 게임’을 기억하면서 살았다.

나중에 Morgan Stanley(모간 스탠리)에 입사한 후에는 Morgan Stanley의 슈퍼컴퓨터에 구슬 게임을 프로그래밍한 다음, ‘Monte Carlo simulation(확률적 시스템의 모의실험에 이용되는 절차)’를 수조 번 한 적도 있었다. 그 결과를 보면 정말 엄청난 사실도 볼 수가 있었다.

처음부터 10게임 연속 Ⓐcolumn으로 구슬이 100개 떨어진 ‘Event’도 있었고, 구슬 10만 개를 떨어뜨려도 Ⓐcolumn에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잘될 땐 잘되고 안 될 때 정말 안 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구슬을 떨어뜨리는 것 외에는 없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구슬이 왜 Ⓐcolumn에 안 들어가는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자주 들어가지는지가 ‘인생 최고의 갈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갈등 때문에 종교가 있고 철학도 있고, columnⒶ에 넣은 사람에게 무슨 특별한 기법이 있는 줄 알고 그 사람의 가르침을 쫓는다.

또 빠릴 구슬을 columnⒶ에 넣은 사실을 능력이라고 착각하여 그 사람이 더욱 중요한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그들이 모은 사회 계층이 형성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착각이고 사회적 갈등과 좌절만 만든다. 내 말을 못 믿겠으면 구슬 게임을 해보아라.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사실.

대개 사람들은 기적이 좋은 것으로만 생각한다. 로또에 맞는다든가,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깨끗이 낫는 식으로 구슬은 columnⒶ에도 들어가지만, 정반대로 columnⒷ에도 떨어진다. 즉, 나쁜 일 또한 기적인 것이다.

인생에는 좋은 기적도 있지만 나쁜 기적도 많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공평하다.
“나는 한 번의 성공을 위하여 천 번을 실패했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 교훈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계속 노력하면 좋은 기적이 생길 수도 있지만, 나쁜 기적이 생길 수도 있다.
“나는 한 번의 엄청난 실패를 위하여 천 번을 실패했다.”
이 교훈도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노력을 아무리 해도 더 큰 실패가 되는 것 또한 “Bell Curve(종형곡선)” 통계에 부합되는 결과다.

정리해보자.
① 기적은 반드시 일어난다.
② 기적을 일궈낼 수 있는 방법은 끝없는 노력이다(계속 구슬을 떨어뜨려야 한다).
③ 하지만 꼭 좋은 기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기적과 나쁜 기적이 생길 가능성은 동일하다.
④ 기적은 통제하는 방법이라든가 만드는 기법은 없다(계속 무식한 노력 외에는).
⑤ 기적을 만드는 방법은 없다. 또 언제 기적이 일어나는지도 사람마다 다르고, 특별한 이유도 없다. 따라서 좋은 기적을 빨리 이루어냈다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나는 그래서 ‘성공의 비결’, ‘긍정의 힘’ 따위의 책들은 살아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왜 안 되지?’라고, 좌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옥에 13년 동안 갇혀 있으면 좌절, 절망할 가능성이 높다. 또 나 같은 사람이 교도소에 오는 것도 드문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내 인생은 약 10년 동안 계속 참기 힘든 나쁜 기적들만 되풀이됐다. 하지만 나의 ‘Monte Carlo simulation’을 수조 번 해본 결과, 충분히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에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느다.

좋은 기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구슬을 더 많이 떨어뜨리는 방법밖에 없다. 또 그러다가도 나쁜 기적도 계속 생긴다는 사실과, 대부분의 구슬들이 의미없는 중간으로 떨어진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좋은 기적’에도 확실히 떨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구슬을 떨어뜨리면서 살아간다. 못된 존재들이 아무리 나에게 절망과 좌절을 주려고 해도 나는 계속 끝없이 구슬을 떨어뜨릴 것이다.

글을 읽어보면 참 똑똑한 인재 같은데, 운이 너무 나빠서 좀 안타깝다.

Advertisements

8 thoughts on “김경준의 정규분포

  1. 핑백: 無逸

  2. 노력 끝에 찾아온 기적이 나쁜 기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 인상깊게 들리네요
    그래도 구슬을 계속 떨어뜨리다 보면 큰 수의 법칙에 의해, 누구든지 언젠가 A column에 도달할 날이 있겠죠…

  3. 자리스키 블로그에 진짜 오랜만에 온다. 잘 지내나. 언제 부산 함 와라. 맛있는거 대접할게. ㅎㅎ
    점심식사 하다가 MB 성토대회가 열려서 간만에 “김경준 BBK 진실” 로 구글링을 해봤는데, 자리스키 블로그가 튀어나오는구나.
    김경준씨 똑똑하기도 하고, 좋은 교육과 화려한 커리어를 걸어온 사람인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 결국 Column B로 들어간 공이 되버렸네.
    다시 재기하겠지. 넘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데 익숙해졌겠지.
    정규분포를 배울 수 있는 저 장난감은 하나 갖고 싶네. 아들한테 하나 선물하고 싶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