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파리 세계 수학자 대회 당시 분위기

조지 G. 슈피로 저/심재관 역, “케플러의 추측“, 영림카디널, 2004

p199-202

당시 70대였던 힐베르트는 명예교수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괴팅겐 대학은 예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힐베르트는 자신의 이름인 다비트가 유대혈통과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 어느 만찬회 자리에서 나치스 정권의 장관이 유대인 축출 때문에 괴팅겐 대학의 수학이 타격을 입지는 않았느냐고 힐베르트에게 물었다. 장관은 교활하고 해로운 유대인의 분석적 방법론을 솎아내고, 대신 선하고 순수한 독일 고유의 종합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수학 분야가 크게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다는 답변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깊은 슬픔과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힐베르트가 다음과 같이 답변했을 때 장관은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타격을 입었느나고요? 타격 정도가 아니죠. 이제 괴팅겐에는 수학이라는 학문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힐베르트는 지식의 탐구에 평생을 바쳤다. 당시에는 철학자 에밀 뒤부아 레몽Emil DuBois-Reymond의 염세주의 철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레몽은 이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힐베르트는 이러한 염세주의 철학을 극도로 혐오했다. 레몽의 염세주의적 관점은 그가 좌우명처럼 여겼던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다Ignoramus et ignorabimus“란 말에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힐베르트는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1943년 사망했을 때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언젠가 라디오 강연에서 한 말이 새겨졌다.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며, 또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힐베르트의 낙관주의적 관점을 잘 알 수 있는 말이다.

당시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도 힐베르트에 버금가는 위대한 수학자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코 라이벌 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제2회 세계 수학자대회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게 된 푸앵카레는 힐베르트에게 모든 참가자들이 길이 기억할만한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세계 수학자대회는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데, 제1회 대회는 취리히에서 1897년에 개최되었다. 그리고 제2회 대회는 파리에서 1900년에 열릴 참이었다. 1897년에 4를 더하면 1900년이 아니라 1901년이 되지만 마침 1900년에 세계박람회가 열리고 있었기에 그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사실 세계박람회 때문에 그해 파리에서는 200여 개의 과학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힐베르트는 푸앵카레의 요청을 받고 처음에는 망설였다. 새로운 세기의 수학 연구를 전망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올 미래의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전 세계에서 몰려운 참가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힐베르트는 흥미로운 방식을 생각해 냈다. 20세기 수학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방법으로, 풀리지 않은 중요한 수학의 문제들을 참석자들에게 제시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그는 취리히에 있는 민코프스키와 후르비츠Hurwicz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힐베르트의 생각에 적극 찬동했다. 하지만 힐베르트는 막판까지도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6월 초청장이 전세계 수학자들에게 발송되었지만 힐베르트 강연은 일정에 잡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힐베르트는 강연 준비를 계속해 갔고 7월 중순 경에 준비를 완료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푸앵카레가 애초 계획한 것처럼 주요 강연으로 일정에 넣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어쩔 수 없이 힐베르트의 강연은 서지학과 역사, 수학교육 및 방법론을 아우르는 합동 분과 학술회의로 배정되었다. 이들 분과는 다른 순수 이론 분과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는 평이 있었지만 힐베르트의 강연 덕분에 따분하기만 하던 세미나는 큰 활력을 얻게 되었다.

힐베르트의 강연이 있기 전에 253명의 참가자 가운데 일부는 여흥 프로그램이 너무 적다며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들 점잖은 수학자들은 환락의 도시 파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 무언가 멋진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파리에는 세계적인 쇼를 공연하던 폴리 베르제르캉캉으로 유명한 물랭루주 같은 곳이 있었다. 캉캉 무용수들을 두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공중으로 경쾌하게 다리를 차올리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도덕심은 그만큼 봄볕의 눈처럼 녹아내린다.”

물론 과학도 좋지만 이런 멋진 쇼까지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 ‘포크댄스’보다 스포츠에 더 관심이 있는 참가자라면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었던 제2회 올림픽을 관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흥분했을 것이다.67) 세계박람회를 구경하거나 에펠탑에 올라가 보는 것도 기분전환으로 좋았으리라.

좋은 구경거리가 곳곳에 있었지만 수학자대회는 별다른 여흥 거리가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수학 세미나 뿐이었다. 차츰 참가자들 사이에는 불만이 높아갔다. 그러나 불만의 소리는 힐베르트의 강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다. 국제수학연맹의 공식 기록문서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파리 대회는 영광의 한가운데에서 영원한 빛을 발할 것이다.” 물랭루주, 에펠탑, 올림픽 대회는 관심에서 사라졌다. “파리 세계수학자대회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강연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강연에서 힐베르트는 다음과 같은 권두사로 청중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미래를 가리고 있는 베일을 열어젖히고 다가오는 세기에 과학의 진보는 어떠할지, 그 비밀스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사람이 우리들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힐베르트는 자신의 비전을 근 한 시간동안 피력한 다음, 수학의 문제들에 대한 논의로 넘어갔다. 하지만 허용된 시간을 이미 거의 다 사용한 탓에 애초에 의도했던 23문제 모두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10개의 문제만을 언급했고, 목록을 작성해 나중에 따로 참가자들에게 배포해야 했다. 연설 말미에 그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표명했다. “수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모든 엄밀한 학문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에는 뛰어난 학자와 열의에 찬 연구자들이 출연하여 이런 야심찬 임무를 완성해 낼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강연을 끝맺었다.

 


67) 하지만 올림픽을 관람했더라도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올림픽은 혼란 속에 치러졌다. 근대 올림픽의 주창자 쿠베르탱Coubertin 남작은 후일 이렇게 말했다. “이런 대회를 치르고도 올림픽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역시 환락의 도시 파리!!! 뭐 그 유명한 힐베르트의 연설도 좋지만 노는 게 더 좋았을 도시로세 ㅋㅋㅋㅋ

참고로 에밀 뒤부아 레몽은 이 책에서 철학자로 소개되어 있지만, 위키피디아에서는 신경 생리학자로 소개되어 있다. 철학 보다는 과학 쪽에 업적이 더 많은 듯.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