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Citadel의 탄생

일전에 소개한 세바스찬 말라비의 저서에서도 헤지펀드 시타델 이야기가 잠시 나오지만, 시타델의 최초 모습은 언급되지 않는다. 시타델의 설립자 켄 그리핀 씨는 탑 헤지펀드 매니저 순위 상위권에도 자주 나오는데, 이 친구가 어릴 적부터 이렇게 난 놈인줄 몰랐다. 낭중지추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컥.

스캇 패터슨 저/구본혁 역, “퀀트“, 다산북스, 2011

p118-124

제너럴일렉트릭(GE) 프로젝트매니저의 아들인 그리핀은 하이테크 기계부문에 소양이 있었으며, 상황의 인과관계를 알아내는 데 관심이 많았다. 푸른 눈을 깜박이지 않고 상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리핀은 언제나 복잡한 이슈들을 갚이 통찰해서 어느 누구보다 잘 해결해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으며, 이런 재능이 혼란스러운 금융계에 그가 아주 적합한 인재가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핀은 보카라톤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었을 때 처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손을 댔으며, IBM에서 컴퓨터코드를 설계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집 근처에 있는 컴퓨터 랜드Computerland에 그를 데려다주곤 했는데, 그는 그곳에서 영업사원들과 새로운 제품들과 소프트웨어에 대해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곤 했다. 아직 열여덟이 채 되지 않았던 1986년에 그는 컴퓨터랜드에서 사귄 몇몇 친구들과 함께 디스커버리 에듀케이셔널 시스템스Diskovery Educational Systems리는 회사를 설립해서 교육용 소프트웨어들을 학교들을 대상으로 판매한다는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겼다. 비록 몇 년 후 매각하기는 했지만,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웨스트팜비치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하버드대학 신입생 시절에는 포브스Forbes에서 홈쇼핑 네트워크Home Shopping Network 주식가격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읽은 후, 주가가 하락하면 수익을 얻을 목적으로 이 회사주식에 대한 풋옵션을 매수했다. 몇 천 달러를 벌 정도로 거래는 성공적이었지만, 시장조성자였던 서스쿼해나 인터내쇼널 그룹Susquehanna International Group이라는 필라델피아의 증권회사에 떼어준 수수료와 거래비용을 제하자 그가 올린 수익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 일을 통해 투자게임이라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그는 금융시장에 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에드 소프가 애호하던 투자수단인 전환사채를 다룬 교과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는《시장을 이겨라》에서 소프가 주장했던 아이디어들이 학계에 널리 퍼져서 미국 전역의 재무학 강의실에서 강의되고 있었는데, 그리핀도 이 책을 접하고 소프의 이론에 푹 빠져 버렸다.

소프와 마찬가지로 그리핀도 많은 전환사채들의 가격이 잘못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가격이 잘못 결정된 채권틀을 찾아내는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는 그의 컴퓨터 기량이 큰 역할을 했다. 시장의 최신정보를 직접 입수하고 싶었던 그는 기숙사가 있던 하버드 대학 캐봇하우스 옥상에 위성수신 안테나를 설치하고 수신케이블을 4층의 창문을 통해서 연결한 후,이를 다시 엘리베이터 통을 거쳐서 3층자신의 방으로 연결함으로써 실시간 주가변동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 작업을 진행하는데 있어서의 유일한 걸림돌은 케이블 때문에 4층 창문이 캠브리지의 엄동설한에도 완전히 밀폐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인 1987년 여름방학 동안, 그는 팜비치의 퍼스트 내쇼날 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한 친구를 자주 찾았다. 어느 날, 그는 전환사채와 헤징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그 친구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사울 골킨이라는 한 은퇴자가 우연히 사무실로 들어섰다가 그리핀의 달변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점심 약속 때문에 가봐야하니 5만달러를 내놓겠소”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했던 그리핀은 방금 골킨이 하버드의 애송이인 그에게 5만 달러를 맡기겠다고 약속한 것이라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사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 등 친구 및 친지들로부터 더 많은 지금을 유치하기를 원했던 그는 결국 26만5천 달러를 모아서 (놀랍게도 소프의 최초의 펀드인 컨버티블 헤지 어소시에이츠와 이주 비슷한) ‘컨버터블 헤지펀드 넘버원 (Convertible Hedge Fund # 1 )’이라 이름을 붙인 합자회사(리미티드 파트너십)를 설립했다· 가을에 학교로 돌아온 후, 그는 이 자금의 대부분을 (소프의 델타헤지전략에 따라) 저평가된 워런트를 매수하고 주식을 공매도함으로써 그 포지션을 헤지히는 데 투자하기 시작했다.

타이밍이 아주 절묘했다. 그 해 10월 19일에 주식시장의 대폭락이 발생 했고, 그리핀의 공매도포지션이 워런트보다 더 많이 하락해서 대박을 터뜨렸다.

폭풍우가 진정된 후, 그는 75만 달러의 또 다른 펀드를 모집했고 그 펀드에 ‘컨버티블 헤지펀드No.2’ 라는 이름을 붙였다.

블랙먼데이에 피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약간의 수익을 올린 그의 능력은 하나의 계시와도 같았다. 월가의 전문가들이 박살이 난 반면, 위성통신과 컴퓨터 및 복잡한 투자전략을 사용해서 자신의 하버드 기숙사에서 거래를 했던 신동은 완전히 떠 버렸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앞에 펼쳐진 엄청난 가능성을 처음 감지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있었다. 우선 더 많은 유가증권들을 접해야 했다. 그것은 뮤추얼펀드나 헤지펀드와 같은 전문적인 트레이더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계좌인 기관거래계좌를 가져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막 19세가 된 1989년에 그는 메릴린치의 보스턴 지점에 근무하던 전환사채전문가인 테렌스 오코너를 찾아가서 분명 미친 짓처럼 보이는 계획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세의 대학생인 나, 켄 그리핀이 세상에 알려진 거의 모든 투자수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당신 회사의 가장 정교한 트레이딩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십시오”

어쨌든 그는 자신의 기술적인 노하우를 발휘해서 이 채권전문가를 경탄시켰고, 이 일을 성사시켰다. 오코너는 당시 평균적인 기관계좌가 1억 달러 정도의 규모인데도 불구하고, 그리핀에게 기관계좌를 개설해주는데 동의했다.

그리핀은 트레이딩을 하면서, 그와 연결되는 월가의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체로 돌아온 반응은 이랬다.

“기숙사 방에서 20만 달러를 운용하고 있다고? 다시는 내게 전화 걸지 마!” 쾅.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어린 하버드 괴짜에게 빠져서 그들이 하고 있는 거래들에 대해서 설명해주곤 했다. 차익거래, 헤지펀드들이 왜 차익거래를 하는지, 왜 은행들은 스스로 차익거래에 참가하는지 등이 그들이 그에게 들려준 내용들이었다. 그리핀은 뉴욕을 직접 방문하기 시작했고, 능숙한 트레이더들 바로 앞에 앉아서 그들의 지식을 흡수했다. 그는 특히 대주(貸株) 데스크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를 통해서 어떤 펀드들을 상대로 은행이 어떤 주식들을 빌려주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파악할수 있었다.

경제학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기 바로 전, 그리핀은 트리플 I의 매니저인 저스틴 아담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웨스트팜비치의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를 함께 하며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니누었다. 뜨거운 오믈렛을 먹으며, 그리핀은 자신이 어떻게 월가의 증권중개회사 트레이더들과 접촉할 수 있었으며, 트레이딩 세계의 내부비밀들 중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대형 금융거래업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베트남에서도 근무했던 미 육군 특수부대 출신인 아담스는 궁금증이 많은사람이었다. 너무도 똑똑하고 집중력이 뛰어났던 그리핀은 시장에 대해 예리하고 일관성 있는 질문들을 던졌는데, 그 질문들이 너무 예리해서 아담스가 말을 멈추고 논리적인 답변을 고민해야될 정도였다.

아담스는 프린스턴/뉴포트뿐만 아니라 트리플 I의 투자자인 프랭크 메이어와 그리핀 사이의 만남을 주선했다. 메이어 역시 트레이딩이 더욱더 조직화/전자화됨에 따라 중요한 기량이 되고 있는 컴퓨터에 대한 전문지식 뿐만 아니라 투자의 기술적인 측면까지 꿰뚫고 있는 그리핀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메이어에게 가장 큰 감명을 준 것은 시장에 대한 그리핀의 지식이었다.

“만약 당신이 겨우 수십만 달러를 관리히는 나이 어린 애송이라면 공매도를 위해 주식을 빌리는 것이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메이어가 회상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모든 주요 대주회사들을 다 찾아가서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가 워낙 유별났기 때문에 그들은 그에게 좋은 조건으로 대주를 해주었더군요”

그리핀은 1989년 말 시카고에 1백만 달러의 투자자산으로 사무실을 개설했고 그가 직접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전환사채를 거래해서 순식간에 엄청난 돈을 벌었다.주2 트레이딩을 시작한 첫 해에 그리핀은 70퍼센트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감명을 받은 메이어는 그리핀이 자신의 펀드를 설립하는 것을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유사한 트레이딩 전략을 수행하는 다른 펀드들을 생각했고, 그때 에드 소프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 결과 그리핀은 자신의 사무실과 종자돈을 갖게 되었다. 그는 아주 적은 수의 트레이더들도 채용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애송이를 상사로 모시고 일해야 한다는 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는 펀드의 명칭이었다. 그리핀과 그의 새로운 종업원들은 떠오르는 이름들을 빠짐없이 적어내려 갔고, 그 이름들에 대해 투표를 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이름이 바로 시타델이었다. 헤지펀드 산업이 경이적인 성장을 보였던 10년이 막 시작되던 1990년이 되면, 그리핀을 위한 돈의 성채(城砦)가 싸울 태세를 완전히 갖추고 모든 금융부문이 가장 두려워하는 돈버는 기계들 중 하나가 되는 장도에 나서게 된다.

 


2. 나는 그리핀과의 한 차례 인터뷰와 그리핀 밑에서 일한 사람들과의 많은 인터뷰들을 통해서 그리핀과 시타델의 역사에 대한 많은 구체적인 내용들을 입수했다. 다른 세부 내용들은 아래의 기사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시타델의 그리핀: 헤지펀드계의 슈퍼스타(Citadel’s Griffin: Hedge Fund Superstar)〉 마르시아 빅커스 Marcia Vickers, 〈포춘〉2007년 4월 3일. “26퍼센트의 수익률을 올린 시타델이 헤지펀드의 틀을 깨고 IPO를 추진하고 있다(Citadel Return 26 Percent, Breaks Hedge Fund Mold, Sees IPO).” 캐서린 버튼Katherine Burton, 〈블룸버그 뉴스 서비스〉, 2005년 4월 29일. “헤지펀드는 다음 번 골드만삭스가 될 수 있을까(Will a Hedge Fund Become the Next Goldman Sachs)?” 제니 앤더슨Jenny Anderson, 〈뉴욕타임즈〉, 2007년 4월 4일

그리핀이 오코너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니, 허생이 변씨에게 십만냥을 꾸는 이야기가 생각나는구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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