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서문

장 지글러 저/양영란 역,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갈라파고스 2013

유럽 한가운데 놓인 해적 떼 소굴

지난 200여 년 전부터 스위스에서는 소수 집단이 국가와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스위스의 입법과 이념, 선거를 통한 관료체제는 이들 소수집단의 필요에 따라 좌우되고 있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은행 시스템, 그리고 은행 비밀이라는 절묘한 제도 덕분에 스위스를 지배하는 소수 집단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은닉자’ 로 활약한다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는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그 후 무수히 판본을 거듭했으며 28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나는 이 책을 출판하고 나서 내 나라 지도자들로부터 극심한 증오를 한 몸에 받았다. 의원 면책특권을 박탈당했으며, 스위스의 주요 언론들로부터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까지도 모욕을 당하고,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나는 눈사태처럼 밀려오는 줄 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각기 다른 다섯 개 나라에서 아홉 건의 소송이 줄을 이었는데, 이는 모두 스위스의 은행들과 각국에 진출한 그들의 패거리가 주동이 되어 나를 상대로 한 소송들이었다. 난 그 모든 소송에서 패소했다. 은행 신뢰도를 훼손시키고 중상모략을 한 데 대한 손해 배상으로 수백만 스위스 프랑을 지급하라는 판결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 책에서 사실관계 면에서는 어떠한 오류도 찾아내지 못했다. 스위스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나의 적들은 그 같은 오류를 잡아내지 못했다. 나는 아내 에리카 도이버 지글러의 지지와 내 책을 내준 쇠이유 출판사의 올리비에 베투르네의 변함없는 우정과 통찰력 있는 조언 덕분에 그처럼 크나큰 시련을 견디고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스위스는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조세 천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2013년 현재, 모든 역외 재산, 즉 원래 형성된 곳이 아닌 곳에서 관리되는 재산의 3분의 1 이상이 스위스 은행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스위스의 화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 미국의 달러화와 유럽의 유로화 보다 훨씬 막강하다. 스위스 프랑화는 지구상에서 가장 잘나가는 부유층에게 예나 지금이나 가장 탁월한 안전통화로 인식되고 있다.

스위스 소수 집단이 소유한 천문학적 부의 원천은 크게 나누어 첫째, 선진산업국가, 특히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탈세자본, 둘째, 세계적인 범죄조직 카르텔이 벌어들인 수입을 세탁한 금융상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세계 독재자들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의 부패성 자금,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던 1990년 이후, 스위스의 구조가 지닌 폭력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몇몇 통계 숫자만 바뀌었을 뿐이다. 따라서 거듭 말하거니와, 지난 20여 년 동안 스위스의 권력구조, 세계에서 스위스 은행들이 수행해온 역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 한국에서 번역 출판되는 이 책에 붙이는 이 서문에서 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중요한 두 가지 사건들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해 보려 한다.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전대미문의 금융 재앙이 2008년 초 전 세계를 강타했다. 투기를 일삼는 자들의 병적 탐욕과 포식자들의 도를 넘는 뻔뻔함 때문에 일어난 이 금융 위기로 무려 85경 달러어치 자산이 증발했고, 이는 세계 5대륙에서 대량실업으로 이어졌으며, 그 때문에 수억 가구가 빈곤과 내일에 대한 불안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게 되었다.

거의 모든 선진국가에서 이 금융 재앙은 국가와 금융계를 쥐락 펴락하는 소수집단사이의 역학관계를 심도 있게 바꾸어 놓았다. 대부분 국가셰서 국가는 국가 본연의 역할을 되찾았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발맞추어 슬그머니 뿌리를 내렸던 무정부적인 규제 철폐에 종지부를 찍고 고유의 규제 권한을 재탈환했으며, 자본에 대해서 일정한 규칙과 제한, 새로운 의무 규정 등을 강제하기 시작하였다. 거의 모든국가에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스위스만은 예외였다.

스위스 연방의 재무부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19세기의 위풍당당한 사암 건물에 둥지를 틀고 있다. 검은색 방탄 벤츠 자동차 한 대가 해질 무렵 이 건물 앞에 섰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틀어쥔 은행가 세 명이 자동차에서 내렸다. 세 사람은 모두 개인 자산관리 부문에서 세계 1위, 규모에서는 세계 5위, 스위스 1위를 차지하는 UBS(Union de banques suisses) 소속이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세 사람에게서는 한결같이 튀지 않는 은근한 멋과 우아함이 풍겼다. 이들은 연방 재무업무 참시관, 다시 말해서 재무장관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음산한 2008년 10월의 어느 날이 었다. 취리히 은행가들은 연방정부 측에 긴급 지원을 요청할 참이었다. 이들이 가꾸어온 제국이 파산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무려 7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민주주의를 신봉해온 자랑스러운 정통 민주국가다. 스위스의 의회와 정부는 자유선거를 통해 구성된다. 그런데 거의 200여 년 동안 진짜 권력, 곧 유일한 실세는 은행이라는 소수 집단이었다. 연방정부는 전적으로 이들 소수 집단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다. 그러므로 저녁의 방문객들은 자신들의 청을 들어달라고 애걸복걸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펜젤 산악지대 출신으로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정치인으로 통하는 한스 루돌프 메르츠 장관은 더구나 왕년에 UBS에 몸담았던 경력이 있는 자였다. 메르츠 장관은 예전 상사들에게 그들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동의했다. 납세자들이 낸 세금 700억 달러를 기금으로 출연하여 UBS 측의 부실채권(특히 서브프라임 부동산 채권과 회수 불가능한 회사 채권 등)을 사들이는 것은 물론 80억 달러의 현금 지원을 통해 목전에 처한 은행의 지불정지 사태를 막아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프랑스 은행들의 경우도 정부의 도움으로 파산 위기를 넘긴 건 마찬가지이지만, 프랑스정부는 그 대신 관련 은행들의 지분구조내에서 지배주주로서의 지위를 요구했다. 다른 나라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파산 상황에 처한 은행들은 완전히 국영화되었다. 또 독일에서는 정부가 공적 자금 지원을 받은 은행들의 이사회에 이사로 참석하여 향후 공적 자금 사용과 관련한 정책을 통제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연방정부는 UBS 이사회에 참가하겠다는 조건을 걸지도 않았고, 지배 주주가 되겠다거나 공적 자금을 수혈 받아 파산 상태에서 살아난 은행 제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통제권을 강제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UBS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투기를 비롯하여 재앙을 초래한 수많은 각종 관행을 답습하고 있다. 2012년 UBS는 29억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은행의 주요 지도자들은 천문학적 급여 외에 29억 달러의 보너스를 챙겼다. 금융 위기로 극심한 동요를 겪은 여타 스위스 은행들의 지도급 인사들의 처신도 다르지 않다. 스위스 2위 은행으로 2011년, 2012년 연속으로 적자를 낸 크레디 스위스Credit suisse의 브래들리 더간Bradley Dougan 회장 역시 자신에게 850만 달러의 급여 외에 850만 달러의 보너스를 책정했다.

퇴임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챙기는 두둑한 보너스는 그렇다 치고, 스위스 은행의 포식자들 사이에서는 새로 부임할 때 이른바 ‘부임 보너스’를 요구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첫 달 월급을 받기도 전에 이들 신임 대표들은 ‘그 자리에 부임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조로 수 천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는다. 수백 개도 넘는 사례 중에 딱 한 가지만 소개한다. 2013년 UBS에 새로 부임한 앙드레 오르셀Andre Orccel 회장은 ‘부임 보너스’로 3,000만 달러를 받았다.

스위스 납세자들 입장에서 보면, 은행의 날강도 짓은 또 다른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스위스 법에 따르면 은행은 수입을 얻기 위해 지출한 경비를 세금에서 공제한다. 여기에는 은행이 그릇된 관행으로 외국에서 지불해야 했던 각종 벌금들도 포함된다. UBS의 사례를 보자. 2012년 일본과 미국의 금융시장 감독기관은 대규모 사기 네트워크를 발견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서 UBS를 포함한 국제적인 대형 은행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른바 리보 금리를 멋대로 조작하는 사기행각을 일삼아왔던 것이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UBS는 14억 달러의 벌금을 지불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2009년에 이미 미국 법무부는 미국 정부에 위해를 가하는 세무 사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UBS 측에 음모 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에 따라 UBS는 7억 8,000만 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같은 해 UBS는 세무사기 소송을 면하기 위해 맨해튼 검사와 재판 외 조정 절차를 밟아 1억 4,600만 달러 선에서 벌금을 조정했다. 2012년 UBS의 런던 지점에 근무하는 가나 출신 트레이더 크웨쿠 아도볼리Kweku Adoboli는 고객들에게 20억 달러의 손실을 초래했다. 영국 법정은 은행이 고용한 트레이더를 감독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UBS에 4,5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런가 하면 2012년 12월 밀라노 법원은 UBS에 1억 500만달러의 벌금을 물렸는데, 밀라노사의 주식 투자에 제대로 된 조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벌금들은 물론 소송비용, 손해배상 비용등 UBS가 해외에서 자행한 불법적 관행 때문에 발생한 모든 지출은 결국 스위스의 납세자들이 지불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는 형편이다.

UBS는 스위스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한 국가예산 부족분은 고스란히 스위스 납세자들이 메워주는 형국이다. UBS가 받는 특혜는 크레디 스위스나 그외 수십여 개의 스위스 은행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사정들로 미루어 우리는 2008년에 터진 금융 위기를 통해 스위스 은행이라는 소수집단이 한층 더 뻔뻔해졌으며, 세계적 수준에서 한층 강력해졌을 뿐 아니라 지배력마저 커졌다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략)

스위스 주변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OECD 회원국들을 중심으로 외교적 압력을 가한 덕분에 다소 성과를 얻어냈다. 이중과세에 대한 논의 결과, 수입 누락이나 문서위조를 모두 탈세로 간주하는 새로운 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 정도가 말하자면 이러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지구상에서는 5초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 한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 날마다 5만7,000명이 기아로 숨지며, 거의 10억 명 (현재 세계 인구는 76억 명이다)에 가까운 사람들이 상시적으로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세계식량농업기구가 발행하는 《월드푸드리포트》에 따르면, 현재 상태 그대로의 세계 농업으로는 적어도 120억 명은 무리 없이 먹여 살렬 수 있다. 120억 명이라면 현재 세계인구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한다.

새천년이 시작될 무렵만 해도 기아 때문에 자행되는 떼죽음, 객관적인 식량 부족 문제 등은 전혀 대두되지 않았다.

기아로 목숨을 잃는 아이는 살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세계에서 살고 있다.

현재 49억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른바 제3세계라고 일컫는 121개국 기운데 한 곳에 살고 있다. 이들 국가의 대다수는 이중과세 협약 혜택을 받치 못한다. 나는 최근에 콩고의 북 키부Kivu에 위치한 고마에 다녀왔다. 취리히보다 두 배쯤 큰 도시다. 그런데 병원에는 항생제가 없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대통령 조세프 카빌라와 그의 동조자들이 국고를 탕진한 결과였다. 이들이 빼돌린 돈의 대부분은 스위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제네바에 숨겨져 있다. 국민의 고혈로 이루어진 돈.

거의 모든 은행은 자산반출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있다. 이 부서에서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등의 지도급 인사들을 부추겨서 그들의 계좌를 개설한 다음 나머지 모든 일을 다 알아서 처리해준다. 많은 스위스 은행가들이 대량살상의 적극적인 공범이다. 제네바와 취리히의 지하에 보관되어 있는 수십억 달러는 학교에도 못 가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아파도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의 고통과 맞바꾼 돈이기 때문이다.

니는 거듭 강조한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 도처에 자국을 약탈하는 도적들이 있기 마련이다. 프랑스 올랑드 정부의 전 예산장관 제롬 키위자드Jerome Cahuzac, 즉 본질적으로 프랑스 탈세자 추적이 주요 임무인 그는 2013년 4월 7일 그 자신이 제네바에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유럽에서 아직 기아로 죽는 사람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도, 실업수당은 점점 줄어들고, 빈곤은 확산되며, 영양부족은 일상화되고 있다. 스위스의 많은 은행들이 이러한 기만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공범이라는 사실은 전혀 영예롭지 못하다. 국민의 고혈과 맞바꾼 돈은 유럽 선진국에서 자행되는 탈세보다 훨씬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날마다 남반구 주민 수천 명, 특히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후략)

스위스 은행가들이 국제 범죄자의 피신과 재산은닉을 노골적으로 돕고 있는 과정을 소개하는 대단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