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대한산악연맹의 K2 등정

일전에 소개한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저자 존 크라카우어의 책인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의 중간에 1986년 한국인 최초로 K2의 등반에 성공한 대한산악연맹의 등정을 잠시 묘사하는 부분이 있어 발췌해 본다.

존 크라카우어 저/하호성 역,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 자음과 모음, 2006

p292-304

누구나 알고 있듯이 오늘날 고산 등반의 나아갈 방향은 1975년 여름에 제시되었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가 K2 바로 옆에 있는 봉우리인 8068미터의 가셔브룸 I봉을 무산소, 무지원에 고정로프도 쓰지 않고 알파인 스타일로 신 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한 것이다. 그들은 히말라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방법인 극지법 – 루트 상에 차례대로 캠프를 미리 설치해 두는 방식 – 을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산을 올랐다. 메스너는 이 대담한 새 방식에 대해 ‘정당한 방법으로 오르는 등반’이라는 적절한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정당한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단 한 차례의 놀라운 등반을 통해 메스너와 하벨러는 고산등반의 기준을 매우 높게 끌어올려 놓았다. 처음에 메스너가 히말라야의 8000미터 고봉을 테톤과 알프스에서 행해지던 등반방식인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겠다고 발표했을 때, 세계의 일류 등반가들 대부분은 그의 계획은 절대 불가능하며 오직 자살 행위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메스너와 하벨러가 알파인 스타일로 가셔브룸 I 봉을 등정하고 난 뒤 고산 등반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메스너의 권좌를 탈취하려는 계획을 가진 이들에게 남아있는 기회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산을, 메스너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방법’만을 사용한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는 것뿐이었다. 1986년에 K2 아래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있던 많은 등반가들 역시 바로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략)

1986년 여름, K2에 있던 원정대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 팀만이 등로주의나 알파인 스타일과 같은 새로운 등반 방식을 따르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적인 지원을 받아 K2의 한국 초등을 이루어 내기 위해 온 어마어마한 대규모 팀이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K2의 정상까지 어떻게 오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대원들 중 누군가가 정상에 선 뒤 무사히 다시 내려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태도였다. 전통적인 극지법을 따르던 그들은 무려 4500명의 포터를 고용해 작은 산을 이룰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장비와 식량을 베이스까지 옮겨왔고, 베이스캠프가 구축되고 나자 노멀 루트인 아브루찌 능선위로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고정로프와 물자가 가득 든 텐트를 연이어 설치해 가며 정상을 향해 착착 줄지어 나아갔다.

8월 3일 늦은 오후의 완벽한 날씨 속에서 세 명의 한국인들이 산소통을 이용해 K2 정상에 도달했다. 한국 팀 최초의 K2 등정이었다. 하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녹초가 돼 버린 폴란드인 두 명과 체코인 한 명에게 따라잡혔다. 그들은 한국 팀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극지법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무산소로 매직라인 – 카사로토(Renato Casarotto)와 두 명의 미국인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 의 초등을 막 이루어낸 참이었다. 어둠 속을 헤치며 두 팀이 함께 하산을 재촉하고 있던 도중 폴란드ㆍ체코 합동대의 대원 중 한 사람이던, 폴란드의 세계적인 등반가 보즈키에크 브로즈(Wojciech Wróż)가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산소 결핍과 피로로 인해 주의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경솔하게도 고정로프의 끝부분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현수하강을 하고 있던 도중 로프 끝 부분이 그의 하강기에서 빠져 나가버렸고, 그는 그해 여름의 7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바로 다음 날 베이스캠프에서 짐을 나르고 있던 파키스탄인 포터 무함마드 알리(Muhammed Ali)가 낙석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사망자 수는 8명으로 늘어났다.

그해 여름 K2 베이스캠프에 있던 대부분의 유럽 팀들과 미국 팀들은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물량 공세를 비웃고 경멸했었다. 그들은 한국 팀이 아브루찌 능선을 올라가며 사용한 대규모 극지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반 시즌이 점점 막바지에 다다가면서 죽음을 부르는 산 K2는 그들의 어깨를 마구 짓눌러댔다. 그리하여 자신은 등로주의와 알파인 스타일 원칙을 따른다고 거만하게 큰소리치던 등반가들 중 상당수가 은근슬쩍 자신들의 원칙을 버리고, 아브루찌 능선 위에 한국 팀이 설치해 둔 고정 로프나 사다리, 그리고 텐트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원정대가 등정에 실패하고 산에서 물러나고 있을 때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영국인 7명이 다시 한 번 독자적으로 K2를 오르기로 마음먹고서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 각자의 원정대들은 이미 등정에 실패하고 철수를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아브루찌 능선 상에서 서로 느슨한 협력관계를 맺기로 합의했다. 한국 팀이 마지막 캠프에서 최후의 정상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동안, 임시로 결성된 이 특이한 다국적 팀은 K2의 하단 측면까지 올라섰다. 그들은 운행 속도가 제각각 틀렸을 뿐 아니라 일정한 등반선도 없이 아브루찌 능선 상에서 사방에 흩어져서 오르고 있었음에도 7명 모두 800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던 4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때는 한국인들이 정상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7월 3일 (본인 주 – 실제로는 8월인데 저자의 오타로 추정)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날씨 속에서 한국 팀은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폴란드ㆍ오스트리아ㆍ영국 합동대의 7명 대원들은 어쩐 이유에서인지 정상 공격을 다음 날로 미루고 4캠프의 텐트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유는 확실치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다음 날인 7월 4일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이미 날씨는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초고리사 너머 남쪽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구름 기둥들이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좋지 않은 날씨가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어요. 모든 등반가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정상을 향한 발걸음을 계속 재촉하다가는 틀림없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K2의 정상이 바로 목전에 놓여 있다면, 등반가들은 쉽사리 등반을 포기하고 돌아설 수 없을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원정을 위해 들인 돈과 수고는 차치하고서라도 그토록 갈망하던 K2의 정상이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다면, 등반가들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고 도박을 감행하게 될 겁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이 이후로 이 다국적 팀의 1986년 재난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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