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부 감시를 막아야 하고, 프라이버시가 중요한가?

근래 있었던 탈 카카오톡 – 입 텔레그램 경향에서 짚어줄만한 무척 시사적인 글을 소개한다. e-book을 보면서 타이핑하는 것이라 종이책의 페이지 위치는 알 수는 없다.

글렌 그린월드 저/박수민, 박산호 역,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모던타임즈, 2014

스노든이 내부 고발을 한 뒤, 나와 논쟁했던 감시 지지자 중 다수는 뭔가 감출 것이 있는 사람에게나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는 에릭 슈미츠의 시각을 그대로 따라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의 이메일과 계정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고, 집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다이엔 파인스타인 상원 정보위원회 위원장이 NSA의 메타데이터 수집에는 통신 내용이 포함되지 않으므로 감시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을때, 여기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라고 요구했다. 다이앤 의원은 매달 이메일과 전화를 주고받은 사람들의 명단과 함께 전화 대화 시간과 장소를 공개하려고 할까?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메타데이터는 많은 사실을 담고 있고, 사적 영역에 대한 실질적인 침해이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의 가치를 폄하하면서도 막상 자신의 프라이버시는 신줏단지 모시듯하는 사람들의 위선은 인상적이기는 해도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가 부수적이라기보다 필수적이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이해한다. 사적 영역은 우리 자신에 대해 판단하려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며, 말할 뿐만 아니라 쓰고, 실험하며, 되고자 하는 바를 결정하는 곳이다. 프라이버시는 자유인이 되는 핵심적인 조건이다.

(중략)

어떤 기관이든, 기관이 모든 사람을 항시 감시할 수는 없으므로 파놉티콘은 거주자로 하여금 “감시자가 어디에나 있는 듯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감시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항상 감시당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느낀다.” 따라서 이들은 감시 받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늘 감시당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 결과는 순종, 복종, 그리고 감시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벤담은 자신이 만든 구상이 감옥과 정신 병동을 넘어서 모든 사회 기관으로 확대되는 상황을 상상했다. 시민들의 머리에 자신들이 항시 감시당한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인간의 행동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 이해했다.

(중략)

게다가 이런 통제 모델은 자유라는 착각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는 큰 이점이 있다. 복종의 강요는 개인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개인은 감시당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발적으로 순종을 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강압적 행동은 불필요하고, 따라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모든 억압적인 국가는 감시를 가장 중요한 통제의 도구로 본다. NSA가 수년간 자신의 휴대폰을 감청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평상시 말을 삼가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화를 내면서 미국의 감시를 악명 높은 동독의 감시 기관이었던 슈타지에 비유했다. 메르켈 총리가 하려는 말은 분명하다. 위협적인 감시 기구의 핵심은 그것이 NSA든, 아니면 슈타지나 빅브라더 혹은 파놉티콘이든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권위체에 의해 언제든 감시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략)

감시가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식의 감시의 정당화는 국민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구분하는 세계관의 투사에 의존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당국은 감시 능력을 “어떤 나쁜 짓을 저지르는” 나쁜 사람을 상대로 사용하고, 이런 나쁜 사람만이 프라이버시 침해를 두려워할 무언가를 갖고 있다. 이것은 오래된 전술이다. 1969년 미국 정부의 감시 능력을 둘러싼 미국인들의 점증하는 우려에 대한 〈타임〉지 기사에서 닉슨 정부의 존 미첼 법무부 장관은 “불법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 미국 시민은 어쨌든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장담했다.

2005년 부시 대통령의 불법 도청 프로그램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을 때 백악관 대변인의 입에서도 똑같은 주장이 나왔다. “이 프로그램은 청소년의 야구 훈련 일정을 잡거나, 회식 자리에 갖고 갈 음식에 대한통화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나쁜 악당끼리 이루어지는 통화를 감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2013년 8월에 〈투나이트쇼〉에 출연해서 제이레노에게 NSA 폭로에 대해 질문을 받은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정부는 국내 감시 프로그램을 시행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보유한 것은 테러 공격과 관련된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를 추적할 수 있는 몇 가지 체계입니다.”

이런 주장은 효과가 있다. “잘못을 저질러서” 감시를 받아 마땅한 일부 집단에만 감시가 한정된다는 인식은 여러 사람이 권력 남용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부추기게 한다.

이런 시각은 정부의 모든 기관이 추구하는 목표를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정부기관의 눈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불법 행동, 폭력적인 행위, 테러 음모를 훨씬 뛰어넘어서 중요한 이의 제기와 어떤 순수한 문제제기까지 포함한다. 반대 의견을 범죄와 동일시 하거나 적어도 위협으로 보는 태도는 권위체의 본성이다.

의견을 달리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이유로 개인과 단체가 정부의 감시 목표가 되는 역사적 사례는 많다. 마틴 루서 킹, 민권 단체, 반전 운동가, 환경주의자가 여기에 해당된다. 정부와 에드거 후버가 이끈 FBI의 눈에, 이들 모두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지배적인 질서를 위협하는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이다.

(중략)

국가와 개인은 물리적 안전과 같은 다른 목적에 앞서서 프라이버시, 그리고 은연 중에 자유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선택을 끊임없이 한다. 실제로 미국 수정헌법 4조의 목적은 다름 아닌 특정한 치안 활동이 범죄를 줄일 수 있더라도 이를 금지하는 것이다. 경찰이 영장없이 아무 집이나 난입할 수 있다면 살인자, 강간범, 납치범을 좀 더 쉽게 체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가 가정에 모니터를 설치할 수 있다면, 범죄가 눈에 띄게 감소할 수도 있다(가정 절도범의 경우 틀림없이 이런 결과 나온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에 대해 섬뜩해하면서 움츠러들 것이다). FBI가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통신을 포착하는 것을 허락받으면, 각종 범죄가 아무래도 예방되거나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이런 무차별적인 침해를 막기 위해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런 행위에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는 의도적으러 더 큰 범죄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어쨌든 선을 그어서 우리 자신을 더 큰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완벽한 물리적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사회 활동의 최우선 순위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안녕을 넘어, 핵심 가치는 국가가 사적 영역, 즉 수정헌법 제4조에 나와 있듯이 우리의 “신체, 주거, 문서 및 재산”에 간섭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확히 그렇게 한다. 이런 영역은 삶의 질과 대체적으로 관련이 있는 여러가지 속성, 예컨대 창의성과 탐구와 친밀성이 녹아든 도가니다.

절대적인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프라이버시를 포기하는 것은 건강한 정치 문화만큼이나 건강한 정신과 개인의 삶에도 유해하다. 개인 안전을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마비되고 두려운 삶을 의미한다. 자동차나 항공기를 타지 못하고, 위험이 뒤따르는 활동에 절대 관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삶의 질보다는 수명을 중요시하고 위험을 피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른다.

공포를 퍼트리는 것은 권위체가 선호하는 전술이다. 공포는 힘의 확장과 권리의 축소를 아주 설득력있게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된 이래, 미국인들은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핵심적인 정치적 권리를 포기해야한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예컨대, 상원 정보위원장인 팻 로버츠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수정헌법 제1조와 제4조, 그리고 시민적 자유를 신봉한다. 하지만 죽으면 시민적 자유가 없다.” 텍사스 주에서 재선에 나선 공화당 상원의원인 존 코닌도 카우보이 모자를 쓴 터프가이로 등장하는 동영상에서 권리를 포기하는 데 따른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겁한 말을 했다. “죽고 난 뒤에는 시민적 자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략)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서 물리적 안전을 중요시하는 국가와 국민은 얼마만큼 실체가 없는지는 상관없이 총체적인 안보를 약속하는 대가로 궁극적으로 자유를 포기하고 당국이 거머쥔 모든 권력을 허락한다. 하지만 절대적인 안전은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어서 추구하더라도 이를 수는 없다. 그런 목표는 관계된 사람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규정되는 모든 국가를 타락시킨다.

(후략)

이 글에는 정부의 개인 감시와 안보와 관련된 근래의 다양한 이슈를 망라하여 해답을 주고 있다. 가능하면 책 전체의 독서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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