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을 ‘너’라고 부른 정승

정구선 저, “조선 왕들, 금주령을 내리다”, 팬덤북스, 2014

임금을 ‘너’라고 부른 정승

세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정난공신 1등과 좌익공신 2등에 봉해지고,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영의정까지 오른 정인지는 술이 약하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치명적인 실수를 술로 인해 자주 저지르곤 했다. 특히 임금 앞에서 취중 실수를 하여 큰 물의를 일으키고 곤욕을 치른 적이 여러 번이었다. 비록 당시가 술에 관대한 시대였다 하더라도 임금에게 저지른 취중 실수는 바로 불경이요, 무례였다. 어떠한 처벌도 감수해야만 하는 일종의 범죄 행위였다.

첫 번째 실수는 세조 4년(1458)에 있었다. 당시 세조는 불교에 심취하여 《법화경法華經》, 《대장경大藏經》 등을 간행하는 등 불교 진흥을 꾀하고 있었다. 그해 2월 12일 임금이 대신들과 함께 가진 잔치에서 영의정 정인지가 술에 취하여 불경 간행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임금이 노하여 잔치를 끝내고 말았다. 다음 날 임금은 종친, 대신, 승지 들이 참석한 활쏘기 관람 자리에서 정인지에게 따졌다.

“내가 복세암福世庵을 세우고 불경을 베끼는 종이를 만들어도 경은 대신으로서 한마디 말도 없었다. 어제 취중에 나를 욕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취중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제의 말은 경이 취해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은 취하지 않았으니 일일이 내게 고하라. 부처의 도리는 어떠하며, 유학의 도리는 어떠한가?”

정인지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왕이 묻는데 경이 대답하지 못한다. 이것은 불경함이다.”

정인지가 또 어제 너무 취하였다는 핑계를 대며 끝내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런 다음 정인지가 물러 나와서 탄식하였다.

“좌찬성 신숙주는 잘 마시면서도 마시지 않았다. 나는 신숙주의 잘 마시면서도 마시지 않음만 같지 못하였는데도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어 정인지가 돌아갔다. 임금은 정인지에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대하여 물었으나 말귀마다 무례하게 대답하는 등 오만하여 왕을 능멸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인지를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라 명하고, 영의정에서 해임하고 직첩을 거두었다. 하지만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다음 날 승지 등을 불러 논의하고 정인지를 석방토록 명하였다.

(중략)

유사는 임금만의 특권으로 죄인의 죄를 사면하거나 형을 줄여 주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 실수는 이처럼 잘 넘어갔으나, 두 번째 실수는 정인지를 더욱 큰 곤경에 빠뜨렸다. 7개월 뒤인 9월 15일에는 급기야 술자리에서 세조를 ‘너’라고 부르는 크나큰 불경을 저지르고 말았다. 감히 임금에게 ‘너’라고 일컬었다. 왕조 시대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엄청난 망발이었다. 의정부와 육조, 공신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충훈부忠勳府의 대신들과 관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엄히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으로서는 공신인 정인지를 처벌하기가 어려웠다.

“정인지는 실로 죄가 없다.”

여기서 물러설 신하들이 아니었다. 마땅히 정인지를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도 임금은 여전히 그를 감싸고돌았다.

“죄의 정상이 없는데 어찌 죄를 묻겠는가?”

임금이 쉽사리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신하들은 한 발 물러섰다.

“만약 정인지를 공신이라 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벼슬을 파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신들의 기대에 답하십시오.”

“이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나는 모르겠다.”

임금은 마찬가지로 윤허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의정부와 육조, 충훈부의 관원들은 다시 정인지를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전교를 내려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하였다. 임금이 뜻을 굽히지 않자 임금의 아우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가 나섰다.

“정인지가 한 말을 보면 진실로 역신逆臣입니다. 성삼문成三問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죄는 주벌誅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정인지가 성삼문 같은 역적이라며 목을 베어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임금은 일축하고 말았다.

“대신의 죄는 종친이 논할 바가 아니다.”

임금의 거부에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이 임영대군을 거들고 나섰다.

“군신 간에는 남을 업신여기고 혼자 잘난 척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정인지는 성상께 ‘너’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를 베어 죽이십시오.”

임금은 판원사判院事 권남權擥과 의논하여 결정하겠다며 권남의 의견을 물었다.

“정인지의 말은 죽어도 그 죄를 속죄할 수 없습니다.”

권남 역시 그를 죽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도리어 임금은 권남을 나무랐다.

“경의 말이 너무 심하다.”

권남이 한 발 물러서 아뢰었다.

“먼 지방에 안치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대간에서도 대신들의 청을 따르기를 주장하였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태도가 강경해지자 정인지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작위를 사임하겠다는 글을 올려야만 했다.

“얼마 전 성상의 물으심에 답할 적에 한마디 말로 조언을 드린 가운데, 신이 마침 술에 취하여 그 말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여러 신하들이 신의 처벌을 청하는 말과 같은 것은 몽매에도 생각할 수 없는 바이며, 절대로 그와 같은 뜻은 없었습니다. ……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의 노년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의 두려워하는 정상을 살피셔서, 신의 작위를 해임하고 한가한 곳에 처해 있게 하여 타고난 수명을 마치게 하시면, 신은 이 생명을 다하도록 항상 종사의 만년萬年을 축원하겠습니다.”

정인지는 자기가 했다는 말은 술 취해 기억에 없지만, 신하들이 처벌을 원하므로 작위를 해임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정인지가 작위의 해임을 청하는 글을 올리자 의정부, 육조, 충훈부에서는 다시 상소를 올렸다. 임금이 훈구勳舊 대신이라 하여 매번 너그러이 용납해 주었기에 정인지가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를 번번이 나타낸다는 비난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정인지를 두둔하는 전교를 내렸다.

“정인지가 취중에 한 말은 모두 오래된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고 한 말이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더구나 정인지는 나라 일을 맡아 보는 대신도 아니고, 노쇠한 일개 부유腐儒일 뿐이다. 어찌 족히 논하겠느냐?”

부유는 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란 뜻이다. 마침내 정인지의 두 번째 취중 실수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후략)

헐… 서슬퍼런 조선왕조에서 임금보고 ‘너’라고 했다 하니, 너무 웃긴 에피소드라서 한 번 올려봤음. 이 뒤로 정인지의 네 번째 실수까지 나온다. 필름이 잘 끊기는 사람은 이래저래 고생.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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