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법 Method of loci 기억술

수잰 코킨 저/이민아 역,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알마, 2014

p199-203

정교한 암송이 기억을 강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역사 속에는 심상을 만들고 그 심상을 나중에 필요한 시점에 꺼내 쓸 수 있도록 배치하여 정보를 기억하는 복잡한 기법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넘친다.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학자인 마테오 리치는 1596년 중국에서 활동하면서《기억술에 관한 논문Treatise on Mnemonic Arts》이라는 짧은 책을 쓰는데, 리치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지식을 공부해야 하는 중국인들에게 가르쳐준 암기법을 기술한 논문이다. 리치의 기법은 심상에 ‘기억의 궁전’을 구축하는 중세 유럽의 기억술을 토대로 삼았다. 기억의 궁전은 중앙에 피로연장이 있고 그 주위로 많은 방이 둘러싼 구조의 웅장한 건축물인데, 방마다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생생하고 복잡한 이미지를 곳곳에 배치한다. 정서적 내용이 담긴 이미지가 무감정한 이미지보다 기억에 더 깊이 남는 까닭에, 이 방법은 기억해야 할 정보와 방 안에 배치 된 이미지를 강렬하게 혹은 감정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명한 연합이 형성된다. 리치의 기억술을 현대적인 용어로 장소법method of loci이라고 부른다. 친숙한 길을 눈에 그리면서 그 길을 따라 표지물을 배치하고 그 각각의 지점에 기억해야 할 항목들을 갖다 놓는 방법이다.10

기억의 궁전을 세워보자. 우선 친숙한 장소를 하나 고른다. 사무용 건물이나 집 근처의 상점 혹은 자기 집도 좋다. 예를 들어 결혼 피로연 때 신부에게 할 축사를 암기해야 한다고 가정하자. 거기에는 초등학교 시절 축구 시합 이야기, 중학교 때 체육시간, 고등학교 때 프랑스로 수학여행 간 이야기, 대학시절에 개를 키우게 된 일, 그리고 신랑과 만난 사연 등 구체적인 추억담이 들어갈 것이다. 기억의 궁전으로는 동네 슈퍼마켓을 선택해보자. 인사말에 들어갈 일화의 단서를 식품코너에 차례대로 끼워넣는다. 눈에 확 띄는 힌트를 슈퍼마켓 문에 붙인 뒤 과일코너, 채소코너, 정육코너, 냉동식품코너 순으로 힌트를 붙인다. 입구에는 유리문 대신 거대한 축구공이 놓여 있는이미지를 상상한다. 거기에는 일곱 살 시절의 신부와 신부의 소꿉친구가 축구복 차림으로 두 손을 꼭 잡고 축구공 위에 앉아 있다. 과일코너가 나오면 신부가 속한 체조팀이 수박 위에서 물구나무 선 이미지를 떠올리고, 채소코너에서는 아스파라거스 순 끄트머리를 차지한 에펠탑을 떠올린다. 정육코너에서는 진열장 안에 실물 크기의 시베리안허스키가 다섯 근짜리 스테이크용 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이미지를, 냉동식품코너에서는 냉동칸 안에 신랑이 한쪽 무릎을 꿇고서 거대한 냉동 양파튀김 자루를 들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러한 이미지를 구성하여 뇌리에 각인한 다음에는, 심상을 통해 슈퍼마켓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음의 눈으로 기억 이미지들을 훑는다. 이제 축사를 시작하면 이 ‘기억의 슈퍼마켓’에 저장해놓은 추억과 일화를 특정 순서에 따라 인출해 쓰면 된다. 이 기억술은 연령에 상관없이 기억력 강화에 효과적이다.

기억력 대회에 참가하는 많은 사람이 이 장소법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프린스턴대학교는 매년 파이의 날(3월 14일)에 원주율 외우기 대회를 개최한다. 2009년에 여러 대학 연구자들이 모인 연구팀이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어마어마한 자리수까지 암기하는 능력을 지원하는 뇌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서 fMRI 분석 실험을 시도했다. 이 실험 참가자는 MRI 스캐너 안에 누워서 어떤 행동 과제를 수행한다. 특정 뇌 영역이 활성화되면 그 영역의 산소 소비량이 증가한다. 뇌는 이렇게 산소 사용량이 증가한 지점을 포착하면 혈류를 높여 산소를 공급하라는 명령을 보낸다. 혈액에 산소 공급이 증가하면 혈액에 함유된 분자의 자성도 변한다. 따라서 지구 자력의 수천 배에 달하며 가까이 가져갔다가는 신용카드를 망가뜨릴 강력한 자석을 이용하여 자기장에 변화가 일어난 위치를 찾아낼 수 있다. 이 방법으로 특정 기능에 어떤 뇌회로가 이용되는지를 찾아내 뇌 활동 지도를 구성할 수 있다.

이 2009년 연구진은 fMRI로 한 22세의 공학도가 원주율의 첫 540자리를 암기하는 동안 이뤄지는 뇌 활동을 기록했다. 학생은 장소법을 이용하여 원주율을 암기했는데, 암기 과정에서 촬영한 fMRI은 인출처리 기능이 전전두엽피질 내 특정 영역의 활성화를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영역은 작업기억과 집중력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즉 이 학생이 원주율을 능숙하게 암기하여 술술외는 데는 인지제어 체계가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11

어떻게 사람들이 애초에 그렇게 방대한 분량의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그 공학도에게 무작위 나열 숫자 100개를 암기하도록 하고 그 과정을 fMRI로 촬영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그 학생은 장소법을 약간 변용한 자기만의 기억술로 6분 스캔 3회 만에 100개 숫자 전체를 정확한 순서대로 다 외웠다. fMRI 이미지는 부호화 초기에 시각 처리, 감정 관련 학습, 운동계획(motor planning, 뇌가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린 뒤 익숙하지 않은 일련의 행동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능력 – 옮긴이), 업무계획task schedule 그리고 작업기억에 특화된 피질 영역이 원주율 인출 때보다 더 많이 활성화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과제 수행에는 다양한 종류의 정신적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여러 영역이 선택적으로 활성화되었다. 그 학생은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활용해야 했는데, 거기에는 뇌 뒤쪽의 시각 처리 기능과 뇌 앞쪽의 인지제어 기능이 포함된다.

그 학생은 자신의 장소법을 소개했는데, 기억의 궁전을 주로 색깔, 감정, 유머, 속된 표현, 성적 표현으로 구성한다고 했다. “감정적이고 끔찍한 장면일수록 기억하기 쉽더라”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 학생이 시종 고도로 감정적인 이미지를 시용하는 것이 남다른 뇌 구조(변연계의 일부인 대상회)에서 오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 학생은 숫자군 암기에는 탁월했지만, 지능이나 기억력이 비상한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을 통해 매우 효과적인 인지제어 회로가 발달하면서 정보 보유력이 높아진 것이었다. 한 심리학자의 말마따나 “비범한 암기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억력은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계발할 수 있다. 이름, 숫자, 단어, 그림 등을 암기할 때는, 그 항목을 처음 접하는 시점에 뇌의 활동이 최적의 상태일 경우 훨씬 기억하기 쉽다.12

 


10. J. D. Spence,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London ; Quercus, 1978).
11. A. Raz et al., “A Slice of Pi: An Exploratory Neuroimaging Study of Digit Encoding and Retrieval in a Superior Memorist,” Neurocase 15 (2009): 361~72.
12. Raz, “A Slice of Pi”; K. A. Ericsson, “Exceptional Memorizers: Made, Not Born,” Trends in Cognitive Science 7 (2003) :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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