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최초의 심장 이식 수술

대니얼 데이비스 저/양병찬 역, “나만의 유전자“, 생각의힘, 2016

p78-82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은 사망의 기준을 분명히 정하기 위해 특별 위원회를 구성했다.4 위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의장직은 헨리 베처가 맡았는데, 그는 환자의 동의 없이 시행되는 임상시험의 내부 고발자로 명성이 자자했고, 임상시험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플라시보 효과를 고려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 위원회에는 조지프 머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1954년 12월 살아 있는 사람들 간의 신장이식을 최초로 수행했던 인물로,5 신경외과, 법, 정신의학, 신학 등 다방면의 전문가였다. 이 위원회가 구성된 계기는 몇 달 전인 1967년 1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실시된 최초의 심장수술이었다. 이 수술 직후 사망을 정의하는 문제를 놓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기 때문이다. 이 수술의 집도의는 마흔다섯 살의 외과의사 크리스티안 버나드이고, 환자는 쉰다섯 살의 루이스 워시캔스키였다. 환자는 비록 18일 후에 폐렴으로 사망했지만, 심장이식 자체는 성공한 것으로 여겨졌다.

워시캔스키는 심장이식의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다. 식료품상이었던 그는 심장질환뿐만 아니라 당뇨, 간부전, 신부전까지 앓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불확실성이 많은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인데다 이 같은 합병증까지 감안할 때, 생명을 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시캔스키는 영웅적 선택을 했다 ‘이전에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수술을 시도해 보자’는 의료진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는 실낱 같은 삶의 희망을 좇아 새로운 것도 마다하지 않은 대담한 사람이었다. 사실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성공 기능성이 희박한 수술이라도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버나드, 워시캔스키 외에, 이 수술에는 세 번째 영웅이 있었다. 그는 딸의 심장을 실험적 수술에 사용하도록 허락해준 에드워드 다발이었다. 데니스 다발을 실은 엠불런스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워시캔스키는 적합한 기증자를 3주 동안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데니스는 케이크를 사려고 승용차에서 내리다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인, 스물다섯 살의 꽃다운 처녀였다. 어머니 역시 차에 치여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데니스는 다리, 골반, 두개골이 부러지고,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은 채로 병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심장만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였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다발은 버나드가 딸의 심장을 가져가도 되는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그는 딸이 살아생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했었는지를 회상하고, 그녀도 자신의 심장이 다른 사람에게 기증되는 것을 기뻐할 거라고 확신했다.6 그가 결단을 내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4분이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후, 버나드는 젊은 데니스의 심장을 나이든 워시캔스키에게 이식했다. 하지만 수술 직전에 갑자기 불안이 엄습하자, 목욕재계를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오, 주여. 오늘 밤 저의 손올 인도해 주소서.”7 버나드의 마음속에 한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데니스는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심장은 아직 뛰고 있었다. 심장이 아직 뛰고 있을 때 적출해야 심장 손상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고, 워시캔스키에게도 가장 유리했다. 그러나 최선의 의학적 선택을 하는 대신, 버나드는 데니스의 심장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펄떡이는 심장을 다루는 것을 신의 행위로 여겨, 뛰는 심장을 적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67년 12월 3일 오전 6시 13분, 장장 네 시간 반에 걸친 수술이 모두 끝난 후 데니스의 심장은 워시캔스키의 몸 안에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후에 버나드는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푸르스름하던 심장이 붉은 빛을 띠자, 한 남성이 새로 태어났다. 바로 그 순간, 두 개의 생명이 하나로 융합되었다.”8 버나드는 너무나 감개무량했다. 심장은 가장 상징적인 장기이고, 심장이식은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 전에 성공하여 각광을 받은 신장이식은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제 심장이식이 성공한 이상 어느 누구도 신장이식에 감동하지 않았다.

이식 수술이 끝나자마자, 버나드는 일약 월드스타로 떠올랐다. “토요일에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이름 없는 외과의사였는데, 월요일이 되자 갑자기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어요.” 2년 후 그는 조강지처와 이혼했고, 글래머러스한 유명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두 번 더 결혼했다. 60대 중반에 만난 마지막 배우자는 열여덟 살의 모델이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 에서부터 1997년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사망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외과의사들이 심장이식을 먼저 성공시키려고 경쟁했지만, 어느 누구도 버나드가 승자가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버나드가 수술을 감행했던 주에, 브루클린의 한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생후 19일 된 아기에게 심장을 이식하려다 실패했다.9 비슷한 시기에 런던에서는 한 내과의사가 국립심장병원에 ‘심장이식을 시도해 보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복잡한 윤리적ㆍ법적 문제를 내세워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환자가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10 이러한 윤리적ㆍ법적 장벽을 감안할 때, 불필요한 요식행위가 적은 변방국가 – 남아프리카공화국 – 에서 심장이식이 최초로 성공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심장을 이식하려면, 우선 심장이 신선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명백한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뇌사brain death 또는 비가역적 혼수상태irreversible coma의 개념을 확립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후에는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에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있었다.

 


4 Report of the Ad Hoc Committee of the Harvard Medical School to Examine the Definition of Brain Death. JAMA 205, 337~340 (1968)
5 살아 있는 환자들 간의 신장이식 수술이 최초로 성공한 것은 1954년 12월 보스턴 소재 브리검 병원에서였다. 이 수술은 일란성 쌍둥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져, 이식편생존율graft survival에 영향을 미치는 합병증을 회피할 수 있었다. 수술을 집도한 조지프 머리는 그밖에도 몇 가지 공로를 더 인정받아 1990년 도널 토머스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토머스는 항암치료법의 일환으로 골수이식을 개발한 인물이다.
6 Barnard, C. and Pepper, C. B. One Life (1969).
7 앞의 책.
8 앞의 책.
9 Time magazine. Cover story and feature article: Surgery: The Ultimate Operation. 15 December 1967.
10 Stark, T. Knife to the Heart: The Story of Transplant Surgery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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