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솔리니의 업적

로버트 데소비츠 저/정준호 역, “말라리아의 씨앗”, 후마니타스, 2014

p239-240

이제 우리에게 무솔리니는 그라시의 고향인 코모 지역 마을에 초조하게 숨어 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어릿광대쯤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통치하에서 많은 이탈리아인들, 특히 저명한 말라리아 학자들은 그의 정치나 정책들을 너그럽게 보아 넘겨주곤 했다. 무솔리니는 기차가 제시간에 다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 바닷가까지 드리워 있던 말라리아라는 오래된 짐을 덜어 주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폰티나 지방의 이탈리아인들은 무솔리니에게 경애와 존경을 보내고 있다.

캄파냐는 로마 언덕 아래부터 시작해 폰티나 바닷가까지 뻗어 있다. 로마제국의 생명줄이었던 도로, 아피아 가도가 폰티나를 지나 바다로 이어진다. 폰티나는 대체로 습지이나 얼마나 습한가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일단 소택지가 있고, 작은 웅덩이나 연못이 있는 숲이 있고, 작은 호수나 축축한 초원이 있었다. 그리고 얼룩날개모기도 있었다. 폰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말라리아가 심각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매일 같이 양치기들은 양떼를 몰고 언덕에서 내려왔다가 저녁이 되면 안전한 고도로 다시 올라가곤 했다. 물소들도 습지에서 번성했다. 이탈리아 최고의 모차렐라는 폰티나 물소에서 나왔고, 최고의 페코리노 치즈는 폰티나의 양에게서 나왔다. 1920년대, 유칼립투스 나무가 모기에게 해로운 물질을 내뿜는다는 잘못된 믿음이 널리 퍼지면서 폰티나 사람들이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칼립투스 나무가 있건 없건 폰티나는 여전히 극심한 말라리아 유행 지역이었고, 따라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1930년대,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말라리아 학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폰티나를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대담하고 값비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광대한 배수용 운하 시스템이 폰티나를 가로질렀고, 그 중 가장 큰 운하에는 무솔리니 대운하라는 이름이 붙었다. 폰티나는 점차 말라가기 시작했고, 얼룩날개모기들은 살 곳을 잃어 갔다. 말라리아 전파는 사람이 정착할 수 있을 만큼 줄었다. 빨간 지붕의 헛간이 딸린 농장이 건설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병사들에게 주어졌다. 거의 2천여 년 전 로마인들이 버린 폰티나의 도시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사바우디아 같은 부유한 마을은 한때 말라리아가 극심한 습지였다. 로마 캄파냐에는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들이, 피우미치노에는 국제공항이 들어섰다. 폰타나 마을들을 둘러보면 지금도 무솔리니를 찬잉하는 기념비나 명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938년 사바우디아에 세워진 커다란 기념비에는 무솔리니에게 바치는 과장된 충성심이 새겨져 있는데, 어떻게 무솔리니가 폰티나를 ‘천년간의 빈곤과 죽음’에서 구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무솔리니에게 의외의 업적이 있었는 줄 몰랐다. 전문가의 조언을 잘 들어서 성공한 케이스라고 본다.

 


2017.10.17
앤터니 비버 저/김규태, 박리라 역, “제2차 세계대전”, 글항아리, 2017

p810

독일군은 전형적인 군사방어선을 마련하지는 않았지만,그 지역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교묘하게 파괴해두었다. 1930년대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배수시킨 폰티노 습지에 무솔리니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고참병 10만 명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하면서, 이 지역에 들끓던 모기는 사실상 모두 사라졌다. 이탈리아가 항복한 뒤, 힘러 수하의 과학자 두 명이 전 동맹국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두 사람은 펌프를 꺼서 이 지역 전체를 물에 잠기게 한 뒤 갑문을 파괴했다. 그런 다음 소금기 있는 물에서도 살 수 있는 말라리아 모기를 퍼뜨렸다. 독일 군 당국 또한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을 몰수하여 질병을 확산시켰다. 주민들의 땅과 집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 5만5000명 이상이 말라리아에 감염17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생물학전 사례였다.

말라리아의 위협을 의식하지 못한 채, 알렉산더와 클라크는 평화로운 상륙 장소를 방문했다. 수뇌부가 전진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두 사람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보였지만, 전방 대대에서는 불안감과 당혹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한 아일랜드 근위대원은 “우리 모두는 뜻밖의 반전에 불쾌감을 느꼈다. 대담하게 로마를 향해 진군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하나같이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거칠고 지독할지 몰라도 우리는 로마로 가려 했었다. 우리는 기습에 성공했다. 그곳에는 독일군이 없다. 대체 무엇이 사단의 진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가?”18라고 기록했다. 영국군 장병들 사이에 서는 미군이 로마에 먼저 입성하려고 이들을 저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의혹도 나왔다. 그런데 루커스는 북쪽 고지를 점령하거나 7번 도로에 의존하는 제10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러스콧 소장 예하 제3사단을 재촉하여 진군을 밀어붙이려 하지도 않았다.

 


17 Richard Evans, The Third Reich at War, pp. 477~478
18 Kenneally, The Honour and the Shame, p.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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