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1942 대기근 – 삼백만 명이 굶어죽은 허난 대기근을 추적하다

1942 대기근 – 삼백만 명이 굶어죽은 허난 대기근을 추적하다 l 걸작 논픽션 5
멍레이(편자) | 관궈펑(편자) | 궈샤오양(편자) | 고상희(역자) | 글항아리 | 2013-08-19

 


이 책은 글항아리 출판사의 걸작 논픽선 시리즈 중의 하나로, 중일전쟁이 한창인 1942~3년에 허난성에서 발생한 대기근 사건에 대한 기록이 빈약함을 탄식한 기자들이 당대 사람들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하는 이야기다.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일화적 증언의 수집을 나열한 것이므로 안타까운 사연들이긴 하나, 저자들이 역사가가 아니라서 진위 검증을 위한 노력이 전무하고, 저자들 개인적 감정이 드러나는 글이 많으므로, 굳이 사서 볼 정도의 가치가 있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책의 중간에 “‘허난성 사람은 매국노’에 대한 논쟁”이라는 소문단이 있다.(p223) 이런 질문이 나온 배경이 좀 궁금해서 검색을 해 봤는데, 중국내 허난 지역에 대한 차별의식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미디어 더퍼스트의 글[1]에 설명이 잘 돼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앤터니 비버 선생의 책[2;p844]에도 이 허난 대기근에 대한 묘사가 짧게 있으니 한 번 인용해 보자.

대륙타통작전의 주목표는 장제스도 경고했던 바와 같이, 제14육군항공대의 비행장올 없애는 것이었다. 첫 번째 단계인 고호작전은 만주의 관동군을 대거 충원받은 동북쪽 일본 제1군이 시작했다. 일본군은 서쪽의 옌안을 기지로 하며 한동안 적국 협력자들을 살해하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마오쩌둥의 공산당군에는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오로지 국민당군을 물리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4월에 제1군은 황허 강 너머로 남쪽을 공격하여, 우한 방면에서 북쪽으로 진군하던 제11군 일부 병력과 조우했다. 이들은 베이징-우한 철도를 장악하여 회랑 첫 부분을 완성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허난 성의 국민당 군대는 정신없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장교들은 가족을 구하고 도시 및 시골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모두 지키려고 군용 트럭과 수레, 소 등을 강제로 빼앗아 달아났다. 그러자 식량과 얼마 안 되는 소유물올 강탈당해 분노한 농민들이 장교와 일반 사병들의 무기를 빼앗아 수많은 군인을 죽이고 산 채로 묻기까지 했다.

농민들은 지역 당국과 육군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2년에 심각한 가뭄이 들었던 데다, 국민당군이 식량을 세금으로 거두고 인정 없는 지역 관리들과 지주들이 착취를 일삼아 농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면서, 그해 겨을에는 끔찍한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근의 고통은 1943년 봄까지 계속되었고 그 지역 주민 3000만 명 중 300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비버 선생이 언급한 농민이 국민당군을 살해한 사건이 이런 지역차별의 시초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나무위키[3]에는 차별의 이유에 대한 다른 가설들도 소개되어 있다. 허난성 정부는 2001년에 ‘우리는 괴물이 아니다’라는 캠페인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지역차별이 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당시 장제스의 군대가 얼마나 썩어 빠졌는지 짐작할만한 내용이 많다.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가뭄의 여파에 대한 설명도 있지만, 유독 공산당 점령지역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당시 허난성에 공산당이 점령한 지역이 없었는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당대 사진으로 짐작되는 사진이 꽤 많이 첨부되어 있다. 책의 맨 앞 일러두기에 따르면 당시 미국 타임지 기자인 Theodore White와 영국 타임스지 기자인 Harrison Forman이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흑백이긴 하나 해상도가 높아서인지 현장감은 상당하다.

뭐 여하간 굳이 찾아 읽을만한 책은 아닌 듯 하지만, 중일전쟁에 관심이 있거나 중국의 허난 지역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만 할 것 같다.

 


2018.1.4
[2;p941-942]

대륙타통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중국 내 상황은 절박해져서 장제스는 살윈 전선에 있는 Y부대 사단들을 다시 불러들여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 데 힘을 보태고자 했다. 이때가 미얀마 전역에서는 아주 중대한 순간이었던 만큼 루스벨트와 마셜, 스틸웰 세 사람은 격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지에 몰려 절박한 국민당군의 상황에 대해 여전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마셜은 최후통첩과 맞먹을 정도로 아주 강력한 내용의 문서를 작성했다. 장제스에게 스틸웰을 즉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살윈 전선을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문서를 받아 읽은 스틸웰은 아주 기뻐했다. 그는 사실상 루스벨트의 새 특사인 패트릭 헐리 소장과 장제스와의 만남에 끼어들었다.8 스틸웰은 자신의 일기에 당당하게 기록했다 “이 붉은색 꾸러미를 그 시시한 녀석에게 전하자 한숨을 쉬며 자리에 풀썩 앉았다. 작살이 그 작고 성가신 놈의 명치를 치고 곧바로 관통한 것이다.” 반면에 헐리는 스틸웰의 어조와 그로 인해 장제스가 느낄 굴욕감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장제스는 화가 나는 것을 꾹 참고, 그저 “알겠소”라고 말한 뒤 회의를 끝냈다.

장제스는 나중에 헐리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스틸웰 소환을 요구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중국군 사령관으로 스틸웰만 아니라면 미국인 장군을 받아들일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이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는 대로 만주를 침공할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벨트는 더 이상 중국을 대일전 종식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루스벨트는 장제스의 스틸웰 소환 요구에 대한 대처가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입지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만 평가했다. 미국 언론은 이제 국민당 정권을 독재적이고 무능하며 부패한 족벌주의 정권으로 묘사하며 등을 돌렸다. 신문에서는 장제스의 태도가 일본과의 싸움을 거부하는 행태라며 비난했고, 특히 전해 허난 성에서 대기근이 발생 했을 때는 중국 사람들에게 무심했다며 장제스를 비난했다. 『뉴욕타임스』 에서는 중국 국민당에 협력함으로써 미국은 ‘교양 없고 냉정한 독재 정권에 동의하는 꼴’9이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시어도어 화이트와 같이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은 장제스를 비방하고 공산당과 비교하여 부정적으로 평했다 당시와 같은 뉴딜 자유주의 시대에는 많은 국무부 관료가 이 같은 평가에 동의했다.10

 


8 스틸웰과 헐리와 장제스의 만남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Romanus and Sunderland, Stilwells Command Problems, pp. 379~384: Tuchman, Stilwell, pp. 493~194: Spector, Eagle against the Sun, pp. 368~69
9 Barbara W. Tuchman, Stilwell and the American Experience in China, 1911~1945, New York, 1971, p. 646에서 인용
10 van de Ven, War and Nationalism in China, p. 3: White and Jacoby, Thunder out of China, New York, 1946

앤터니 비버 선생은 시어도어 화이트를 부정적으로, 장제스를 긍정적으로 보는 듯.

 


[1] 미디어 더퍼스트 지역감정의 끝판왕, ‘허난성(河南省)’ 잔혹사 9월 2일 18:25 2016
[2] 앤터니 비버 저/ 김규태, 박리라 역, “제2차 세계대전”, 글항아리, 2017
[3] 허난 성 (나무위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