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라 보유숙주의 수수께끼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데이비드 콰먼 (지은이), 강병철 (옮긴이) | 꿈꿀자유 | 2017-10-01

p74-81 이탤릭체는 원문을 따름

어디에 숨었을까? 거의 40년간 에볼라의 보유숙주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감염병 분야에서 가장 어려운 작은 수수께끼였다. 그 수수께끼와 답을 알아내기 위한 노력은 에볼라 출혈열이라는 질병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아프리카에서 두 건의 유행이 서로 독립적으로, 그러나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한 건은 자이르 북부, 한 건은 수단 남서부였으니 공간적 거리는 약 500킬로미터에 이른다. 수단의 유행이 약간 먼저 시작되었지만, 자이르의 유행이 더 유명하다. 어느 정도는 유행 지역 옆을 흐르는 에볼라 강의 이름을 따서 바이러스 이름을 명명한 덕일 것이다.

자이르 유행의 진원지는 붐바(Bumba) 지구라는 지역 내 얌부쿠라는 마을에 위치한 작은 가톨릭 선교병원이었다. 9월 중순 병원에 근무하는 자이르인 의사가 극적인 경과를 보이는 신종 질병 환자 약 20명을 보고했다. 환자들은 흔히 보는 말라리아보다 훨씬 발열이 심한 데다, 피를 토하고 코로도 피를 홀리며, 피섞인 설사를 하는 등 심한 출혈 소견을 나타냈다. 자이르의 수도인 킨샤사 보건당국에 이 소식이 전보로 알려졌을 때는 이미 14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환자들도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10월 초 얌부쿠 선교 병원은 폐쇄되었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직원이 사망했던 것이다. 수주 후 자이르 보건부의 지휘 아래 과학자와 의사들로 구성된 국제질병대응팀이 이 수수께끼의 질병을 집중 연구하고 통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되었다. 이 팀은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라고 붙렸는데 팀원들은 프랑스, 밸기에, 캐나다, 자이르.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등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애틀랜타에 있는 미국 전염병관리본부에서도 9명을 파견했다. 리더는 칼 존슨이었다. 1963년 볼리비아에서 마추포열을 연구하다가 자신도 질병에 걸려 죽을 뻔했던 미국 출신 의사이자 바이러스학자. 바로 그 사람이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13년이 지나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불같고 헌신적인 성격은 여전했다. 이재 그는 미국 전염병관리본부 특수 병원체 부서장이었다.

존슨은 환경적인 차원을 주목함으로써 마추포열 위기를 해결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사람들을 죽이고 있지 않은 동안 바이러스는 어디 있을지 생각했던 것이다. 다행히 보유숙주에 대한 질문은 금방 답이 나왔다. 가정과 곡물 창고에 마추포열 바이러스를 옮기는 주범은 볼리비아 토종 생쥐인 칼로미스 종(Calomys callosus)이었다. 대대적으로 쥐를 잡자 유행은 금방 잠잠해졌다. 절박하고도 당혹스런 1976년 10월과 11월, 자이르 북부에서 존슨은 정체불명의 또 다른 적을 눈앞에 두고 마추포열과 맞섰을 때와 같은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졌다. 사망자 수는 이미 수백 명을 헤아렸다. 도대체 이 끔찍한 녀석은 어디에서 왔을까?

병원체가 바이러스라는 사실은 알았다. 미국 전염병관리본부를 비붓한 해외 연구소에서 황급히 임상적 검체들을 연구한 끝에 모종의 바이러스가 분리되었던 것이다. 자이르로 오기 전에 존슨은 미국 전염병관리본부에서 이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연구를 직접 이끌었다. 또한 이 바이러스가 9년 전에 발견된 또 다른 치명적 병원체인 마르부르크병 바이러스와 비슷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두 가지 바이러스 모두 고통에 몸부림치는 촌충 처럼 복잡하게 꼬인 실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검사 결과 에볼라는 마르부르크병과 다른 새로운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벌레처럼 생긴 두 가지 바이러스, 즉 에볼라와 마르부르크병 바이러스는 필로바이러스 라는 새로운 과로 분류되었다.

존슨의 팀은 새로운 병원체인 에볼라 바이러스가 반드시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의 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동물의 몸속에서 바이러스는 숙주의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계속 존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보유숙주를 밝히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인간 사이의 전염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환자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 유행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연구팀은 나중에 ‘생태학적 조사는 매우 제한적으로 수행되었다’라고 보고했으며 조사 결과는 모두 음성이었다. 인간의 몸 말고는 어디서도 에볼라 바이러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런 결과야말로 더욱 흥미롭다. 초기 연구자들이 무엇을 조사했는지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에볼라가 유행한 마을에서 818마리의 빈대를 잡아 조사했지만 바이러스의 증거는 전혀 없었다. 모기도 조사했다. 역시 허탕이었다. 열 마리의 돼지와 한 마리의 소에서 혈액을 채취했지만 모두 음성이었다. 69마리의 토종 쥐, 30마리의 흑쥐, 8마리의 다람쥐 등 123마리의 설치류를 검사했지만 바이러스 보균 상태인 동물은 없었다. 여섯 마리의 원숭이, 두 마리의 다이커 영양, 그리고 종이 불분명한 일곱 마리의 박쥐를 잡아 내장을 모두 조사하기도 했다. 하나 같이 깨끗했다.

국제위원회 멤버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보고서를 통해 이렇게 경고했다. ‘지난 30년간 세계 어디서도 이렇게 급작스럽고 폭발적인 유행을 일으킨 신종 급성 바이러스 질병은 없었다.’ 보고된 치사율은 88퍼센트로 광견병을 제외하고는 기록된 어떤 질병보다도 높았다(광견병은 가장 치명적인 질병으로 중상이 나타나기 전에 치료받지 않은 환자는 사실상 100퍼센트 사망한다). 위원회는 자이르 정부에 여섯 가지 긴급 권고안을 전달했는데 그중에는 각 지역 및 전국 규모의 감시체계를 통한 보건조치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에볼라의 보유숙주를 파악하는 일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과학적인 문제로 모부투 정권에게 권고할 행동지침으로서는 다소 추상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얌부쿠에서 3년이 지나도록 칼 존슨과 몇몇 멤버들은 여전히 보유숙주 문제를 붙들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대대적인 조사를 하기로 했다. 에볼라의 보유숙주를 찾는다는 목적만으로 원정을 나서기에는 예산이 부족했으므로, 당시 세계보건기구에서 진행 중이던 자이르의 원숭이 두창 연구 프로그램에 편입하는 길을 택했다. 원숭이 두창은 에볼라만큼은 아니지만 심한 질병이고, 에볼라와 마찬가지로(아직 어떤 동물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유숙주를 통해 전파되는 병이었다. 따라서 검체를 한 번만 채취하여 두 가지 검사를 하는 방식의 합동연구가 자연스럽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연구팀은 다시 붐바 지구의 마을들과 인근 숲을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포획하는 한편, 자이르 북부의 다른 지역도 탐색했다. 이번에는 자체적으로 동물을 사로잡거나 사냥하는 외에도 마을 사람들이 산 채로 동물을 잡아오면 보상금을 주는 방법으로 117종에 걸쳐 1,500마리가 넘는 동물을 검사했다. 원숭이, 쥐, 생쥐, 박쥐, 몽구스, 다람쥐, 천산갑, 뾰족뒤쥐, 호저, 다이커 영양, 다양한 조류, 거북, 온갖 뱀들이 검사 대상이 되었다. 한 마리도 빠짐없이 혈액을 채취하고, 간과 콩팥과 비장을 떼어 냈다. 모든 검체를 따로 따로 바이알에 담아 급속냉동시킨 후 미국 전염병관리본부로 보내 분석했다. 채취한 조직에서 살아 있는 바이러스가 배양될까? 혈청에서 에볼라 항체가 검출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슨과 공동저자들은 〈감염병 저널Jaurnal of infectious Diseases〉에 실린 논문에서 솔직하게 허탕이라고 보고했다.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의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제기랄. 또 빈손이라니! 탄식과 절망이 이어졌다.

에볼라 보유숙주를 찾는 일이 그토록 어렵고 종잡을 수 없는 이유는 이 질병이 인간 집단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에볼라는 유행이 지나가면 몇 년 동안 환자가 한 명도 없다. 보건당국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지만 과학적 연구에는 걸림돌이다. 물론 바이러스 생태학자들은 아프리카 어느 숲에든 들어가 어떤 동물이든 잡아서 에볼라 검사를 할 수 있지만, 이런 방법은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는 격이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에볼라 출혈열로 사람이 죽어갈 때 그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에볼라로 사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보건당국의 주의를 끌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1976년 얌부쿠 유행에 이어 1977년에서 1979년 사이 자이르와 수단에서 몇 건의 소규모 유행이 있었지만 그 뒤로 15년간 에볼라 바이러스는 아프리카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80년대 초 산발적으로 환자들이 발생했지만 모두 시간이 지나서야 밝혀진 것이었으며 긴급 대응이 필요할 정도로 두드러진 유행은 없었다. 질병은 환자들의 몸속에서 스스로 소진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세계보건기구, 미국 전염병관리본부, 기타 전문적인 기관에서 특공대를 소집하기도 전에 저절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소진이란 이렇게 치사율이 높고 중간 정도의 전염력을 지닌 감염병에서 특별히 중요한 개념 이다. 처음 몇 명이 사망하고 다시 몇 명이 감염되었을 때, 일부는 사망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회복된다면 병원체가 계속 퍼져나가지 못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소진이라고 한다. 하지만 15년이 지나자 에볼라는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메이바우트 2(Mayibout 2)와 가봉의 다른 지역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 키크위트라는 지역에 이르러 한층 맹위를 떨쳤다.

키크위트는 자이르의 수도인 킨샤사에서 동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다. 이곳은 얌부쿠나 메이바우트 2, 또는 보우에 외곽의 벌목 캠프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곳은 20만명이 몰려사는 도시였다. 병원도 몇 군데 있었다. 이전 유행 지역들과 달리 넓은 바깥 세상과 연결된 곳이었다. 하지만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비슷했다.

키크위트에서 첫 번째 희생자는 숲 속이나 그 주변에서 일하는 42세 남성으로 숲의 생태계를 다소나마 교란시킨 것이 확실했다. 그는 몇 군데의 개간지에서 옥수수와 카사바를 재배하고, 나무를 잘라 숯을 굽기도 했는데 그 장소는 도시에서 남동쪽으론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어디서 나무를 얻었으며 어떻게 자신의 밭에 햇빛이 들도록 했을까? 당연히 나무를 잘랐을 것이다. 그는 1995년 1월 6일 발병하여 1주일 후 출혈열로 사망했다.

그가 세 명 이상의 가족을 직접 감염시키고(모두 사망했다), 사회적으로 접촉한 많은 사람들에게도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면서 이후 몇 주간 열 명이 더 사망했다. 사망자 중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키크위트 종합병원과 주로 산모들이 입원하는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곳 검사실 직원 한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 직원은 키크위트 종합병원에 입원했는데 장티푸스에 의한 장파열을 의심하여 그를 수술했던 의사와 간호사 몇 명, 병실에서 그를 돌보았던 이탈리아인 수녀 두 명이 다시 바이러스에 감염 되었다. 검사실 기사와 수녀들이 사망하자, 지역 보건당국에서는 이 병을 전염성 이질(‘혈성 설사’)로 생각했다. 오진을 한 탓에 결국 바이러스는 키크위트 지역의 다른 병원을 통해 환자와 의료진들에게 훨씬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모든 사람이 이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보건성 소속 의사 한 명은 이질이 아니라 바이러스 출혈열처럼 보인다고 했으며, 그 추측은 5월 9일 미국 전염병관리본부에 접수된 혈액 검체를 통해 이내 확인되었다. 틀림없는 출혈열이었다. 원인은 다름 아닌 에볼라였다. 7월에 이르러 유행이 가라앉을 즈음 사망자는 200명이 넘었으며, 그중 60명이 의료인이었다. 다른 병으로 생각하고(궤양으로 인한 위장관 출혈 등) 환자를 수술한 경우가 특히 위험했다.

그 사이에 보유숙주를 찾기 위한 또 다른 국제협력팀이 결성되어 6월 초에 키크위트로 들어갔다. 이 팀은 미국 전염병관리본부 직원들, 자이르대학 연구진, 메릴랜드 주의 미육군 감염병 연구소(United States Amy Medical Research Institute for Infectious Diseases, 원래 생물학적 무기 연구소였지만 당시에는 질병 연구 및 생물학적 공격에 대한 방어 업무를 담당했다)직원들, 그리고 덴마크 유해동물연구소에서 파견된 설치류 전문가 한 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종간전파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장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바로 첫 번째 희생자인 42세의 불운한 남성이 살았던 숯가마와 밭이었다. 이곳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3개월간 수천 마리의 동물들을 덫이나 그물로 포획했다. 대부분 작은 포유동물과 조류였지만 파충류나 양서류도 있었다. 모든 덫은 도시 경계 바깥의 숲과 사바나에 설치했다. 키크위트 시내에서는 가톨릭 선교회에 그물을 설치하여 박쥐를 잡았다. 포획된 동물은 안락사시킨 후 혈액을 채취하고 비장(때에 따라 간이나 콩팥 둥 다른 장기도)을 적출하여 냉동보관 했다. 그 밖에 개나 소, 애완용 원숭이들도 혈액을 채취했다. 모두 3,066개의 혈액 검체와 2,730개의 비장이 채취되어 미국 전염병관리본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는 혈액 검체에 방사선을 쬐어 모든 바이러스를 죽인 후 당시 가장 민감한 분자생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에볼라 항체를 검사했다. 비장 검체들은 BSL-4등급 연구시설로 보냈다. 이 시설은 칼 존슨의 초기 작업 이후 새로 고안된 것으로(그는 이런 시설을 설계한 선구자 중 한 명이다), 몇 겹의 밀폐장치와 음압발생기, 정교한 필터를 갖추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 또한 우주복을 입었다. 이론적으로는 에볼라 바이러스 누출 위험이 없는 봉쇄지역인 셈이다. 자이르에서 채취해온 비장들 중에 바이러스가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모든 검체는 감염된 것으로 가정하고 취급했다. 비장 검체들은 일부를 떼어 곱게 간 후 세포 배양물에 가해 바이러스가 자라는 지도 확인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세포 배양물은 전혀 바이러스의 흔적 없이 건강 하게 자라났다. 항체 검사에서도 양성 결과가 한 건도 나오지 않았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다시 한 번 종간장벽을 뛰어넘어 엄청난 피해콜 입힌 후, 병들고 죽은 희생자들만 남긴 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신출귀몰하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이 팀을 이루어 3개월간 노력한 결과를 완전한 실패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잘 계획된 연구는 음성 결과가 나오더라도 가능성을 보다 좁혀주는 효과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회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절망감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늦게 키크위트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어쨌든 숯 굽는 사람이 쓰러진 지 6개월이나 지났으니 말이다. 우기가 건기로 넘어가는 시기라 보유숙주가 이동하거나, 숨거나, 숫자가 줄어든 건 아닐까? 유행하지 않을 때는 바이러스 숫자가 크게 감소하여, 심지어 보유숙주의 몸속에서도 거의 검출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수만 남는 것은 아닐까? 연구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최종 보고서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은 기나긴 동물종의 목록 외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앞으로 연구 방향을 제시하는 세 가지 중요한 가정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첫째, 그들은 초기 연구를 근거로 보유숙주가 포유동물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아프리카에서 에볼라 유행은 항상 울창한 숲과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키크위트처럼 도시 지역의 유행도 숲 속에서 살았던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보유숙주는 숲 속에 사는 동물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셋째, 에볼라 유행은 시간적으로 분산되어 나타났다. 한 번 유행하면 몇 년씩 잠잠하기도 했다. 이런 시간적 패턴은 보유숙주로부터 인간이 감염되는 일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의미다. 이렇게 종간전파가 드물다는 사실로부터 다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보유숙주 자체가 드문 동물종이거나, 사람과의 접촉이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키크위트 팀이 아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권위있게 서술한 그들의 논문은 1999년 〈감염병 저널〉 특집 증보판에 여러 편의 에볼라 관련 논문들과 함께 발표되었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보유숙주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초 신박하네. ㅎㅎㅎ 에볼라 숙주와 관련된 글이 bric[1]에도 있다. 중간에 언급된 두 편의 논문[2,3]은 책 뒤쪽의 참고문헌 목록에 나와 있다.

.


[1] [바이오토픽] 에볼라의 수수께끼 (ibric.org)
[2] Heymann, D. L., J. S. Weisfeld, P. A. Webb, K. M. Johnson, T. Cairns, and H. Berquist. 1980. “Ebola Hemorrhagic Fever: Tandala, Zaire, 1977–1978.” The Journal of Infectious Diseases, 142 (3).
[3] Bwaka, M. A., M. J. Bonnet, P. Calain, R. Colebunders, A. De Roo, Y.Guimard, K. R. Katwiki, et al. 1999. “Ebola Hemorrhagic Fever in Kikwit,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Clinical Observations in 103 Patients.” In Ebola: The Virus and the Disease, ed. C. J. Peters and J. W. LeDuc. Special issue of The Journal of Infectious Diseases, 179 (S1).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