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in In Our Hearts’ 서문 중에서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은이), 이순호 (옮긴이) | 갈라파고스 | 2017-12-22 | 원제 Spain In Our Hearts (2016년)

p11-19

(전략)

머나먼 타국의 강변에서 네 명의 미국인이 조우한 전쟁은 스페인의 역사를 바꿔놓은 주요 사건이었다. 급부상하는 파시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유럽에서는 이 전쟁이 도덕과 정치의 시금석, 다가올 세계대전의 서막으로도 인식되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미국인도 대략 2,800명이었으며, 이 중 750여 명이 전사했다.5 20세기에 미군이 참전한 그 어느 전쟁들 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스페인 내전은 다수의 퇴역병과 일부 미국 특파원들에게도 그들 삶을 결정지은 주요한 경험이었다. 매슈스가 “이 세상 어디든, 남자든 여자든, 나는 스페인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만난다. 동종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6라고 쓴 대로였다. 내전을 취재한 기자들은 미국 저널리즘의 관례마저 무너뜨리며, 참전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동지애를 느꼈다. 스페인 내전 앞에서는 일체의 허식을 떨쳐버린 것이다. 1938년 봄 공화파군이 프랑코군의 맹공을 피해 도망칠 때 《뉴욕 타임스》 특파원 매슈스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특파원이, 기자이면서도 개인 자격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화국에 무기를 지원해 주도록 간청하는 전문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7

스페인 내전은 그 뒤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에 묻혀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서는 대체로 사라졌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미국인 수천만 명이 그 소식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뉴욕타임스》만 해도 1936년 중엽부터 1939년 초까지 계속된 내전 기간 동안 그와 관련된 기사를 1,000번 이상이나 1면 헤드라인으로 실었다.8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 나치 독일의 부상, 대공황으로 초래된 재앙을 포함해 다른 모든 기사들을 실은 횟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 미국 정부와 달리, 일반 미국인들은 공화파와 국가주의자 양쪽 모두에 깊숙이 관여했다. 미국 의용병들에게 폭격을 가하고 기총소사를 퍼부은 나치 전투기와 폭격기에 연료를 대준 사람도 다름 아닌, 우익 독재자들을 좋아하고 허세가 심했던 텍사스의 오일맨이었다.

내가 스페인 내전을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중엽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신문사의 선배 기자 두 명이 미국 지원병들을 비공식적으로 부르는 호칭이던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의 퇴역병이었던 것이 내가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지금 기억하기로, 그때 나는 내전 때 구급차를 운전한 선배 기자에게 스페인 내전을 어떻게 회상하느냐고 물었다.9 그러자 수동 타자기와 전신기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 식자공에게 기사를 보낼 때 기송관에서 나는 휙 소리 너머로 그가 뉴스룸에서 흔히 오가는 농담과는 확연히 다른 진지한 어조로 “이겼으면 좋았겠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바람과 달리 공화국은 패했고, 그 후에도 내전에는 얼마 간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전이 프랑코 반군의 승리로 끝난 이듬해에 발간되어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소설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만 해도,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내전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분위기로 충만하다. 스페인 내전은 당대에 일어난 그 어느 사건보다 “만일의 문제”를 많이 야기시키기도 했다. 만일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구매를 원했던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다면? 그랬다면 그 무기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보내준 비행기, 잠수함, 군대를 쳐부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끝내는 다른 십 수 개 나라들도 침략했을까? 만일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다면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한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다른 방식의 전쟁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을까? 이런 문제들 말이다.

미국 의용병들도 대부분 자신들이 세계대전의 전초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4년 전에 그들은 이미 스페인에서 나치 전투기의 폭격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스페인 내전을 그 시대의 시험대로 생각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도 많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도 이런 글을 썼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가슴 속에 모두 스페인을 간직하고 있다. … 옳은데도 패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이길 수 있으며, 용기가 보상받지 못한 시대가 있다는 것을 체득한 곳이 바로 스페인이었다.”10

스페인의 위기에 대해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선명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파시즘이 급속히 확산되자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여기서 저항하지 않으면 어디서 저항하겠느냐는 것과도 같았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내전에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 뒤 인권운동 시위, 1960년대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 1980년대의 중앙아메리카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 퇴역병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내가 보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전에 참가한 의용병들도 여럿 만나고, 그중 두 사람과는 몇 년 간 친구로도 지냈다(그러고 보니 책에는 짧게 언급되었지만, 어릴 때 내가 사고를 당했을 때 상처를 꿰매준 외과의사 자크 그룬블랏 박사도 스페인 내전의 퇴역병이었다). 어느 날에는 이 책의 1장에 등장하는 부부의 남편이 버클리대학교의 대학원생이던 1930년대에 내가 지금 사는 곳에서 고작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백번도 더 지나쳤을 건물에 그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한층 용이해지는 느낌이었다. 사회적 정의에 관심을 가진 우리 모두는 정치적 조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남녀들-여자 의용병들은 대개 간호사로 지원했는데 대략 75명 정도였다-이야말로 정치적 조상이 아니겠는가.

나는 1960년대 세대의 사람들 못지않게 그것을 강하게 느꼈다. 시공간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 시대에 살았다면 스페인으로 갔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물론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알려진 것보다 어둡고 그리 낭만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계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소련만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으나, 나중에 스페인이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만 해도 그렇다. 실제로나 상상으로나 일부 스페인 사람들은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특징이던, 적에 대한 잔혹함의 희생양이 되었다.

(중략 : 소련에서 희생된 스페인인들의 이야기)

스페인 내전의 이 두 얼굴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군사반란에 저항한 스페인인들의 행위는 물론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코 정부만큼이나 잔혹했던 소련과의 얽히고설킨 관계만으로 공화파가 패한 것이었을까? 공화국 수호자들은 가장 비열한 동맹국의 하나를 위해서도 싸웠지만 가장 훌륭한 대의 가운데 하나를 위해서도 싸웠기에 묻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점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기는 했을까? 아니 생존을 위한 절박한 전쟁이었던 만큼 피아를 구분할 여유조차 없지 않았을까? 이런 문제들도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 대다수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공산주의가 왜 그처럼 강한 호소력을 가졌고, 소련이 왜 다수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비쳐졌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인터내서널가〉를 처음 들은 것은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의 의용병 가운데 한 명의 장례식 때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가 스페인을 떠난 지 65년이 지나고 미국 공산당과 결별한 지는 45년이 지난 뒤에 치러진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찬가였던 〈인터내셔널가〉가 그 무렵에는 젊은 시절의 꿈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몇몇 노인들에 의해서만 불리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무정부주의도 대개는 기반을 상실하고, 그 이념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옛 논거들도 중세의 종교 분쟁만큼이나 아득하고 멀게 느껴진다.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에 봉착해 더는 지속될 수 없다는 신념과 누구의 청사진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은 있을지언정, 미래의 청사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광범위한 신념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비록 그 신념은 낯설게 느껴질지라도, 1930년대의 스페인에 만연한 다른 양상들은 현재의 많은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주의적 독재정권과 토지, 교육,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오랫동안 공정한 분배를 거부당한 수백만 명의 힘없는 사람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그렇다. 1930년대의 스페인이 그 시대의 주요 전역이 되고, 우리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전역이 된 것도 그래서였다.

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밖에도 또 있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전쟁, 특히 베트남,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이라크 혹은 여타 나라들에서 일어난 내전이나, 혹은 다른 나라 내정에 미국 정부가 간섭하는 것에 50년 가까이 맹렬하게 저항해왔다. 그런데 유독 스페인 내전에는 그때 미국이 관여했더라면 세계가 한층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전 세대 미국인들도 영웅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다 보니 먼 타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때는 따로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은 다수의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의 내전에 참여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그것도 미국 정부의 끈질긴 방해를 물리치고 행한 일이었다. 참여자들의 출신 성분도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온 빈자와 부자, 아이비리그 졸업생, 화물열차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다닌 사람들 등 다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그곳에 감으로써 자신들, 전쟁, 자신들이 지켜주려고 한 나라, 자신들이 떠나온 나라에 대해 무엇을 배웠을까? 혹시 나중에 그 일을 후회한 사람은 있었을까?

이 시기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일부 미국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가 행하는 전투에 이끌려 스페인에 간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전선 뒤에서 벌어진 사회혁명에 이끌려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용병들이 스페인에 오기 몇 달 전에 이미 신혼여행차 스페인 땅을 밟은 정열적인 켄터키 여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무리의 사람들도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나 자신이 해외에서 자주 취재를 하고 때로는 분쟁 지역에서 취재 활동을 해온 저널리스트이다 보니, 이제는 다분히 신화적 존재가 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미국 기자들의 면면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이다. 매슈스, 헤밍웨이, 그들의 동료 기자들은 기사를 정직하게 썼을까? 열정-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장에서 취재하는 특파원이 백악관에 전문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에 하는 말이다-이 지나쳐 기사를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의 삶을 조사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범위를 조금 넓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영국인 세 명-미국인들 편에서 싸운 사람, 미국인들에 맞서 싸운 사람, 모든 미국 독자들이 알만한 사람-도 조사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도 스페인 내전의 역사만은 아니며,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만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격동의 시대에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너 삶의 진로를 택한 일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물론 역사는 말끔하게 포장된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당시 스페인에 간 남녀들 중에는 아무리 용기 있게 행동했다 해도 지금 시각으로는 환상과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이상주의와 용기가 지혜와 언제나 같을 수는 없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알아가고, 그들이 속한 시기와 장소에서 나라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내가 그들의 삶을 알기 위해 그들의 후손을 만나고,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를 찾아다니며, 벽장이나 서랍속에 오랫동안 쑤셔 박혀있던 문서들을 끄집어내고, 마지막에는 에브로 강가를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5. 이 수치에는 의료 지원병들도 포함돼 있다. 크리스토퍼 브룩스가 관리하는 ALBA 데이터베이스에는 미국인 의용병이 2,644명, 사망자가 734명으로 데이터가 정리돼 있다. 그러나 브룩스도 그렇고, 링컨 대대를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은 실제로는 의용병과 사망자 수가 그보다 많았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책의 본문 175쪽에도 언급되었듯, 링컨 대대와 관련된 일부 초기 기록물들이 트럭 두 대와 함께 사라진 것이 숫자의 정확성을 기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1938년 3월과 4월의 혼란스러웠던 퇴각 때처럼, 다른 때에는 그보다 더 많은 기록물이 분실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6. Matthews, Herbert L. The Education of a Correspondent. New York: Harcourt Brace, 1946, p. 67.

7.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빈센트 쉬안 기자가 전문을 보낸 부분은 Voros, Sandor American Commissar. Philadelphia: Chilton, 1961, pp. 430-431을 참조할 것. 매슈스는 “전투기 200대를 즉시 보내지 않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고 말하는 전문을 여러 매개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James Roosevelt papers, Franklin D. Roosevelt Presidential Library, Hyde Park, NY. Box 62에 나타난 것처럼 《시카고 트리뷴》의 제이 앨런 기자도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남 제임스 루스벨트에게 전문을 보냈다.

8. Chapman, Michael E. Arguing Americanism: Franco Lobbyists, Roosevelt’s Foreign Policy and the Spanish civil War, Kent, OH: Kent State University Press, 2011, pp. 226-227.

9. 교육부 기자 제임스 베넷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일한 또 다른 링컨 대대의 퇴역병이었다.

10. L’Espagne libre(Paris: Calmann-Lévy, 1946),p.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