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그린스펀의 연방준비은행 반대론

앨런 그린스펀의 삶과 시대
세바스찬 말라비 (지은이), 박홍경 (옮긴이) | 다산출판사 | 2018-10-30 | 원제 The Man Who Knew (2016년)

p84-86

그린스펀은 서두에서 “자유방임주의가 경제 체제에서 유일하게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라면서 강연 취지를 밝혔다. 시장가격의 공정성을 공격하는 태도는 곧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가격을 형성하는 개인을 비난하는 도덕적 판단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업가, 또는 그린스펀의 표현대로 기업가(enterpriser)’는 영웅이다. 기업가는 사회의 생산적 에너지를 평범한 시민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핵심적인 인물이며 이러한 작업을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해낸다. 미국은 자유방임주의를 채택한 덕분에 경쟁자들을 제쳤다. 하지만 미국의 실용적이고 기업가적인 사고는 ‘물질 추구가 악하고 비도덕적이라는 윤리적, 종교적인 견해’와 충돌했다고 그린스펀은 탄식했다. 그린스펀은 청중들에게 “『아틀라스』가 미국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온전히 평가하려면 미국사에 나타난 이런 모순의 해악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객관주의자 신념의 인내심을 발휘해 그는 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개인이 분업을 하는 이유, 상업적 교환에 참여하는 이유, 비교우위와 절대우위의 차이 등을 다뤘다, 또한 통화의 목적과 기원에 대해 심도 깊게 고찰하였으며 특히 금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1913년 연방준비법이 통과되기 이전의 ‘자유은행’ 시대를 찬양했다. 당시 은행은 금 보유고를 근거로 민간통화(private money)를 발행했고 정치적인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 근거에서 민간통화가 정부가 발행하는 통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민간은행의 지폐의 경우 은행가의 말이 금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반면 정부가 발행하는 지폐가 가치를 지니는 근거는 명예가 아니라 강제적 명령에 있다, 법이 강제하기 때문에 지폐가 통용되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화폐에 대한 『아틀라스』의 유명한 구절을 읊으면서 불태환화폐(fiat currency)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성을 강조했다, “지폐의 궁극적인 보증은 민간인의 신성한 말이 아니라 정부 관료가 겨누는 총구다.”

그린스펀은 민간 발행 화폐를 선호하는 이유를 도덕적 근거뿐만 아니라 실용적/실제적/현실적 차원에서도 드러냈다. 그는 민간화폐는 수량이 한정되어 있는 이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처럼 화폐의 사용을 강제할 힘이 없었던 19세기 ‘자유’ 은행은 오로지 은행의 금 보유고로 확실히 보증할 수 있는 가주권(scrip)만을 발행했다. 따라서 화폐를 무한정 찍어낼 수 없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기도 했다. 중앙은행의 안전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민간은행이 가주권을 금으로 교환해 주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금을 보유하고 있는지 항상 의심을 샀던 것이다. 그러한 의혹이 짙어지면 은행은 경영이 악화되어 대출을 전면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경제는 둔화되었다. 연방준비법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의 지도자들이 ‘탄력적 통화(elastic currency)를 공급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설립하도록 이끈 원인이 바로 ‘머니 패닉’ 이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이러한 논리를 멸시했으니 경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린스펀이 보기에 19세기의 머니 패닉은 유익한 면이 있었다.20 분명 단기적으로는 경제활동을 위축시켰지만 자산 버블의 팽창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은행은 머니 패닉 덕분에 금 보유고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신용이 창출되지 않았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했다. 다시 말해 버블이 위험한 수준으로 커지도록 돈을 찍어내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역사에서 완전히 잘못된 교훈을 얻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머니 패닉이 은행의 금 보유고 부족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한 정치인들은 “머니 패닉의 치료책이란 은행시스템에서 보유고의 부족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이는 무척 간단하다.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란 얼음 사이에 온도계를 꽂아 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미국 역사상 재앙에 버금가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연방준비제도의 설립이었다.”

이 ‘역사적 재앙’, 즉 훗날 그린스펀이 이끄는 중앙은행의 설립은 은행시스템이 정치적으로 무한한 지급준비금을 갖추는 멋진 신세계를 열었다.21 은행은 보유하던 금을 연준에 넘겼고, 그 대가로 연준 예치금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예치금은 은행시스템의 새로운 지급준비금이 되었다. 금과 달리 새로운 지급준비금은 중앙은행의 명령에 따라 탄력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연준은 은행이 보유한 국고채를 매입하면서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늘리는 방식으로 정산하는데 이는 신용을 창출한다. 혹은 은행의 기업채권을 받아들이면서 준비금 계좌를 더 차감하여 은행이 보유한 기타 자산을 ‘할인’ 할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마법이 가능해지자 은행은 더 이상 자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경제는 머니 패닉을 방지하는 예방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솜씨 좋은 새 시스템이 썩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준비금의 부족을 방지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영원한 번영을 가져오는 대신 세계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경제적 재앙을 초래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강의가 종반부로 가면서 그린스펀은 뉴프런티어 경제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연준은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의 보좌진들이 약속한 완전 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은행준비금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려 경제를 부양하고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관료의 실수가 아니었다. 인간 진보의 진실한 동력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뉴프런티어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경제를 하나의 기계로 이해하고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듯 미세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경제 발전은 사회 경제, 시스템 등의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기능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정도까지 우리 사회는 인간 의 성취가 일궈낸 잔광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 부를 창출하던 위대한 인물들은 복지국가가 부상하면서 역사 속에서 오명을 얻었다.”라고 한탄하면서 어릴 때 흠모했던 영웅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제임스 힐J. P. 모건은 평범함을 숭배하는 사회에 대한 모욕이다.”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평범함이 서서히 국가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말 것이다. 그는 아인 랜드의 레퍼토리에서도 한 구절 빌려 왔다. 미국이 스스로 “원초적인 이타주의적 도덕성에 순응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노예, 폭력, 발전 없는 오류, 제물로 바쳐진 용광로”라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처럼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는 엘리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답하면서 일종의 자유의지론 레닌주의(libertarian Leninism)를 설파했다, 19세기의 자유국가를 회복하기 위해 대중을 전부 객관주의자로 개종시킬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대신 “수백, 많아야 수천 명 정도인 지식인 지도자들이 트랜드를 설정하는데 이 지도자들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대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공산주의는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면서 루스벨트 호텔에 모인 열정적인 형제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객관주의는 공산주의와 과거의 철학적 운동과 비교해 대단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객관주의는 올바를 뿐만 아니라 현실에 부합하고, 이 땅에서의 삶과 일치한다.”

 


20. 그린스펀의 설명과는 극명하게 엇갈리게도 19세기 말의 일부 금융공황은 일시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불황을 야기했다. 가령 1873년의 패닉은 당시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불렸던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그린스펀은 강의에서 남북전쟁 중 금본위제가 정지된 결과로 이런 불황이 일어났다고 제시했다. 전쟁중 정부가 소위 그린백(greenback)을 발행한 것이다. 그린스펀의 설명에 따르면 1970년대의 불황은 투자자들이 1879년(금태환의 재개로) 그린백이 금에 자리를 내줄 것을 예상함에 따라 신용이 수축되어 디플레이션이 찾아온 결과였다.
21. 금본위제는 1914년 연준이 설립된 이후 1971년 닉슨이 달러와 금의 연계성을 폐기하기까지 단계적으로 해체됐다. 그렇더라도 1914년 이후 정부가 임의로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만들어 낼 능력을 얻었다는 지적은 옳다. 곤란할 때마다 남은 제약 사항의 완화를 명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연방은행장으로 명성을 얻은 그린스펀으로서, 젊었을 때 연방은행과 Fiat money에 반대하고 금본위제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인식조차 배리 아이켄그린 선생의 주장[1]과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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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서평] 황금 족쇄 –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2019년 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