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의 적은 그린스펀

앨런 그린스펀의 삶과 시대
세바스찬 말라비 (지은이),박홍경 (옮긴이) 다산출판사 2018-10-30 원제 : The Man Who Knew (2016년)

p183~188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 당시를 돌아보면 그린스펀의 입장은 인상적이기도 하고 모순적이기도 하다. 그린스펀의 비판자들은 그가 연준 의장에 있던 시절에 부의 효과와 버블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훨씬 전부터 이러한 문제를 시대를 앞질러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부분에서도 시대를 앞서 있었다. 1970년대와 그 이후의 대다수 예측 모델은 기본적으로 금융을 배제했다. 자본을 예금자에서 투자자로 이동시키는 일은 유틸리티와 같은 기능일 뿐 성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가정했다. 주택 지분가치 추출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금융 분야의 변화가 경제의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8 이처럼 경제 전문가들이 금융을 과소평가하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옳지 않다는 점은 2008년 금융위기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그린스펀은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1950년대에 존 걸리와 에드워드 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이래 금융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강조했다. 1970년대에는 경제 예측에 금융을 고려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욱 굳건해졌다. 이 당시 논문에서 그는 “오늘날의 금융기관은 수십 년 전보다 더 유연하고 복잡하다. 금융시스템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도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요소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낙관적으로 위험을 감수(risk taking)하는 태도에서 비관적으로 안전 자산을 추구하는 태도로 변화하는 것은 곧 두드러지는 요소에서 눈에 띄지 않는 요소의 변화이며 지출과 생산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 타운센드-그린스펀에서 그린스펀은 채권 발행과 MMF, 일반 은행 업무를 추적했고 관찰한 내용을 예측 모델로 바꾸는 작업에 매달렸다. 이러한 접근은 그린스펀의 멘토이자 파트너였던 빌 타운센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존 테일러가 2011년에 회고했듯 “시대를 앞서가는 접근”이기도 했다.

(중략)

그린스펀은 세금 관련 증언을 한 3개월 후인 1978년 10월에 주택금융에 관련된 주장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주장을 내놓은 곳은 다소 의외의 장소인 유타주립대학교였다.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13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산지 속 소도시에서 연설을 해 달라고 초대받았다. 연설에서 그는 주택 지분가치 추출에 대한 논문에 함축되어 있던 의문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금융 분야에서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모기지 대출이 폭증하였다.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그린스펀은 금리와 주택시장의 관계가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금리가 인상되면 모기지금융은 말라버렸다. 그러면 주택 수요가 감소했고 자연히 주택 가격도 떨어졌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는 금리 인상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린스펀이 유타에서 연설을 하던 시기 즈음에 연준은 단기금리를 9퍼센트로 인상했지만 여전히 모기지 대출은 손쉽게 받을 수 있었고 주택가격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12

그린스펀은 정부로 인해 게임의 규칙이 바뀐 것이 변화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건설업계는 고금리 때문에 주기적으로 부동산시장이 타격을 입자 분개하여 워싱턴 정가에 구제해 달라는 로비를 펼쳤다. 정치인들은 업계의 요구에 응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시도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가 지나쳤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1970년 불황기에 페니매(Fannie Mae)라는 정부지원기관(Government Sponsored Enterprise)이 설립되어 처음으로 민간 모기지를 인수했다. 같은 해 의회는 페니매와 경쟁할 두 번째 GSE인 프레디맥 (Freddie Mac)을 설립했다. 페니매와 프레디맥은 경쟁적으로 은행과 저축대부조합의 모기지를 사들였다. 덕분에 대출 기관은 거대한 자금 조달원을 새로 확보하였고 ‘모기지 신용 가능성(credit availability)의 대규모 확대’ 가 일어났다. 십년 전만 해도 모기지의 신규 창출은 연간 150억 달러 남짓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금액의 여섯 배가 평범한 수준이 되었다.

그린스펀은 이러한 혁명이 주택시장의 변화를 일으킨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모기지시장은 새롭고 중요한 금융기구로 인해 폭발했는데 이 기구는 연방 적자, 기업 대출, 주 및 지방 정부의 차입을 작아 보이게 만든다. 또한 전체 금융시스템에서 가장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 GSE는 주택가격을 끌어올리고 가계의 부를 늘려 소비를 증가시켰다. 정치적으로 금융이라는 배관에 실시된 변화는 휴가, 교육, 대형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지출이 늘어나는 데 일조했다. 결과적으로 모기지 폭발은 단순히 주택시장과 금리의 연계를 끊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최소한 단기적으로 경제 전체와 금리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연준이 단기금리를 4년래 최고 수준까지 인상했지만 페니매와 프레디맥 덕분에 값싸게 대출을 얻을 수 있었고 대출 기관의 대출 여력도 풍부했다. 분명 통화정책은 긴축적이었으나 실계 금융환경은 완화적이었다.13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은 아니었다.14

그린스펀은 훗날 이러한 상황에 ‘수수께끼(conundrum)’ 라는 이름을 붙였다.15 2005년 2월 의회 증언에서 그는 연준의 금리 인상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밝혔다. 외국인의 국채 매입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장기채 금리를 끌어내려 단기금리의 인상이 장기금리 상승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린스펀은 연준이 주택 버블을 진정시키기에 거의 무력할 정도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장기 모기지 금리는 연준의 단기금리 조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단기금리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그린스펀이 지적한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그는 박사 논문을 통해 금융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끊임없이 경제활동을 변화시켰다고 밝혔다. 2000년대 외국인의 미국채 매입은 이를 잘 보여주며, 1970년대 페니매와 프레디맥의 출현은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린스펀은 경제 성장이 일시적이나마 금리와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곧 문제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훗날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거액을 차입하는 등 새로운 신용 경로가 개방되면서 자산가격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1978년 그린스펀은 모기지라는 호스가 열리면서 소비자물가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페니매와 프레디맥으로 창출된 소비력은 이미 CPI 인플레이션을 연율 8퍼센트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게다가 이에 맞서는 연준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강력했다. 그린스펀은 연준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고 질타했는데 이제와 돌아보면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연준은 금융 혁신이라는 자극을 단기금리 인상으로 맞서는 대신 금융시스템이 제 길을 가도록 방조했다. 그 결과 ‘금융시스템에 거대한 신용 과잉’이 발생했다.16 결국 연준이 칼을 빼들면 파티는 멈추겠지만 칼을 꺼내는 시기가 늦춰질수록 주택 버블이 꺼질 때의 고통은 심해질 것이다.

그린스펀은 1978년 10월 유타주립대의 연설을 마무리하면서 “불황이 다가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특히 최근 금융시장에 발생한 불균형을 숨길 방법을 찾으려 한다면 그런 시도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정확히 같은 내용의 경고가 2006년 1월, 연준 의장에서 사임하던 그린스펀에게 내려졌다.

 


8. 이 아이디어의 여러 버전이 케인스 이전에도 존재했다. 화폐를 경제의 실제 작용을 숨기는 ‘베일’ 로 묘사하거나 거래에서 바퀴가 아닌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비유했다.

12. 그린스펀이 연설할 당시 주택가격은 인플레이션 조정 후 연 6퍼센트 이상 상승했다.

13. 연준의 정책이 겉보기보다 긴축 정도가 약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근원 PCE 인플레이션을 차감한 실질단기금리는 그린스펀의 연설 당시 2퍼센트 남짓이었다。하지만 단기금리와 모기지금리의 탈동조화추세는 뚜렷했다. 1975년 10월 초부터 1978년 10월 초까지 연준은 단기금리를 6.2퍼센트에서 8.9퍼센트로 인상했지만 30년 모기지금리는 9.22퍼센트 에서 9.86퍼센트로 0.6퍼센트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쳤다。모기지 데이터는 세인트루이스 연준의 FRED (Federal Reserve Economic Data) 데이터베이스를 참고.

14. 1978 년 초부터 9월까지 인플레이션 조정 후 성장률은 5.3퍼센트를 기록했다.

15. 모기지 금리 관련 ‘수수께끼(conundrum)’의 존재는 이 기간 학계의 연구에서 빠져 있다. 하지만 회고 분석에 따르면 그린스펀의 견해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1954~69년에는 실질 연방기금금리와 주택모기지의 계절 조정의 상관관계가 강했다(외교 협회의 워커(Dinah Walker)의 계산에 따르면 R2가 0.4로 집계 됐다). 1970~84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약화됐다(R2가 0.06). 다시 말해 1978년에는 금리와 모기지 대출 성장률 간에 존재했던 강한 상관관계가 깨졌다.

16. 2007년 이후 그린스펀은 ‘수수께끼’가 연준을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시사했다. 하지만 1978년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준이 강하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예전에 박근혜의 주장은 박근혜의 과거 주장으로 반박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박적박(박근혜의 적은 박근혜)라는 개그가 생각나는데, 비슷하게 윤적윤도 있다-_- 그린스펀 선생의 전기를 보니 그적그-_-라고 해야할 판이구만-_-

근데 사실 나도 옛날에 쓴 블로그 글을 읽으면 ‘내가 이렇게 생각했었나’-_- 싶은 경우가 좀 있다. 반성하면서 발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 같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