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기원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은이),이재만 (옮긴이) 책과함께 2019-01-28 원제 :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2012년)

p64-73

심상지도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이라는 이념을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전환기 발칸의 정치지도와 거의 관련이 없는 세르비아의 심상이었다. 그 이념을 표현한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은 1844년 세르비아 내무장관 일리야 가라샤닌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공을 위해 작성한 비밀 의견서였다. 1906년에 발표된 이후 《나체르타니예(초기 세르비이어의 ‘náčrt’에서 유래한 단어로 ‘초안’ 이라는 뜻)라고 알려진 이 의견서에서 가라샤닌은 “세르비아의 국가정책과 외교정책을 위한 계획”을 약술했다. 이것이 수 세대에 걸쳐 세르비아 정치인과 애국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과장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체르타니예》는 곧바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대헌장이 되었다. 가라샤닌의 의견서는 세르비아가 “소국이지만 이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37라는 소견으로 시작한다. 그는 ‘민족통일의 원칙’이 세르비아 정책의 제1계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든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 국가의 국경 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르비아인 한 명이 거주하는 곳, 그곳이 세르비아다.” 이처럼 세르비아 국가를 확장해서 보는 역사적 근거는 스테판 두샨(1308~1355) 의 중세 제국이었다. 이 제국의 광대한 영토에는 오늘날의 세르비아 공화국 대부분에 더해 알바니아 전체, 마케도니아 대부분, 그리스 중부와 북부 전체가 포함되었다. 다만 흥미롭게도 보스니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두샨 차르의 제국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패한 이후 붕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가라샤닌에 따르면 이 퇴보로 인해 세르비아 국가의 정당성이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세르비아 국가의 역사적 존재가 중단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세르비아인을 통일하는 대大세르비아 ‘복원’은 혁신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적 권리의 표명이었다. “그들은〔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고, 혁명이나 격변을 야기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정치적 필연임을, 그 토대가 아주 먼 옛날에 있고 그 뿌리가 세르비아인의 과거 정치적 • 민족적 생활에 있음을 모두가 인정해야만 한다.”38 이렇듯 가라샤닌은 통합적 민족주의에 관한 담론에서 때때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하는 기법을 구사했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은 중세에 급속히 팽창한, 합성물 같았던 두샨 차르의 다종족 정치체를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근대 민족국가의 관념과 융합할 수 있다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애국자들은 그 논증에서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옛 제국의 영역에 거주하는 사실상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세르비아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근대 세르보크로아트어 문어의 설계자인 부크 카라지치는 유명한 민족주의 책자 《방방곡곡 세르비아인Srbi svi i svuda》의 저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티미쇼아라 바나트(헝가리 동부, 현재 루마니아 서부), ‘바치카(세르비아 북부에서부터 헝가리 남부까지 뻗은지역),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그리고 트리에스테부터 알바니아까지 아드리아해 연안 지방 등에 흩어져 있는, ‘세르비아어’를 말하는 세르비아인 500만 명에 대해 언급했다. 카라지치는 이 지역들에 (특히 크로아티아인을 염두에 두고서)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이라 부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도 점차 그 이름에 익숙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39

가라샤닌이 주장한 통일 계획에 따르면, 세르비아 정치체는 민족주의자들의 상상 속 대세르비아의 영토를 잠식하는 거대한 두 육상제국, 즉 오스만제국 및 오스트리아제국과 오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844년에 오스만제국은 여전히 발칸반도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튀르크 국가의 외벽에서 돌을 하나씩 끊임없이 빼내 흡수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래야 세르비아제국의 오래되고 훌륭한 토대 위에서 이 좋은 재료를 사용해 새롭고 위대한 세르비아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40 오스트리아 역시 적이 될 운명이었다.41 헝가리,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이스트리아-달마티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베오그라드 국가의 보호 아래 통일될 날을 기다리는 세르비아인(아직 세르비아 민족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크로아티아인은 말할 것도 없고)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가라샤닌의 의견서는 그 목표들이 대부분 실현된 1918년까지 세르비아 통치자들의 핵심적인 정책 청사진이었다. 또한 이 의견서의 지침들은 어느 정도는 정부에서 조직하고 어느 정도는 언론 내 애국자네트워크에서 책동한 민족주의적 선전을 통해 전체 인구에게 조금씩 알려졌다.42 그렇지만 대세르비아라는 비전은 정부 정책이나 선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비전은 세르비아인의 문화 및 정체성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두샨의 제국에 대한 기억은 세르비아의 유달리 생기 있는 서사민요 전통 안에서 울려퍼졌다. 이 서사민요는 긴 발라드로 대개 한 줄짜리 현악기인 구슬라의 구슬픈 반주에 맞추어 불렸으며, 가수와 청자는 세르비아 역사의 위대한 원형적 순간들을 다시 체험했다. 세르비아 전역의 마을과 시장에서 서사민요는 시, 역사, 정체성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했다. 일찍이 이 전통을 관찰한 독일 역사가 레오 폴트 폰 랑케는 1829년에 출간한 세르비아 역사서에 이렇게 썼다. “시로 읊는 이 나라의 역사는 시를 통해 국유자산으로 변모해왔고, 그 결과로 민족의 기억에 간직되어 있다.”43 무엇보다 이 전통 안에 간직되었던 것은 외세의 통치에 맞선 세르비아의 투쟁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람들을 거듭 사로잡은 사건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평원에서 세르비아인이 튀르크인에게 패한 전투였다. 이 중세 전투는 사실 그리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수백 년 동안 윤색되면서 세르비아 민족과 이교도 적의 대립을 상징하는 군사작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고난의 시기에 세르비아인을 결속 했던 빛나는 영웅들뿐 아니라 공동 대의에 대한 지원을 보류하거나 세르비아인을 적에게 팔아넘긴 간악한 악당들까지 등장하는 연대기가 코소보 전투를 휘감았다. 신화적 영웅 중에는 유명한 암살자 밀로시 오빌리치가 있는데, 서사민요는 전투를 치른 날에 그가 오스만군 본부에 잠입해 술탄을 살해한 뒤 근위병에게 체포되어 참수당 했다고 이야기한다. 암살, 순교, 희생, 망자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심은 서사민요의 주요 테마였다.44

신화적인 과거에 투영한 상상 속 세르비아는 이 민요 문화 안에서 찬란하게 되살아났다. 1875년 반오스만 봉기를 일으킨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의 서사민요 공연을 본 영국 외교관 아서 에번스 경은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로 하여금 (……) 한층 영광스러운 이 전설들 속에서 왕국의 좁은 전통을 잊게” 하고, 각자의 경험을 세르비아의 모든 땅에 사는 “형제들”의 경험과 합쳐지게 하고, 그리하여 “지리학자와 외교관의 허튼소리를 무시하게” 하는 공연의 효과에 감탄했다.45 19세기 들어 이런 구비서사시 문화가 대중 인쇄물로 대체되면서 점차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897년 세르비아를 여행하던 영국 외교관 찰스 엘리엇 경은 드리나강 골짜기의 시장들에서 떠돌이 연주자들의 서사민요 공연을 여전히 들을 수 있었다. “이 랩소디는 1현 기타의 반주에 맞추어 단조롭게 노래되지만 감정과 표현이 아주 진실해서 전체적인 효과는 나쁘지 않다.”46 여하튼 부크 카라지치가 편찬해 출간한 세르비아 서사시집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성장하는 문학 엘리트층에게 꾸준히 읽혔다. 더욱이 서사시 전체의 규모가 계속 커졌다. 1847년 몬테네그로의 군주 겸 주교인 페타르 2세 페트로비치-네고스는 이 장르의 고전이 된 《산의 화환》을 펴냈는데, 신화적인 술탄 암살자이자 민족의 순교자인 밀로시 오빌리치를 찬미하고 반외세 항쟁을 재개할 것을 주창하는 작품이었다. 《산의 화환》은 세르비아의 민족 정전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47 세르비아의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두 육상제국 사이에 끼인 매우 불리한 위치가 함께 작용한 결과, 세르비아의 외교정책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첫 번째는 지리적 초점의 불확정성이다. 대세르비아를 복원하려는 운동은 원칙상 하나였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디서부터 영토를 회복해야 하는가? 헝가리왕국에 속하는 보이보디나인가? ‘구舊세르비아’로 알려진 오스만령 코소보인가? 두샨의 제국에 속한 적은 없지만 상당히 많은 세르비아인 인구를 포함하는 보스니아인가? 아니면 여전히 오스만의 통치를 받고 있는 남쪽의 마케도니아인가? ‘통일’이라는 원대한 목표와 세르비아의 변변찮은 재정 • 군사 자원 사이의 간극이 컸던 탓에 베오그라드 정책수립자들은 발칸반도의 급변하는 정세에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44년부터 1914년까지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지향점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휙휙 돌아가곤 했다. 이런 갈팡질팡 정책은 대개 이미 일어난 사태에 대응해 정해졌다. 1848년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이 헝가리 혁명정부의 마자르화 정책에 반발해 봉기했을 때, 가라샤닌은 세르비아공국의 물자와 자원 병력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1875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세르비아 본국의 이목은 온통 그곳으로 쏠렸다(이 투쟁의 현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간 이들 가운데 군 지휘관으로서 가명으로 싸운 미래의 국왕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와 파시치가 있었다). 오스만령 마케도니아에서 튀르크인에 맞선 지역 봉기가 수포로 돌아간 1903년 이후에는 그곳의 세르비아인들을 해방시키는 목표에 관심이 집중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 병합하자(1878년부터 오스트리아가 군사 점령하고 있었다) 병합된 두 지역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1912년과 1913년에 최우선 의제는 다시 한 번 마케도니아였다.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수립자들은 이 나라의 정치문화를 뒤덮은 원대한 민족주의와 발칸반도의 복잡한 종족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신화적 영토의 중심이었지만 종족 면에서 명백한 세르비아 영토가 아니었다. 적어도 18세기부터 코소보의 다수집단은 알바니아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이었다.48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에서 부크 카라지치가 세르비아인으로 셈한 이들 중 다수는 실은 크로아티아인으로, 그들은 대세르비아에 합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역사상 세르비아의 일부였던 적이 없는 보스니아에는 많은 세르비아인(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점령된 187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인구의 43퍼센트였다)이 살고 있었지만, 가톨릭교도 크로아티아인(약 20퍼센트)과 무슬림 보스니아인(약 33퍼센트)도 있었다. (무슬림 소수집단이 상당수 살아남은 것은 보스니아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오랜 독립 투쟁을 거치면서 무슬림 공동체들이 대부분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국외로 이주하거나 강제로 추방되거나 살해당했다.)49

더욱 복잡한 사례는 마케도니아였다.
(중략)

민족들의 비전과 종족들의 현실이 어긋나는 상황에서 세르비아의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은 크고 작은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 차원만이 아니라 더 낮은 도시와 마을 차원에서도 폭력적 과정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세르비아의 일부 정치인들은 다종족 협력 관념을 포함하는 좀 더 관대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정치적 비전 안에 세르비아의 민족적 목표들을 포장해 넣는 방식으로 이 난제에 대처했다. 그중 한 명인 니콜라 파시치는 1890년대에 소수민족들이 쇠망하기 마련인 세계에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연합할 필요성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그렇지만 이런 수사의 밑바탕에는 첫째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본질적으로 같은 민족이고, 둘째로 오랫동안 “외국 문화의 영향”에 노출된 가톨릭교도 크로아티아인보다 세르비아인이 더 진정한 슬라브족이므로 세르비아인이 이 과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54

세르비아는 이런 목표를 공개적으로 추구할 형편이 못 되었다. 따라서 인접한 국가나 제국에 아직 종속되어 있는 세르비아인들을 ‘해방’ 시키는 계획을 어느 정도 비밀리에 추진해야 했다. 가라샤닌은 1848년 보이보디나 봉기 때 비밀공작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숙적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세르비아 민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치적 요인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개적으로 원조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비밀리에 원조할 수밖에 없다.”55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에서도 이런 비밀공작을 선호했다. 1903년 8월 마케도니아에서 반오스만 반란이 실패한 뒤, 카라조르제비치 신정권은 이 지역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인 게릴라의 활동을 책동할 위원회들을 설립했고, 전사단을 모집하고 공급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에서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베오그라드 주재 오스만 공사를 만난 세르비아 외무장관 류보미르 칼레비치는 세르비아 정부의 관여를 일체 부인했고, 그 회의가 “전사단을 모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국경 너머 같은 종교의 신자들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조의를 표하기 위해” 열렸으므로 여하튼 불법이 아니라고 항변했다.56

 


37. 《나체르타니예》 텍스트는 Dragoslav Stranjaković, ‘Kako postalo Garašaninovo “Načertanije”‘, in Spomenik Srpske Kraljevske Akademije, VCI(1939). pp. 64-115, 그중 p. 75 참조. Wolf Dietrich Behschnitt, Nationalismus bei Serben unci kroaten 1830-1914 (Munich, 1980), p. 55에서 인용.

38. Behschnitt, Nationalismus, p.57에서 인용; 또한 Horst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bei Serben und Kroaten im 19. Jahrhundert’, Österreichische Osthefte, 39 (1997), pp. 245 -54, 그중 247 -8 참조.

39. 《방방곡곡 세르비아인》 텍스트는 Vuk Stefanović Karadžić, Kovčežic za istoriju, jezik, običaje Srba sva tri zakona〔세 종파 모든 세르비아인의 역사, 언어, 민속의 보고〕(Vienna, 1849), pp. 1 -27, 그중 pp. 1. 7. 19, 22 참조;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 명칭을 채택하기를 거부한 수수께끼 같은 사정은 PP. 2-3: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p. 246 -7 참조.

40. Karadžić, Kovčežic, pp. 2 – 3;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 248.

41. Stranjaković, ‘Kako postalo Garašaninovo “Načertanije”‘. p. 84, Behschnitt, Nationalismus, p. 56에서 인용;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 249.

42. David MacKenzie. Serbia as Piedmont and the Yugoslav Idea, 1804 -1914 , East European Quarterly, 28 (1994), pp. 153—82, 그중 p. 160.

43. Leopold von Ranke, The History of Servia and the Servian Revolution, trans. Mrs Alexander Kerr (London, 1853), p. 52.

44. Tim Judah, The Serbs. History, Myth and the Destruction of Yugoslavia (2nd edn, New Haven, 2000), pp. 29 -47.

45. Arthur J. Evans, Through Bosnia and the Herzegovina on Foot during the Insurrection, August and September, 1875 (London, 1877), p. 139.

46. Barbara Jelavich, ‘Serbia in 1897: A Report of Sir Charles Eliot’,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18 (1958), pp. 183-9, 그중 p. 185.

47. Dedijer, Road to Sarajevo, pp. 250 — 60.

48. 구세르비아(코소보. 메토히야, 산자크, 부야노바츠로 이루어진)의 정확한 인구는 알려져 있지 않다’, Behschnitt, Nationalismus, p. 39 참조.

49. Justin McCarthy, Death and Exile. The Ethnic Cleansing of Ottoman Muslims, 1821 -1922 (Princeton, 1996). pp. 161 -4 외 여러 군데 참조.

54. Djordje Stanković, Nikola Paštć, saueznivi i stvaranje Jugoslavije (Zajecar, 1995). p. 29에서 인용;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본질적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파시치의 신념은 id., Nikola Paštć, Prilozi za biografiju, 특히 제1장 참조.

55. David MacKenzie, Ilja Garašanin: Balkan Bismarck (Boulder, 1985), p. 99에서 인용.

56. Vucinich, Serbia between East and West, p. 122.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왜 국경을 넘어서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영토를 시찰하는 황태자를 살해했는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심정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한 상황을 납득할만하게 설명해주는 전반적 설명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이 책 은근히 재밌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