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치기 딜레마

아라비아의 로렌스 –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 걸작 논픽션 12
스콧 앤더슨 (지은이), 정태영 (옮긴이) 글항아리 2017-06-12

p541-542

석 달 전 로렌스와 반란군 동료들은 아바엘나암(Aba el Naam)에서 터키군 수비대를 기습하려고 매복하던 중 우연히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목동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목동을 그대로 돌려보냈다가는 터키군에게 반란군의 존재가 발각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목동은 양떼가 흩어질까봐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결국 매복 부대는 다소 코믹한 해법을 떠올렸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목동을 나무에 묶어두었다가 적군이 달아난 뒤에 풀어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암만의 주변을 치고 빠지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런 배려를 베풀 틈은 없었다.

그때 마침 습격대는 시르카시아에서 온 떠돌이 상인과 맞닥뜨렸다. 그를 포로로 잡아둘 수도 없고 그냥 보내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시르카시아인은 대부분 터키 동조자였다) 일부 대원은 당장 죽이라고 외쳐댔다. 결국 찾아낸 절충안은 상인을 발가벗기고 단검으로 발가락을 모조리 자르는 것이었다. 로렌스는 담담하게 기록했다.

“기이한 장면이었다. 그래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자비롭고 효과적인 방법처럼 보였다. 발가락이 잘린 그는 철로를 향해 손바닥과 무릎으로 기어서 한 시간 정도 가야 했는데, 벌거벗었기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는 바위 그늘에 몸을 숨겨야 했을 것이다.”

그 시르카시아인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태양이 이글이글하는 6월의 시리아 사막에 벌거벗겨진 채 불구가 된 사내를 내버려두고 떠나는 행동이 과연 자비였을까.

인문학 책으로 이례적인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1] 샌델 선생의 ‘정의란 무엇인가‘[2;p40]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대한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1명을 죽일지 5명을 죽일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Trolley problem의 실제 사례로서의 예시로 등장한다.

2005년 6월, 미 해군 특수부대 실(SEAL) 소속의 마커스 루트렐 하사와 수병 세 명이 파키스탄 국경과 가까운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탈레반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였다.37 정보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이 찾는 인물은 140~150명의 중무장 세력을 지휘하면서 험한 산악지대의 어느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특수부대 팀이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직후, 아프가니스탄 농부 두 명이 약 100마리의 염소를 몰고 나타났다. 일행에는 열네 살가량의 남자아이도 끼어 있었다. 모두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미군은 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땅에 앉으라는 시늉을 한 다음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했다. 염소치기들은 비무장 민간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들을 놓아주면 미군의 소재를 탈레반에게 알려줄 위험이 있었다.

미군은 몇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했는데, 밧줄이 없어서 이 염소치기들을 묶어놓고 다른 은신처를 찾을 수도 없었다. 유일한 선택은 이 들을 죽이든가 풀어주든가, 둘 중 하나였다.

한 사람은 염소치기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상관의 지시로 적의 전선 후방에서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군의 결정은 자명합니다. 저들을 놓아주는 것은 잘못입니다.’38 루트렐은 갈등했다. 그는 뒷날 이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마음속으로는 그가 옳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분명 그들을 풀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속에 또다른 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였다. 그가 내게 달려들었다. 무언가 내 마음 저편에서 줄곧 속삭였다. 무장하지 않은 저들을 냉정하게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고.”39 루트렐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의미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양심상 염소치기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풀어주자는 쪽에 표를 던졌다(다른 한 명은 기권했다). 곧 후회할 결정이었다.

염소치기들을 풀어준 지 한 시간 반쯤 지나 미군 네 명은 AK-47과 휴대용 로켓발사기로 무장한 탈레반 80〜100명에게 포위되었다. 곧 이어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탈레반 무장 세력은 실 대원을 구출하려던 미군 헬리콤터 한 대까지 격추해, 그곳에 타고 있던 군인 열여섯 명을 모두 죽였다.

중상을 입은 루트렐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11킬로미터를 기어서 파슈툰 마을에 도착했고, 그곳 사람들은 구출될 때까지 그를 탈레반의 눈에 띄지 않게 보호해주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루트렐은 염소치기를 죽이지 않는 쪽에 표를 던진 행동을 후회 했다. “내 평생 가장 어리석고. 가장 남부인스러운 덜 떨어진 결정이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책으로 썼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다. 사형집행을 승인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쪽에 표를 던졌다. (……) 적어도 지금 그 순간을 돌아보면 그렇다. (……) 그 결정적인 표는 내가 던졌고, 그 일은 이스트텍 사스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다.’40

 


37) Marcus Luttrell, with Patrick Robinson, Lone Survivor : The Eyewitness Account of Operation Redwing and the Lost Heroes of SEAL Team 10(New York: Little, Brown and Company, 2007).

38) Ibid, p. 205.

39) Ibid.

40) Ibid, pp. 206-207.

위 사건은 Operation Red Wings 도중에 일어난 일로서, 위에 언급된 책 Lone Survivor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역사는 반복되고, 전쟁은 언제나 비극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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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5
블룸버그 Tesla’s Autopilot Could Save the Lives of Millions, But It Will Kill Some People First 2019년 10월 9일 오후 6:00 GM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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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레 ‘정의란 무엇인가’ 100만부 돌파 2011-04-18 21:44
[2]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은이),이창신 (옮긴이) 김영사 2010-05-26 원제 :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One thought on “염소치기 딜레마

  1. 핑백: 19.09.29 – Suyeong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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