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신서(解體新書)의 탄생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이종각 (지은이) 서해문집 2013-10-25

pp9-13

도쿄 우에노 역에서 전철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미나미센주 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에코인이란 조그만 절이 나온다.

절터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1603—1868), 에도(지금의 도쿄)의 2대 형장 중 하나인 고쓰가하라 형장이 있던 곳이다. 1651년 형장이 개설된 이래 메이지유신(I868) 직후 폐지될 때까지 210여 년 간, 무려 20만 명 이상이 처형됐다. 한 해 1000명가량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셈이다. 참수, 화형, 능지처참, 효수 등 갖가지 형이 집행됐다. 사체는 흙으로 대충 덮어 형장에 방치해 들개들이 무리지어 사육死肉을 뜯어 먹어 악취가 진동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 형장에선 일반 죄인 이외에 국사범들도 처형됐는데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하급무사들을 가르친 막부 시대 말기의 저명한 사상가로 일본인들이 높게 평가하는 요시다 쇼인도 그중 하나다. 그는 당시 국법으로 금지한 밀항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1859년 처형당했다. 처형 직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묘가 현재 절 안에 남아 있다.

형장을 개설할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에코인 절이 세워졌고, 그 후 형장 터를 가로질러 철도를 부설하면서 엔메이지란 절도 세웠다. 엔메이지 마당엔 당시 처형된 사형수가 저세상에 서라도 연명하길 바라는 뜻으로 세운 약 4미터 높이의 지장보살 불상이 남아 있다. 사람 목을 치는 형장에 있던 불상이기 때문인가, ‘구비키리 지죠首切り地蔵(참수 지장보살)’란 섬뜩한 이름이 붙어 있다.

(중략)

1771년 초봄, 바로 이 형장에서 일본 근대 의학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일본의 근대를 바꾸는 하나의 단초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스기타 겐파쿠(이하 겐파쿠)를 비롯해 에도에서 근무하는 각 번의 시의侍醫(다이묘 등을 진료하는 의사)들이 이 형장에서 인체 해부를 처음 참관하고, 모종의 결의를 한 것이다.

이날 인체 내부를 처음 본 겐파쿠를 포함한 의사 셋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옛 중국 의서에 실린 인체도는 실제와 다른 반면, 자신들이 갖고 간 네덜란드 인체 해부서에 실린 인체도는 실제 인체와 정확히 같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의사라면서 인체 구조도 제대로 모른 채 주군님을 모시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반성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해부서를 일본어로 변역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 결의는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시 겐파쿠는 알파벳조차 몰랐고, 나머지 두 사람의 네덜란드어 실력도 극히 초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 도구라고는 사전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한 필사본 네덜란드어-일본어 단어장 한 권 정도였다. 따라서 이들이 네덜란드어 의학 전문 서적을 해독하고, 번역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해냈다. 약 3년에 걸친 ‘고심참담苦心慘憺,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번역을 마치고 《해체신서》란 번역서를 출판한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해체신서》는 일본 역사상 첫 서양 의학서 번역이라는 불후의 업적이자 일본 근대 의학의 여명을 밝힌 쾌거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체신서》 출간은 이후 네덜란드(화란和蘭)를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을 뜻하는 ‘란가쿠蘭學(이하 난학)’가 일본에 융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해체신서》 출간 이후 난학은 100년 가까이 일본 근대 의학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 나아가 교육, 사고방식, 관습 등 일본인과 일본 사회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며 퍼져 나갔다. 난학은 근대 일본을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는 촉매 역할을 하면서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를 이루는 하나의 토양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획기적 위업’으로 겐파쿠는 일본에서 ‘난학의 선구자’, ‘일본 근대 의학의 개척자’로 칭송되면서,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일본 사람 중에서 그의 이름과 《해체신서》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가히 위인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인 중에 겐파쿠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본, 일본인에 대한 호오好惡는 일단 접어 두고 200여 년 전 쇄국의 섬나라, 일본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들이 보여 준 ‘의사라면서 인체 구조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해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려는 자세는 프로페셔널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힘든 일에 도전해 악전고투 끝에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간 것은 창의, 개척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자세는 오늘날의 한국인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것이 언뜻 보아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겐파쿠의 행적을 더듬어 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이 아니라 거의 암호해독 수준의 노력이 들어간 듯 하다-_- 개인적으로는 조선과 일본의 국가적 운명이 난학에서 갈렸다고 보고 있다. 여러가지 볼 게 많은 아키하바라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데 ㅋㅋㅋㅋ 언제 한 번 절터에 방문해볼까 싶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