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 정상에서 스키타기

지난 겨울에 폴란드 등반대가 K2 동계 초등정을 시도했던 모양[1,2]인데, 결국 실패로 돌아간 듯 하다. K2는 동계 초등정이 되지 않은 유일한 8000미터 14좌라고 들었다. 예지 쿠쿠츠카 이래로 뭔가 폴란드 산악팀이 강세인 듯한데, 아쉽게 됐구만.

14좌 사망율 중에 안나푸르나 다음으로 높은 산[3]인 K2는 대단히 험준하여, ‘죽음을 부르는 산'(savage mountain)이라는 별명이 있다. 지금은 하계 시즌이긴 하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은 곳이다. 근데 지난 7월 22일에 이 산의 정상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온 미친-_- 친구가 있다는 기사[4]를 봤는데, 기사에 영상[5]도 있다. 원래 초등정을 first ascent라고 부르는데, 이건 내려왔으니 first descent가 되는 듯. ㅋㅋ

Andrzej Bargiel라는 폴란드 산악인이라고 하는데, 또 폴란드인인가-_- 나름 인지도가 있는 사람 같다. 재생시간 5분.

물론 관리된 스키장이 아니므로 씽씽 내려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만약 다치기라도하면 누군가 구조를 해 줄 가능성은 거의 없으므로[6] 죽는다고 봐야 할 듯 하다. 또한 고도 8000m이상은 지나치게 낮은 산소 농도 때문에 장기 체류시 인체에 피해가 있으므로 death zone이라 불리는데, 한가하게 활동하는 것 자체가 곤란할 듯. 내려오는데 7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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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BC Polish mountaineers end attempt to climb K2 in winter 5 March 2018
[2] 마운틴 저널 폴란드 동계 K2원정대의 사투, 구조, 분쟁 2018.03.21 11:46
[3] 내 백과사전 8000미터 14좌 등반 사망률(2012) 2013년 5월 30일
[4] Twisted Sifter First Descent: Polish Mountaineer Andrzej Bargiel Skies Down From the Top of K2 JUL 31, 2018
[5] Andrzej Bargiel First Ski Descent from K2 (youtube 5분)
[6] 내 백과사전 2004년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 사고 2013년 3월 31일

스콧이 개썰매를 쓰지 않은 이유

에드워드 J. 라슨 저/임종기 역, “얼음의 제국“, 에이도스, 2012

p225-229

한 세기 동안, 극지탐험가들과 남극 역사가들은 난센피어리 그리고 북극탐험 세대들의 저작과 이야기들에서 개썰매가 인간 썰매보다 낫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이 왜 개씰매 보다는 대원들이 직접 썰매를 끄는 방법을 선택했는지 의아해했다. 물론 디스커버리호 탐험대 시절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개들 때문에 겪었던 끔찍한 경험과 고통 받는 개에 대한 지나친 예민함이 스콧의 판단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왜 인력으로 썰매를 끄는 방법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해답은 사실상 에드워드 시대의 남성다움의 척도와 적자에 대한 경쟁적인 증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스콧은 『디스커버리호 항해기』에 유명한 글을 남겼다. “나는 개들을 이용한 여행으로는 그 숭고한 관념의 고지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원들이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시련과 위험 그리고 난관에 정면으로 맞서고,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힘든 육체노동으로 광대한 미지의 세계가 던져주는 문제를 풀 때 그 고지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그래야만 더 고귀하고 훌륭한 정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59 레너드 다윈이 표현한 대로 “조국의 남성다움”을 입증하기 위해서 스콧과 그의 대원들은 썰매를 남극점까지 끌고 갔다가 돌아오거나 아니면 노력 끝에 죽어야 했다.

스콧이 두 번째 탐험을 할 때, 썰매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영국 극지탐험대의 특성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는 프랭클린 수색대와 함께 시작되어, 클레먼츠 마크햄을 비롯해, 탐험에 헌신한 몇몇 베테랑들에 의해서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마크햄은 디스커버리호 탐험대의 매뉴얼에 썰매여행에 관한 레오폴드 매클린턱의 에세이를 실었다. 매클린턱은 이렇게 썼다 “썰매여행의 체계가 정교화되기 전까지는 강인한 인내력과 여러 가지 즉흥적인 재능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렇게 해서 차츰 정착된 매클린턱의 썰매여행은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후 사람이 썰매를 끄는 기술은 빅토리아 시대의 유산이 되었고, 마크햄, 스콧, 새클턴이 이를 이어받았다. 예컨대, 디스커버리호 탐험을 계획할 때, 마크햄은 스키와 개를 이용한 난센피어리의 탐험을 “영국 대원의 방식”인 썰매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탐험과 비판적으로 비교한 후 이렇게 선언했다.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이 극지방에서 여행하는 방법이다. 스키도 개도 필요 없다” 1899년, 마크햄은 북극에서 개들을 이용해 썰매를 끌었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개의 도움 없이 성취해낸 것과 비교하면, 개와 함께 성취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시 탐험을 설계한 마크햄의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탐험에서 귀환한 대원들은 마크햄에게 썰매를 끄는 인간의 모습을 조각한 작은 조상彫像을 주었다. 네어스의 탐험대가 북극탐험에 나섰을 때, ‘서쪽 썰매여행’을 지휘했던 펠험 앨드리치는 1903년에 스콧에게 친절히 편지를 썼다. “후손들은 귀하의 썰매여행을 극지탐험 역사에서 최고의 탐험으로 평가할 것입니다.”60 새클턴이 이런 전통을 이어 인력으로 썰매를 끌고 남극점 가까이 갔다가 돌아와 국민의 대대적인 갈채를 받은 이후, 스콧 역시 남극으로 돌아가 전통대로 계속 인력으로 썰매를 끌었다.

테라노바호 탐험대의 대원들은 대체로 사람이 끄는 썰매의 정신을 받아들였다. 남극에서 한겨울을 나면서 스콧은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조랑말과 인간에 의존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설명하면서, 아이스 배리어에서는 조랑말을 이용했고, 이후에는 사람 힘으로 썰매를 끌었다고 말했다. 스콧은 “이런 의향에 전 대원들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고 보고했다. “대원들 모두가 빙하와 극점을 가는데 개들을 이용하는 것에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남극점을 향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랙터가 작동을 멈추자, 레슬리는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레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작동을 멈춘 트랙터를 보자마자, 스콧은 “기계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려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외쳤다. 조랑말이 뒤이어 죽자, 윌슨은 이렇게 선언했다 “천만다행히, 말들은 이제 모두 생을 다했으니, 우리는 스스로 더 힘든 일을 시작하련다.” 스콧은 비어드모어 빙하에 덮인 연질의 눈 때문에 개들이 썰매를 끄는 게 무척 힘들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개들을 데리고 출발하는 것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결국 짐은 대원들에게 넘겨졌는데, 스콧은 “우리는 꽤 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지원 팀은 남극고원에 도착한 후 돌아갔고, 스콧과 대원 네 명은 썰매 한 대를 끌고 남극점을 향해 150마일에 이르는 길을 떠났다. 지원 팀을 통해 캐슬린 스콧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H. R. “버디” 바워스(다른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걸어서 움직였다)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오늘날 영국 민족이 쇠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대원들이 직접 짐을 끌고 남극고원을 여행하는 것은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61

디스커버리호, 님로드호, 테라노바호는 세기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이의 짧은 시기에 항해에 나섰다. 세계대전으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전까지 많은 유럽인들은 운명과의 영웅적인 투쟁 그리고 인간 힘의 헛된 과시 속에서 의미를 찾았다. 빙판 위에서의 활약으로 개인적 인정을 받았던 많은 베테랑 남극탐험가들은 영국 제국의 병력 중 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던 전쟁에 참전했다. 개성을 요하지 않는 집단에 들어간 이들 탐험가들은 대부분 참호와 전장에서 살육되었다. 몇몇 탐험가들은 대부분 해상 전투 중에 죽음을 택했다. 마크햄 그리고 1911년 프랜시스 골턴의 뒤를 이어 영국 우생학교육Britain’s Eugenics Education Society 회장이 된 레너드 다윈과 같은 극지탐험 지지자들에게 탐험은 민족의 적합성과 기질을 측정하는 실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혹독하게 시험되었지만,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탐험대원들은 이러한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우생학적인 견해는 문화의 일부였다. 스콧은 1911년에 남극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우리가 이 탐험에서 증명한 것만큼 아주 명확히 민족적 기질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선 밖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마음속에 있는 목적이 중요하다. ‘신들’은 작아지고, 겸허함이 이들을 대신한다. 허영은 쓸모없다.” 나중에 탐험가들의 과학적 현장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끈기 있는 연구를 통해 얻은 위대한 결과야말로 분투하는 인류를 위한 최상의 실례이다.”62 탐험가들은 남극점에 도달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시험하기도 했지만, 또한 과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탐험의 부가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남극대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됨에 따라 과학 프로그램의 초점은 점차 지자기, 지리상의 발견, 해양학, 기상학에서 생물학, 지질학, 빙하학으로 바뀌었다.

 


59. SCott, Voyage of the “Discovery,” 1:467-68.
60. F. Leopold McClintock, “On Arctic Sledge-Travelling,” in The Antarctic Manual for the Use of the Expedition of 1901, ed. George Murray (London: Royal Geographical Society, 1901), 293; Clements R. Markham, “Memorandum for the Landing Party Committee,” n.d. National Maritime Museum Archives, MRK/46 (106); Clements Markham, “The Antarctic Expeditions,” Verhandlungen des siebenten Internationalen Geographen-Kongressess, Berlin, 1899 (Berlin: Kuhl, 1901), 625; Perlham Aldrich to R. F. Scott. Sept. 26, 1903, SPRI Archives, MS 366/15
61. Robert Falcon Scott, Journals: Captain Scott’s Last Expedition, ed. Max Jones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89; Lashly, Scott’s Command, 121; Scott, Journals, 315; Edward Wilson, Diary of the “Terra Nova” Expedition to the Antarctic, 1910-1912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7), 213; Scott, Journals, 345; H. R. Bowers to Kathleen Scott, Oct. 27, 1911, SPRI Archives, MS 1488/2 (vol. 1).
62. Scott, Journals, 185, 209

이걸 보니 근대 산악 정복의 역사에서 초등을 중시하는 등정주의에서, 등정하는 방법과 경로를 중시하는 등로주의로의 변천이 연상된다. 알파인 스타일만이 가치있는 등정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콧과 같은 입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ㅎ

[서평] 셰르파, 히말라야의 전설

셰르파, 히말라야의 전설
조너선 닐 (지은이) | 서영철 (옮긴이) | 지호 | 2006-10-16 | 원제 Tigers of the Snow (2002년)

 


이 책은 독일의 1934년, 1938년 낭가 파르바트 원정, 1939년 K2 원정, 영국의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중심으로 서술하되 셰르파에 좀 더 초점을 맞춘 서술을 담은 등반사가 들어있다. 책을 처음에 샀을 때는 현대 등반에서 셰르파나 포터의 역할에 대한 책인줄 기대했으나 그런 건 아니었다. ㅋㅋ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부터 짧게 소개하고, 역사적 기록과 구전 인터뷰를 병행하여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방법과 기록을 서술하는 자신의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은 주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재구성이지만 중간중간에 셰르파가 어떻게 고소 포터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지, 1930년대 당시 나치 정부는 왜 등반가를 후원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도 소개하고 있으며, 셰르파의 문화나 관습 등의 내용도 소개되어 있다. 대부분의 등반서는 주요 등반자의 관점에서 주요 등반자들의 행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마치 그 사람들 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지만, 실제로 수많은 포터들에 의해 도움을 받고 있고, 이들이 없다면 결코 성공적인 등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산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세 단어라는 ‘Because it’s there’라는 말을 남긴 말로리가 등정을 하던 시기는 아직 영국이 식민지를 거느리던 시절인데, 이 시기의 영국인들이 하층민을 대하듯이 셰르파를 대하던 풍조와 이후 스위스인이나 미국인들이 평등하게 셰르파를 대하던 풍조를 비교하면서, 팀원에게 인간적 대우를 할 때 더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당연하고도 흔하게 무시되는 진리를 새삼 각인 시켜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여러가지 잡다한 역사적 지식들이 많이 나온다. 1930년대 당시 셰르파인과 티베트인의 문화적 차이도 짧게 소개하고 있는데, 티베트인들은 호전적이고 명령에 불복종할 때가 많아, 하인이 필요한 영국으로서는 셰르파인을 선택한 것이지 특별히 셰르파인이 고소 적응에 뛰어난 신체적 특질을 가지고 있어서 셰르파인들이 포터로서 살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p211) 이 부분은 약간 의아했는데, 일전에 피터 홉커크 선생의 저서를 인용[1]할 때는 티벳 사람들이 상당히 비폭력적인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아서이다.

1920년대와 30년대 등반은 상류층의 스포츠였고, 그래서 하류민들이 클럽에서 배척당했던 이야기도 잠시 나온다. George Finch가 옥스브리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던 등반사의 흑역사도 잠시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p331) 물론 세르파인이나 티벳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내용은 흔했겠지만, 다른 종류의 차별 또한 존재했다는 면은 몰랐다.

후반부에 비스너파상 다와 라마가 K2의 정상 직전까지 접근하는 부분과, 텐징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과정이 잠시 나오는데, 디테일한 부분은 몰랐던 이야기라서 꽤나 흥미진진했다. 파상 다와 라마는 이후 오스트리아 원정대를 초오유에 사흘만에 올려 놓는[2] 괴력의 체력을 가진 사람이다. ㅎㅎ

일전에 크라카우어의 책[3]도 그렇지만 등장인물이 많고, 같은 인물을 이름으로 불렀다가 성으로도 부르는 부분이 대단히 혼란스럽다.

셰르파의 시선에서 보는 등반사라는 측면에서 등반사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본다.

 


[1] 내 백과사전 티벳 독립을 위한 분신자살 2013년 1월 26일
[2] 내 백과사전 1954년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초오유 등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 2016년 4월 17일
[3] 내 백과사전 [서평] 희박한 공기 속으로 2012년 10월 14일

1954년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초오유 등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

초오유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으로, 히말라야 14좌 중의 하나이다. 1954년 오스트리아 원정대에 의해 초등되었다.

조너선 닐 저/서영철 역, “셰르파, 히말라야의 전설“, 지호, 2006

p403-405

1939년에 파상 다와 라마(Pasang Dawa Lama)K2 봉을 거의 등정할 뻔했다. 1953년에 그는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사다로 임명되었으나 파키스탄 정부는 그들을 카슈미르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듬해인 1954년에 그는 쿰부에 있는 소규모 초오유 오스트리아 원정대의 사다로 임명되었다2 이 산은 8천 미터 이상 되는 고봉 중 하나이고, 1954년에는 그런 고봉들 중에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그리고 낭가파르바트만이 등정되었다.

당시 파상 다와 라마는 루크라 비행장 근처 차우리 카르카에 사는 젊은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파상 다와 라마가 20살이나 연상이고 이미 부인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상 다와 라마는 그들과 도박을 했다. 만일 그가 초오유의 정상에 선 첫번째 사람이 된다면 그들의 딸과 결혼하기로 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젊은 여자를 홀로 남기고 떠나야 하며, 그들에게 5백 루피를 주기로 했다. 그들이 도박을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 원정대는 세찬 바람과 원정대장인 헤르베르트 티치의 심한 동상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식량이 바닥나서 파상 다와 라마는 보급품을 구하러 남체(Namche)로 다시 내려갔다. 남체에서 그는 한 스위스 원정대가 초오유를 향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될 판이었다.

남체에서 낭파 라를 거쳐 초오유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데는 도보로 사흘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다. 파상 다와 라마는 원정대의 모든 식량을 짊어지고도, 하루 안에 그 거리를 돌파했다. 그 다음날 그는 짐을 들고 원정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캠프까지 올라가 오스트리아 등반가들을 만났다. 사흘째 되는 날 그는 오스트리아 등반가들을 끌어 모아 그들을 정상으로 데려갔다.

남체의 아누 셰르파는 그해 여덟 살 먹은 소년이었다. 그는 파상 다와 라마가 으스대면서 한 발짝씩 무겁게 놓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새로운 처갓집 쪽으로 발을 구르며 골짜기를 쿵광대며 내려오던 모습을 기억한다. 파상 다와 라마를 보기 위해서 골짜기를 따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이야기한다. 그주에 차우리 카르카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원정대 모두, 세르파족이나 오스트리아 사람들이나 만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2. 1954년 초오유 원정에 관해서는 Herbert Tichy, Cho Oyu: By Favour of the Gods, trans. Basil Creighton (London: Methuen, 1957) 참조

남체에서 사흘만에 초오유 정상에 도달하다니, 미친 체력이다-_- 결혼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다ㅋㅋ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정상을 등정한 게 아니라 파상 다와 라마가 등정한 거나 다름이 없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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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카우어의 영화 ‘에베레스트’에 대한 혹평

존 크라카우어씨의 책을 인상깊게 읽어서 본 블로그에서도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1]와 ‘희박한 공기 속으로'[2]를 소개한 바 있다. 산악문학의 명저로 손꼽힌다는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1996년 에베레스트 남벽 사고를 저자가 직접 체험하여 쓴 기록문인데, 대단히 인상적인 책이니 일독을 권한다. ㅎㅎ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영화 ‘에베레스트‘가 근래 개봉되어 현재 상영중인 모양인데, 정작 크라카우어씨는 이 영화에 상당한 혹평[3]을 하는 듯.

영화가 완전히 뻥(total bull)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뭐 본인은 영화제작을 일종의 예술행위라는 관점에서 꼭 사실과 동일할 필요는 없다고 보지만, 그래도 사실성에 마케팅을 두는 영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보려고 했던 기분에서 김이 빠진다. ㅎㅎ 사실로 오해할만한 허구를 별로 즐기지는 않으니, 본인이 이 영화를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1] 내 백과사전 [서평]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 2014년 7월 16일
[2] 내 백과사전 [서평] 희박한 공기 속으로 2012년 10월 14일
[3] 가디언 ‘Total bull’: Into Thin Air author’s opinion of Everest movie Monday 28 September 2015 17.12 BST

[서평]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10점
존 크라카우어 지음, 하호성 옮김/자음과모음

산악문학의 명저로 손꼽히는 ‘희박한 공기 속으로'[1]의 저자 존 크라카우어의 다른 저서이다. 이전의 그의 저서를 인상깊게 봤기 때문에, 그의 다른 책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찾아서 읽어봤다.

이 책은 산악과 관련된 독립된 12가지 짧은 글들의 모음집이다. 각각의 글들은 저자 자신의 경험담도 있고, 주요 인물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나, 산악과 관련된 각종 이야기 등등이 포함된 다양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어 상당히 재미있다.

본인은 여태까지 원래 저자가 저널리스트인데 그냥 산에 오르는 건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고 원래 산악인이었는데 직업을 바꾸어 저널리스트가 된 것이었다. 어쩐지 평범한 작가가 에베레스트에 오를 리가 없지. ㅎ

두 번째 글에서 볼더링에서 최고의 명성을 쌓은 John Gill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볼더링이라는 스포츠가 있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일체의 장비없이 수 미터 높이의 돌 표면 위를 기어 올라가는 암벽등반이다. 매우 사소한 틈이나 거의 보이지 않는 요철을 적절히 조합한 작전을 잘 짜서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John Gill 이 사람은 수학자라고 한다. 수학계에서는 그리 명성이 높지 않은 듯 하지만, 여하간 볼더링에서 대가가 되었다고 하니 대단한 것 같다. 위키피디아를 대충 보니 전공은 복소해석학 쪽인 듯.

책 중간에 ‘오버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위키피디아를 찾아봤다. 절벽을 오를 때 중간에 툭 튀어나온 부분을 가리키는 듯.

11번째 글인 ‘K2에서 보낸 끔찍한 여름’에서는 1986년 K2 재난 당시 저자가 목격했거나 알려졌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난 직전에 대한산악연맹의 등정 성공에 대한 글이 잠시 나와있어 블로그에 인용[2]한 바 있다. 독서에 참고하기 바란다.

산악문학은 주로 감상적 내용들이 지나치게 많을 때가 있는데, 존 크라카우어의 글은 실제 사건을 따라 가거나 산악 관련 지식을 적절히 안배하여 독서의 재미를 좀 더 주는 것 같다. 등반에 관심이 있다면 볼만할 터이고, 꼭 등반에 관심이 없더라도 수필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그래도 볼만할 것이다.

 


[1] 내 백과사전 [서평] 희박한 공기 속으로 2012년 10월 14일
[2] 내 백과사전 1986년 대한산악연맹의 K2 등정 2014년 7월 2일

1986년 대한산악연맹의 K2 등정

일전에 소개한 ‘희박한 공기 속으로‘의 저자 존 크라카우어의 책인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의 중간에 1986년 한국인 최초로 K2의 등반에 성공한 대한산악연맹의 등정을 잠시 묘사하는 부분이 있어 발췌해 본다.

존 크라카우어 저/하호성 역,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 자음과 모음, 2006

p292-304

누구나 알고 있듯이 오늘날 고산 등반의 나아갈 방향은 1975년 여름에 제시되었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가 K2 바로 옆에 있는 봉우리인 8068미터의 가셔브룸 I봉을 무산소, 무지원에 고정로프도 쓰지 않고 알파인 스타일로 신 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한 것이다. 그들은 히말라야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방법인 극지법 – 루트 상에 차례대로 캠프를 미리 설치해 두는 방식 – 을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산을 올랐다. 메스너는 이 대담한 새 방식에 대해 ‘정당한 방법으로 오르는 등반’이라는 적절한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정당한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단 한 차례의 놀라운 등반을 통해 메스너와 하벨러는 고산등반의 기준을 매우 높게 끌어올려 놓았다. 처음에 메스너가 히말라야의 8000미터 고봉을 테톤과 알프스에서 행해지던 등반방식인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겠다고 발표했을 때, 세계의 일류 등반가들 대부분은 그의 계획은 절대 불가능하며 오직 자살 행위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메스너와 하벨러가 알파인 스타일로 가셔브룸 I 봉을 등정하고 난 뒤 고산 등반계의 영웅으로 떠오른 메스너의 권좌를 탈취하려는 계획을 가진 이들에게 남아있는 기회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산을, 메스너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방법’만을 사용한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는 것뿐이었다. 1986년에 K2 아래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있던 많은 등반가들 역시 바로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략)

1986년 여름, K2에 있던 원정대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 팀만이 등로주의나 알파인 스타일과 같은 새로운 등반 방식을 따르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적인 지원을 받아 K2의 한국 초등을 이루어 내기 위해 온 어마어마한 대규모 팀이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K2의 정상까지 어떻게 오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대원들 중 누군가가 정상에 선 뒤 무사히 다시 내려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태도였다. 전통적인 극지법을 따르던 그들은 무려 4500명의 포터를 고용해 작은 산을 이룰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장비와 식량을 베이스까지 옮겨왔고, 베이스캠프가 구축되고 나자 노멀 루트인 아브루찌 능선위로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고정로프와 물자가 가득 든 텐트를 연이어 설치해 가며 정상을 향해 착착 줄지어 나아갔다.

8월 3일 늦은 오후의 완벽한 날씨 속에서 세 명의 한국인들이 산소통을 이용해 K2 정상에 도달했다. 한국 팀 최초의 K2 등정이었다. 하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녹초가 돼 버린 폴란드인 두 명과 체코인 한 명에게 따라잡혔다. 그들은 한국 팀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극지법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무산소로 매직라인 – 카사로토(Renato Casarotto)와 두 명의 미국인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 의 초등을 막 이루어낸 참이었다. 어둠 속을 헤치며 두 팀이 함께 하산을 재촉하고 있던 도중 폴란드ㆍ체코 합동대의 대원 중 한 사람이던, 폴란드의 세계적인 등반가 보즈키에크 브로즈(Wojciech Wróż)가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산소 결핍과 피로로 인해 주의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경솔하게도 고정로프의 끝부분을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현수하강을 하고 있던 도중 로프 끝 부분이 그의 하강기에서 빠져 나가버렸고, 그는 그해 여름의 7번째 사망자가 되었다. 바로 다음 날 베이스캠프에서 짐을 나르고 있던 파키스탄인 포터 무함마드 알리(Muhammed Ali)가 낙석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사망자 수는 8명으로 늘어났다.

그해 여름 K2 베이스캠프에 있던 대부분의 유럽 팀들과 미국 팀들은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물량 공세를 비웃고 경멸했었다. 그들은 한국 팀이 아브루찌 능선을 올라가며 사용한 대규모 극지법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반 시즌이 점점 막바지에 다다가면서 죽음을 부르는 산 K2는 그들의 어깨를 마구 짓눌러댔다. 그리하여 자신은 등로주의와 알파인 스타일 원칙을 따른다고 거만하게 큰소리치던 등반가들 중 상당수가 은근슬쩍 자신들의 원칙을 버리고, 아브루찌 능선 위에 한국 팀이 설치해 둔 고정 로프나 사다리, 그리고 텐트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원정대가 등정에 실패하고 산에서 물러나고 있을 때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영국인 7명이 다시 한 번 독자적으로 K2를 오르기로 마음먹고서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 각자의 원정대들은 이미 등정에 실패하고 철수를 준비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아브루찌 능선 상에서 서로 느슨한 협력관계를 맺기로 합의했다. 한국 팀이 마지막 캠프에서 최후의 정상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동안, 임시로 결성된 이 특이한 다국적 팀은 K2의 하단 측면까지 올라섰다. 그들은 운행 속도가 제각각 틀렸을 뿐 아니라 일정한 등반선도 없이 아브루찌 능선 상에서 사방에 흩어져서 오르고 있었음에도 7명 모두 8000미터 지점에 설치되어 있던 4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때는 한국인들이 정상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7월 3일 (본인 주 – 실제로는 8월인데 저자의 오타로 추정)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날씨 속에서 한국 팀은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폴란드ㆍ오스트리아ㆍ영국 합동대의 7명 대원들은 어쩐 이유에서인지 정상 공격을 다음 날로 미루고 4캠프의 텐트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유는 확실치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다음 날인 7월 4일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이미 날씨는 악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초고리사 너머 남쪽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구름 기둥들이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좋지 않은 날씨가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어요. 모든 등반가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정상을 향한 발걸음을 계속 재촉하다가는 틀림없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K2의 정상이 바로 목전에 놓여 있다면, 등반가들은 쉽사리 등반을 포기하고 돌아설 수 없을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원정을 위해 들인 돈과 수고는 차치하고서라도 그토록 갈망하던 K2의 정상이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다면, 등반가들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고 도박을 감행하게 될 겁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이 이후로 이 다국적 팀의 1986년 재난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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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1]이 개봉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개봉하는 극장이 없다-_- 이런 젠장 영화보러 서울까지 가야하나…

영화 트레일러[2]를 대충보니 1970년 라인홀트 메스너의 그 등정을 영화화한 듯 하다. 이 등정에서 메스너와 그의 동생 권터 메스너가 히말라야 최악의 난이도중 하나로 손꼽히는 루팔 면(Rupal face)으로 등정하다가 사고로 권터가 생명을 잃는다.

낭가 파르밧은 라인홀트와 인연이 깊은 산인데, 영화로 나오는 이 등정은 라인홀트의 14좌 등정의 시발점이 되는 등정으로, 그로부터 16년 후에 그는 14좌를 세계 최초로 완등한 인물이 된다.

78년에는 그가 다시 낭가 파르밧을 단독등정하였는데, 8000미터급 산을 베이스 캠프에서 혼자 등정한 것은 이 등정이 최초이다. 이 등정을 책으로 쓴 것이 일전에 소개한 ‘검은 고독 흰 고독’(Die weiße Einsamkeit – Mein langer Weg zum Nanga Parbat)[3]인데, 얼마전에 개정판[4]으로 나왔다. 꽤 인상적인 책이니 함 보시라.

여하간 개봉하는 데가 없으니 승질나네… 트레일러[2]를 링크해본다. 재생시간 2분 23초

 


[1]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61815
[2] https://www.youtube.com/watch?v=mN03ML0wjn4
[3] http://zariski.egloos.com/2214110
[4] 라인홀트 메스너 저/김영도 역, “검은 고독 흰 고독“, 필로소픽, 2013

8000미터 14좌 등반 사망률(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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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지에 14좌의 등반사망률[1]이 올라와 있다.

얼마전에 알 자지라에서 80대 노인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정[2]했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다. 미우라 유이치로라는 사람인데, 위키피디아를 보니 에베레스트에 세 번이나 오른 전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자체로는 대단한 기록이긴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8000미터 고봉 14좌 중에서 등반가 대비 사망률이 비교적 낮은 축에 속하는 산이다. 2012년 3월까지의 기록으로 사망률이 가장 높은 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라는 의미의 안나푸르나인데, 정상에 도전한 243명 중 61명이 사망하여 거의 4명중 한명꼴로 사망한 셈이다. 안나푸르나는 14좌 중에서 인류에게 가장 먼저 정상을 허용한 산이지만 박영석 대장이 운명한 곳[3]이기도 하다.

 


2013.6.1
에베레스트 정상등정 60주년을 기념하여 알 자지라의 프로그램인 101 East에서 에베레스트 다큐멘터리를 방영[4]한 모양이다. 에베레스트에 사람 초 많네. 완전 시장 바닥이다. 켁. 영상 막판에 미우라 옹도 등장한다.

 


2016.8.8
Bodies left on Everest in imgur

 


[1] 이코노미스트 Stairway to heaven May 29th 2013, 14:52
[2] 알 자지라 Japanese octogenarian breaks Everest record 24 MAY 2013
[3] 내 백과사전 박영석과 안나푸르나 2011년 11월 5일
[4] 알 자지라 Everest 60th Anniversary 30 May 2013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