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수학 파피루스 10번 문제

모스크바 수학 파피루스린드 수학 파피루스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수학문제들을 모은 문서인데,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기원전 1850년 경 이집트 12왕조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모스크바에 소재한 푸시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듯?

모스크바 파피루스는 미지수를 ‘아하’라고 쓰는 등의 재치있는 모습이 들어 있는데, 재미와 분위기 환기를 위해, 현대 중등 수학 수업에서도 재미없는 미지수 x 보다는 가끔 ‘아하’ 같은 걸 써 보는 게 어떨까 싶다. ㅎㅎㅎ

개중에 10번째 문제는 어떤 입체도형의 겉넓이를 구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의 해석이 명확하지 않아서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Luca Miatello 선생의 글[1]에 설명이 잘 돼 있던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1]

본인이 알기로 히에로글리프는 아랍어와 마찬가지로 자음밖에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원발음은 알 수 없다. ‘ctrl’을 ‘컨트롤’이라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당대 사람들은 자음만 써놔도 쉽게 읽을 수 있었겠지만, 현대인으로서는 골때리는 문제가 된다. ㅋㅋ 이것을 로마자로 음차한 것과 현대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1]

여기사 가장 골때리는 부분이 nb.t인데, 이 단어는 다른 어떤 수학 문서에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불명하다. Vasily Struve 선생은 이 단어가 반구(hemisphere)라는 가설을 밀었고, T. Eric Peet 선생은 이 단어가 절반이 잘린 원기둥이라는 가설을 밀었던 모양이다. ㅎㅎ 여러가지 의견[2]이 나오는 모양인데, 더 많은 문서가 발굴되지 않는 이상, 판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별 영양가 없는 내용인데, 조사한게 아까워서 걍 포스팅해봤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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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atello, L. (2013). “Problem 10 of the Moscow Mathematical Papyrus: Corrupted Part or Technicality?“, Göttinger Miszellen 237 (2013), 55-70. Göttinger Miszellen.
[2] “A new interpretation of Problem 10 of the Moscow Mathematical Papyrus”, Leon Cooper, Historia Mathematica Volume 37, Issue 1, February 2010, Pages 11-27 https://doi.org/10.1016/j.hm.2009.05.001

비트겐슈타인이 수학문제를 생각하며 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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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책을 검색해보니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1;p51]에 있는 내용이라고 한다. 검색해보니 역서[2]가 있던데, 이미 품절된지 오래 된 듯. 아놔 빨랑 품절걱정이 없는 전자책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이걸 보니 일전에 수학조크[3]에서 구구단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무래도 비트겐슈타인 이야기가 와전된 게 아닐까 싶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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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ow to Read Lacan (How to Read) Paperback – January 17, 2007 (amazon.com)
[2] HOW TO READ 라캉 슬라보예 지젝 (지은이),박정수 (옮긴이) 웅진지식하우스 2007-05-14 원제 : HOW TO READ Lacan (2005년)
[3] 내 백과사전 수학 조크 2011년 5월 29일

“발산하는 무한급수는 악마의 발명품”

페북에서 이런 개그[1]를 봤다.

1828년 아벨 선생이 이르기를 : “발산하는 무한급수는 악마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어떤 증명이든 이를 사용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 세기 후…

ㅋㅋㅋㅋㅋ 이건 일전에 이야기[2]한 1+2+3+4+ … = -1/12인데, 이 등식이 은근 컬트적인 인기가 있어서-_- 페북에 Negative 1/12 memes라는 페이지[3]도 생겼다. ㅎㅎㅎ

여하간 인터넷에 떠도는 quotation 중에서 구라가 너무 많기 때문에, 진짜인지 검색을 좀 해 봤다. 역시나 math stackexchange에 누가 한 대답[4]이 있었다. 댓글에 원문은 노르웨이어라고 하는데, 진짜인지는 불명하다. 여하간 불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장이 알려져 있는 듯 하다.[4,5] devil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shameful이라는 언급은 있는 듯…. 역시나 그럼 그렇지. ㅋㅋ 근데 있었으면 웃겼을 텐데 아쉽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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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2098480146937193
[2] 내 백과사전 1+2+3+4+… = -1/12 2014년 1월 13일
[3] https://www.facebook.com/Negative1Over12MemesForNonDifferentiableTeens/
[4] Abel’s famous “devil quote” (math.stackexchange.com)
[5] Christiane Rousseau, “Divergent series: past, present, future”, arXiv:1312.5712 [math.DS]

‘유씨구고술요도해’의 한 페이지 해설

유씨구고술요도해(劉氏勾股述要圖解)는 조선후기 천문역법학자인 남병길이 저술한 책이다. 그 중 한 페이지를 사단법인 전국수학교사모임 회지에서 설명[1]하고 있어 이를 옮겨 둔다. 본 내용 자체는 구 블로그에 있던 내용을 재구성함.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조선시대에는 ‘구고술’이라 불렀기 때문에, 책 제목 자체는 ‘그림이 첨부된 유씨의 피타고라스 정리 해설’ 정도의 의미 같다. 책 제목에 ‘유씨’가 붙은 이유는 남병길 자신도 스스로 창안한 내용이 아니라 ‘유씨’의 저작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2] 유씨는 유수석(劉壽錫)이라고 추측된다. 유수석은 1713년 5월 29일 조선을 방문중이었던 중국의 산학자인 하국주의 수학문답에 홍정하와 함께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의령’은 남병길의 본관이라고 함.

劉氏勾股述要圖解 宜寧 南秉吉 圖解
유씨구고술요도해 의령 남병길 도해
그림이 첨부된 유씨의 피타고라스 정리 해설. 의령 남병길이 그림을 넣음.

勾六十七尺二寸股七十五尺四寸問弦
구육십칠척이촌고칠십오척사촌문현
구가 67척 2촌이고, 고가 75척 4촌인 구고의 현은 얼마인가? (밑변의 길이가 67.2이고, 높이가 75.4인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길이는 얼마인가?)

答弦一百零一尺
답현일백영일척
답은 101척이다. (672, 754, 1010은 피타고라스 트리플임)

術曰勾股相乘倍之加入勾股差自乘爲實平方除卽弦
술왈구고상승배지가입구고차자승위실평방제즉현
풀이에 이르기를, 구와 고를 서로 곱한 후 그것의 2배에서 구고의 차를 제곱하여 더하라. 이때 얻어진 값의 양의 제곱근이 현이 된다. (요즘 말로 하면 \sqrt{2ab +(a-b)^2} = \sqrt{a^2 +b^2})

古法曰勾股各自乘倂之平方除卽弦
고법왈구고각자승병지평방제즉현
옛방법에 이르기를, 구와 고를 각각 제곱하여 더한 후 제곱근을 구하면 현이 된다. (요즘 말로 하면 직각을 낀 두 변의 제곱의 합의 제곱근은 빗변이다.)

圖解甲乙丙丁爲弦自乘方內容甲戊乙乙己丙丙庚丁丁辛甲四勾股積卽勾股相乘積二段戊己庚辛一勾股差自乘方故勾股相乘積倍之又加勾股差自乘積爲弦自乘積也
도해갑을병정위현자승방내용갑무을을기병병경정정신갑사구고적즉구고상승적이단무기경신일구고차자승방고구고상승적배지우가구고차자승적위현자승적야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에서 정사각형 갑을병정의 넓이는 현의 제곱과 같다. 정사각형 모양 안에는 4개의 직각삼각형 갑무을, 을사병, 병경정, 정신갑이 있다. 이 4개의 직각삼각형의 녋이는 구와 고를 곱한 것의 2배(직각삼각형 4개를 모으면 2개의 직사각형 모양이 된다) 이다. 또 정사각형 무기경신의 넓이는 구고의 차를 제곱한 것과 같다. 따라서 구와 고를 곱하여 그 2배한 것에 구고의 차를 제곱한 것을 더하면 현의 제곱이 된다.

이런걸 보면 현대의 대수적 표현법이 얼마나 강력한 표기법인지 새삼느끼게 된다. 문장으로 방정식을 풀고 인수분해를 하는 것의 난해함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남병길은 1820년에 출생하여 1869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위 내용은 1850~60년대 근방에 쓰여진 것이 아닐까 싶다. 1869년 하버드 입시문제[3]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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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단법인 전국수학교사모임, “수학과 교육”, 통권67호, 2008년 3/4월호
[2] 유씨구고술요도해(劉氏勾股述要圖解) (encykorea.aks.ac.kr)
[3] 내 백과사전 1869년 Harvard 입학시험문제 2011년 4월 12일

프랑스에서는 수학자가 정치가가 될 때도 있다 : Paul Painlevé

제목을 보고 얼마전에 국회의원에 당선된[1] 필즈상 수상자 Cédric Villani를 연상하시겠지만, 아쉽게도 이번 포스트는 수학자 Paul Painlevé에 대한 내용이다. ㅋㅋㅋ

사실 나도 누군지 몰랐는데, Mathpresso 블로그[2]를 보고 알게 된 수학자임. ㅎ 그는 프랑스 제 3공화국 당시 수상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고 한다. 수상까지 했다니 영향력이 적은 정치인이라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위키피디아를 대충보니-_- 그의 수학적 업적은 미분방정식을 푸는 테크닉 쪽으로 있는 듯 하다. 특히나 n체 문제에 관해서 그의 이름이 붙은 추측이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Painlevé conjecture는 이러한 문제다. 중력장을 만드는 n개의 물체가 상호 중력 작용을 할 때, 유한한 시간내에 항상 두 물체가 충돌(collision singularity)하는지, 아니면 영원히 충돌하지 않는 초기 상태(noncollision singularities)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추측이다. 물론 n개의 물체는 크기가 없는 점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 Painlevé는 n=3일 때 해결하였고, n이 5보다 큰 경우는 여러 수학자들에 의해 해결한 모양인데, n=4인 경우만 아직 미해결이라고 한다. n이 클 수록 더 어려운거 아닌가??? 초 신박하네-_- n=2일 때는 태양-지구 처럼 돌면되니까 자명한 듯 하다. ㅋ

위키를 보니 일반 상대성이론과 관련해서도 업적이 있는 듯 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좌표계가 있는데, 본인이 물리학에 까막눈이라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음. ㅋ

정치인으로서는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전쟁 장관으로 활약하고, 1917년에 수상을 한 번 역임한다. 이후 전간기인 1924년 대통령에도 출마해는데 낙선했다고 한다. 1925년 4월 프랑스 프랑의 금융위기 발발로 Édouard Herriot가 사퇴하고,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수상이 되었는데, 금융위기 수습을 잘 하지 못해서 11월에 사퇴한 모양이다. 프랑스 정치사는 잘 모르니 이쪽은 패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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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4
황금 족쇄 –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배리 아이켄그린 (지은이), 박복영 (옮긴이) | 미지북스 | 2016-12-10 | 원제 Golden Fetters: The Gold Standard and the Great Depression, 1919-1939 (1992년)

p302-306

1924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된 세금 인상은 좌파의 재정 부담을 증가시켰다. 1924년 총선에서 국민연합이 권력을 잃은 이후에 중도 좌파 정당들이 에리오 내각을 구성했을 때, 그들은 재정 부담을 다른 곳으로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에리오는 효과적인 경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넓은 허리둘레 못지않게 폭넓은 문화적 취향을 가졌던 에리오는 불행히도 경제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거의 없었다. 그의 재정 담당 장관들은 재정 부담을 다른 곳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지지를 하나같이 얻지 못했다. 불확실성이 일상처럼 되었다. 에리오 내각의 초대 재무부 장관이었던 에티엔 클레망텔은 국민연합이 소득세 개혁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도 총세수 대비 간접세 비중을 1913년보다 높여 놓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자신의 재정 개혁안을 마련했다. 카르텔, 즉 좌파연합을 지지하는 몇몇 정당들은 식품과 기타 필수품은 거래세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클레망텔의 1925년 예산안은 직접세 인상과 소비세 감축을 담고 있었다.65 재무부 장관 개인은 회의적이었지만 자본세가 새 정부의 공식 정책이 되었다.

자본세와 관련하여 내각은 모든 재산에 대해 10%를 과세하고 이를 10년에 걸쳐 납부하도록 하는 안을 선호했다. 이런 안은 투자자 들이 돈을 국외로 빼돌릴 확실한 유인을 제공했다. 이 자본세를 공식 정부 정책의 지위로 격상시킨 1925년 4월의 금융 프로젝트는 금융 불안정의 재발과 시기상으로 일치했다. 부동산보다는 국방채를 처분하는 것이 더 쉬웠다.66 일부 투자자들이 자산을 국외로 일단 이전시키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할 유인이 금방 생겼다. 자본 도피는 자본세의 기반을 흔들었는데, 남아 있는 재산에 대해 인상된 세율이 적용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은행 밖에 늘어선 줄 때문에 유발되는 예금 인출 사태처럼 국방채시장에서의 이탈도 자본 도피 소식 때문에 유발되었다.67

결국 ‘좌파연합’은 자본세 부과에 필요한 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68 연립정부에 참여한 정당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이 나뉘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특히 논란이 된 그런 정치적 어려움과 다수 의석의 불확실성 때문에 정부는 신규 차입이나 긴축 혹은 과세에 관한 어떤 계획도 완수할 수 없었다.”69

재정정책의 불확실성은 또다시 정점에 이르렀다. 1925년에 재무부 장관이 계속 교체되었지만,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클레망텔은 소득세에 초점을 맞춘 자신의 제안이 내각에서 거부되자 그해 4월에 장관직을 사임했다. 내각은 좌파연합에 속한 사회당이 줄곧 주장한 자본세를 더 선호했다. 그의 후임자인 드 몽지에는 반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본세를 강제 대출로 바꾸었지만 도입에는 실패했다. 에리오가 상원에 의해 축출된 후, 폴 팽르베가 새 정부를 구성했다. 재무부 장관으로 복귀한 카요는 자본세에는 반대했지만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없었다.70 팽르베는 중도파가 선호하는 소득세와 좌파가 선호하는 자본세를 모두 도입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산업계와 우파 정당들의 반대로 채택이 무산됐다. 다시 정부가 와해되었다. 루이 루셰르는 특별 상속 및 증여세와 부동산 거래세 인상에 초점을 맞춘 안을 제시했다. 의회 재정위원회는 5일간의 논의 끝에 이 제안을 거부했다. 폴 두메르는 거래세를 활용하는 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세금을 증권 거래와 연계시켜 좌파의 지지를 끌어낼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 무렵 “포트폴리오의 왈츠”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1926년 전반기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불확실성으로 금융 시장이 파탄에 이르렀다. 모든 경제 집단이 각자 증세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며 자산 도피처를 찾았다. 이자 소득자들이 국방채 갱신을 중단했고, 그 결과로 추가 화폐화가 불가피했다. 예금자들이 자금을 국외로 빼돌렸고, 그 결과로 환율이 절하되었다. 좌파연합은 금융 혼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자본세 도입을 담고 있는 특정한 제안들을 통제했지만, 1926년 7월에도 자본세는 여전히 좌파 재정 프로그램의 핵심 요소로 널리 인식되었다.71 초인플레이션의 유령이 어른거렸다. 『뉴욕 선』은 7월 21일자에서 “지금 프랑스 전역이 불안으로 떨고 있다”고 전했다.72

결국 위기가 이 정체 상황을 타개했다. 러셀 레핑웰은 1925년 7월 18일에 모건은행의 동료 토머스 라몬트에게, “나는 지금 프랑스 전 국민이 불안정한 통화에 너무 지쳐 건전한 재정 원칙의 채택을 환영하고 진심으로 지지할 것이라는데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네”라고 편지를 보냈다.73 레핑웰의 낙관적 시각이 시기상조였을 수는 있지만, 1926년 여름 무렵에는 그가 예상한 태도 변화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중도 좌파 의원들 중 점점 더 많은 수가 금융 불안정의 비용이 결국 자본 과세를 통한 사회 ‘개혁의 이득을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금과 교사 월급의 인상을 밀어붙이려고 했던 이들의 시도는 인플레이션으로 이미 좌절되었다.

급진사회당 의원이자 경제 전문가인, 베르트랑 노가로Bertrand Nogaro는 좌파 반란의 주도자였다. 그는 통화 안정의 회복이 사회 개혁에 필요한 전제조건아라고 주장했다. 저명한 전직 은행가인 자크 뒤부앵Jacques Duboin과 함께, 그는 금융 안정화를 추진할 10여 명의 중도 좌파 의원들 모임을 결성했다. 1926년 중순경에는 상당수의 다른 중도 좌파 의원들의 지지도 얻었는데, 이들은 당 지도부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7월경에 그 수는 70명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이 집단은 위기의 절정기에 구성된 에리오 정부를 와해시키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국민연합의 2차 내각 형성과, 확고한 자본세 반대론자인 푸앵카레의 복귀가 가능해졌다. 이 의원들 중 많은 수는 1924년 선거 운동에서 푸앵카레의 금융정책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 후 2년간의 금융 혼란을 겪으면서 이들은 재정을 둘러싼 소모전을 끝내기 위해 자신들의 입장을 뒤집은 것 이다.

결과는 그 이상 극적일 수 없었다. 의회는 푸앵카레에게 일방적 금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했다. 금융에 관한 의사 결정은 일시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사실상 분리되었다. 푸앵카레는 예산 상황을 강화하기 위해 간접세를 인상하고 지출을 삭감했다. 금융 안정으로의 극적인 복귀가 이런 정책의 도입과 때를 같이했기 때문에, 이런 조치들의 영향력이 다소 과장되었다.74 사실 예산은 이미 균형에 가까운 상태였으며, 새로운 세금이 재정 수입 확대에 기여한 부분은 크지 않았다. 의회의 전권 부여를 통한 조세 개혁이 갖는 의미는, 간접세와 보통 수준의 소득세를 지지하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자본세 도입의 우려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피 자본은 복귀했으며 전쟁채시장은 안정을 되찾았다. 물가도 다시 안정 되었다.75

 


65. Haig, Robert Murray (1929), The Public Finances of Post-War Franc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03쪽.

66. 국방채 투자자들은 상환 연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1개월에서 6개월 후 만기의 국방채를 담보로 돈을 차입하려고 했다. Commercial and Financial Chronicle (July 24,1926), 404쪽. Meynial, P. (1927), “La Balance des Comptes,” Revue d’Économie Politique 41, pp.271-289은 자본 도피 규모에 대한 추정치를 제시하고 있다.

67. Eaton, Jonathan (1987), “Public Debt Guarantees and Private Capital Flight,” World Bank Economic Review 1, pp.377-399과 Alesina, Alberto, Alessandro Prati, and Guido Tebellini (1990), “Debt Management and Debt Panics in Italy,” in Rudiger Dornbusch and Mario Dragi (eds.), Public Debt Management: Theory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94-117는 이 과정을 모델로 만들었다.

68. 엘리노어 덜레스(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179쪽)가 말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그룹은 의회에서 분명하고 지속적인 다수 의석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강력하고 일관된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Peel, George (1937), The Economic Policy of France, London: Macmillan and co. 128쪽과 Hermens, F. A. (1941) Democracy or Anarchy? A Study of Proportional Representation,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28쪽을 참고하라.

69. Dulles (1929), 192쪽. 유사한 분석을 하고 있는 Schmid, Gregory C. (1974), “The Politics of Currency Stabilization: The French Franc, 1926,” Journal of European Economic History 3, pp.359-377도 참고하라.

70. 재무부 장관 카요는 1926년 7월 8일 의회에서 “자본세 도입에 단호히 반대하며 자본세가 다른 어떤 조치보다도 더 심각한 인플레이션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Commercial and Financial Chronicle (July 10, 1926), 151 쪽.

71. 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195쪽. 벤저민 스트롱은 자신의 유럽 여행을 알리며 5월 중 순에 조지 해리슨 앞으로 보낸 한 편지에서, 기존 정부를 축출하고 에리오 정부를 지지할 수 있다는 프랑스인들의 공포에 대해 언급했다. “에리오 정부는 자본세를 강력히 옹호하는 블룸 분파(레옹 블룸을 대표로 한 프랑스 사회당을 가르킴一옮긴이)의 지지를 확실히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상황이 악화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프랑스인들은 경악할 것이고 그러면 프랑으로부터의 도피가 지금보다도 훨씬 심각해질 것이다.” FRBNY (Strong Papers), Strong to Harrison, 15 May 1926.

72. Commercial and Financial Chronicle (July 24,1926), 404쪽에서 재인용.

73. Lamont Papers 103-111, Leffingwell to Lamont, 18 July 1926, 3쪽.

74. 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Yeager, Leland and Associates (1981), Experiences with Stopping Inflation, Washinton, D. C.: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Sargent, Thomas (1986b), “Stopping Moderate Inflations: The Methods of Poincaré and Thatcher,” in Thomas Sargent, Rational Expectations and Inflation, New York: Harper and Row, pp.110-157 등은 큰 폭의 세금 인상이 재정 적자를 해소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Makinen, Gail E. and Thomas G. Woodward (1989), “Some Sadly Neglected Monetary Aspects of the Poincaré Stabilization,” Southern Economic Journal 56, pp.191-211는 이런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75. “푸앵카레 국민연합 내각의 수립 이후 프랑 포지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면서 도피 자본의 복귀와 외국의 투자 증가가 모두 나타나 해외로부터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었다.” Rogers, James Harvey (1929) The Process of Inflation in France 1914-1927,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7쪽. 예산 적자 해소를 위한 보조적 역할이 없다면, 위기에 대한 이런 설명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수년 후 결제 계정에서 예산이 균형을 이루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1929년에도 엘리노어 덜레스는 “1925년 적자 규모는 여러 측면에서 1924년 규모에 비해 훨씬 더 불명확하다”(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380쪽)고 기록했다. 당시의 추정에 따르면 상당한 규모의 적자가 예상되었다. 결국 1925년 11월 팽르베는 사임을 하게 되는데, 이는 상당한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 되는 상황에서 소득세 인상이나 자본세 도입을 의회가 거부한데 대해 낙담했기 때문이다. 예산 적자의 화폐화를 예상하던 투자자들은 당시와 예산 전망에 반응한 것이지, 수년 동안 알 수 없었던 결제 계좌에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예산 상황에 대한 가용한 정보에 따르면,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급박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금융 위기가 그렇게 심각했던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전간기 당시 Painlevé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언급이 나오길래 인용해봄. 1925년은 금융위기라기 보다는 자본세 도피로 인한 환율불안정과 인플레이션이라고 봐야 할 듯 하다. 그리고 참고로 이 글에 등장하는 푸앵카레는 물론 그 유명한 수학자가 아니라 그 사촌인 정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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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필즈상 수상자 Cédric Villani의 최근 행보 2018년 4월 9일
[2] Paul Painlevé, a french mathematician and politician (mathpresso.wordpress.com)

수학자 John Rainwater

간만에 futility closet 블로그[1]를 보니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John Rainwater라는 수학자는 현재까지 10편의 논문을 쓰고, 가장 많이 인용된 것은 19회에 이르지만, 이 사람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2]

1952년 워싱턴 대학의 Nick Massey라는 수학과 대학원생 학생은 전산상의 실수로 빈 학생증을 받게 되었는데, 그 당시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어서 Rainwater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ㅋㅋㅋ 이 가상의 인물의 설정에 다른 학생들도 동참하여, 숙제도 꼬박꼬박 제출하였는데, 결국 그 학기 중간고사 시험을 칠 때 Arsove 교수에게 발각이 된 모양이다. Arsove 교수는 John Rainwater의 이름으로 발송한 폭발하는 만년필-_-을 받았어도, 대인배스럽게 그냥 넘어가준 모양이다. ㅋㅋ

수 년 후에 수학과 대학원생 그룹이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 문제들을 풀면서 John Rainwater의 이름으로 풀이를 송신한 모양인데, 이를 보고 MAA 측에서 MAA의 회원으로 가입하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다른 회원 두 명의 추천이 있어야 했는데, 가장 이상적인 추천인으로 당시 수학과 학장이자 MAA 회장인 Carl Allendoerfer의 추천을 받는 것이 가장 좋았지만, Allendoerfer는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다. ㅋㅋㅋㅋ 그리하여 바쁘신 학장 대신에 학장의 비서를 설득하여 문서 위조-_-를 감행했다고 한다. ㅋㅋㅋ

보니까 한동안 John Rainwater의 이름으로 논문도 나오고, 그의 이름을 단 세미나도 개최되었던 모양인데, 일부 논문은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 모호한 채로 남아있는 듯 하다.

다른 학술 분야는 모르겠는데, 익명 수학자 집단이 가상의 인물로 논문이나 책을 쓰는 사례는 니콜라 부르바키와 같은 다른 사례도 있으니, 아주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ㅎㅎ 그러나 재미로 인물을 만들어서 그런 설정(?)에 집단적으로 동참하고, 또 그런 전통이 이어지는 걸 보면, 이 사람들이 나름 유쾌한 사람들인 것 같긴 하다. ㅎㅎㅎ

 


[1] The Empty Set (futilitycloset.com)
[2] Biography of John Rainwater (at.yorku.ca)

기하(幾何)의 어원에 대해

‘국보’ 양주동 선생의 수필 중에 『몇 어찌』라는 수필[1]이 있다. 한학을 통달하여 세상 모르는 한문이 없던 그에게 ‘幾’자와 ‘何’자가 붙은 기괴한 단어의 의미를 도통 알 수 없어, 수 일동안 고민을 하고 기하학의 논증과 체계를 익힌 이후에, 그가 서구의 학문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幾何가 여태 geometry의 음차로 알려져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일본어 위키피디아를 보니 이것이 아니라는 주장[2]이 있다고 한다. 원문이 일본어라서 번역을 시도해 봤는데, 일본어 실력도 딸리고-_- 음운론에 대해서는 일자 무식이고 IPA도 모르다보니 힘들어서 번역하다가 접었다-_-

써 놓은 부분은 아까워서 걍 올려본다. ㅋ 원문을 읽고 싶은 분들은 [2]에서 무료로 pdf를 받을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서는 DOI 대신에 국립정보학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CiNii라는 문헌 코드번호를 쓰는 것 같다. NII 코드 번호로 문서를 검색해 볼 수 있는 사이트[3]도 있다.

만주어 자료에서 본 「기하」의 어원에 대해

0 시작하며
「기하」는 geometria의 접두어인 geo-를 음차한 것이라는 설이 예로부터 널리 퍼져 있다. 이 속설은 발음으로 봐도, 의미로 봐도 착오가 있다. 이 논증은 중국학의 기본적인 훈련을 받아보면 어렵지 않다. 또, 그 시기의 기본적 논점은 이미 알려져 있어서, 예를 들면, 명말청초 당시에 Euclid 『원론』을 들여온 P. Engelfriet의 방대한 저서 중에도 보인다.(1) 그러나 이런 주장은 중국학 연구자 이외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고, 또, 과학사 연구자가 저술한 논증에는, 어원학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번잡하긴 하지만, 여기서는 속설이 잘못된 점에 대해 이유를 다시금 상세히 제시하고자 한다. 수학 교과서나 대중서를 쓰려는 사람들은 특히, 이하의 논설을 유의한 후에, 속설이 확대 재생산되는 일이 없기를, 필자는 희망하는 바이다.

이 글의 구성을 설명한다. 먼저 제1절에서 16~18세기의 중국어와 만주어의 음성에 관해서 과거 여러 연구를 바탕으로, 「기하」가 geometria의 음역일 수 없음을 논증한다. 제2절에서, 명말청초 예수회에서 저술한 한문ㆍ만주문 문헌을 바탕으로 「기하」는 명말청초 당시에 geometria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한다. 제3절에서, 19세기 전반에서 중엽까지 프로테스탄트계 선교사가 저술한 대수의 영어-중국어 사전을 바탕으로 「기하」가 geometria를 의미한다는 말이라고 이해를 한 경위를 개괄한다. 이 절의 내용은 강연 이후에 추가된 내용이다. 그리고 결론으로 속설의 발생한 시기와 유포자에 대한 추측을 서술한다.

1. 음성
17세기 당시 「幾」자의 공식 발음 (말하자면 관화음(官話音))과, 예수회의 geometria의 발음 사이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먼저 「幾」자의 발음을 고찰하고, 다음으로 geometria의 발음을 고찰한다.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중국어 음운에 대한 용어를 서술해 둔다. 중국어 1음절은 일반적으로 (CV)V(S) 인 모양을 하고 있다. 여기서 V는 모음이고, C는 자음이고, S는 모음 또는 자음이다. 「()」으로 묶인 음은 생략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 하나의 음절 (CV)V(S)를 (C)+(V)V(S)로 두 부분으로 분해하여, 앞부분 자음 (C)를 성모(声母)

(포기함 ㅋ)

한편, 수학용어의 function은 한국에서 함수(函數), 중국에서 函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유독 일본만은 関数로 쓰고 있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세기에는 일본도 函數를 썼다고 한다. 20세기 일본한자 개혁과정에서 사용한자의 종류를 줄이는 노력을 하면서 발음이 같은 関으로 변경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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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26
https://www.facebook.com/groups/873505182704923/permalink/1867486359973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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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
기하의 어원 (udaqueness.blog)

 


[1] http://zariski.egloos.com/1259922
[2] 渡辺 純成, “満洲語資料からみた「幾何」の語源について (数学史の研究)”, 数理解析研究所講究録, 1444, p34-42, NII Article ID : 110001374083
[3] https://ci.nii.ac.jp/

Bakhshali manuscript : 기호 0이 사용된 가장 오래된 문서

archaeology 매거진의 기사[1]를 보니 Bakhshali manuscript의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이전에 내용상으로 추정한 것 보다 500년이나 과거인 3~4세기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문서의 내용이 은근 난이도가 있는 편인 모양인데,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등비수열, 연립방정식, 2차방정식, 부정방정식 등의 내용이 있다고 한다. 대충 국내 교육과정에 중3~고1 수학 정도의 내용에 해당한다. 헐… 근데 연대 차이가 많이 나는 다른 페이지와 섞여 있다고 하는데, 이유는 알 수가 없는 듯.

지금이야 미지수, 제곱 등의 편리한 수식기호가 많고 대수 공식들(곱셈/인수분해 공식)이 잘 발달되어 있어, 고대 문제들이 쉽게 보일지 모르지만, 고대에는 그런 계산들을 문장형 (어떤 수와 그 수의 곱에 다시 처음 수의 두 배를 더하고…-_-)으로 방정식을 인식했기 때문에 간단한 방정식도 열라 풀기 빡세다. 본인은 산스크리트어를 모르긴 하지만, Bakhshali manuscript의 내용도 아마 그런 식일 듯 하다.

이 문서에는 영을 의미하는 기호인 중앙의 검은 점이 쓰이는 모양인데, 이번에 연대 추정이 바뀌면서 아라비아 숫자(다들 아시겠지만 인도에서 발명된 기호)로서 영을 의미하는 기호가 최초로 사용된 문서가 되었다 한다. 그 전에는 9세기 Gwalior Fort의 사원 바닥에서 발견된 문자가 최초였다. 물론 여기서 영을 의미하는 기호를 쓰는 것 자체는 이보다 오래된 고대 마야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도 이미 있었는데, 현재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아라비아 숫자 기호 ‘0’의 기원이 되는 기호로서 최초라는 말이다.

과거 수많은 핵실험[2]들 때문에 대기중의 방사성 원소의 농도가 급증하는 바람에,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고려해야 할 점이 여러가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테크닉이 동원되는 모양인데, Sheridan Bowman의 책[3]을 번역한 책[4]을 일전에 읽어봤는데, 그 방법이 잘 설명 돼 있다. ㅋ 근데 이 책을 내가 어디 놔 뒀는지 보이질 않네…-_-

 


[1] archaeology New Dates Push Back Use of Zero Thursday, September 14, 2017
[2] 내 백과사전 역대 국가별 핵실험 회수 2013년 2월 13일
[3] Bowman, Sheridan (1995) [1990]. Radiocarbon Dating. London: British Museum Press. ISBN 0-7141-2047-2.
[4] 셰리든 보먼 저, 이선복 역,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사회평론아카데미, 2014

원뿔 곡선 저항운동

일전에 엘렌버그 선생의 책[1]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엘렌버그 선생은 뭔가 잡다한 지식이 많은 사람 같다. ㅋ 엘렌버그 선생의 구글 플러스를 보니 흥미로운 위키피디아 항목 Conic Sections Rebellion이 소개[2]되어 있다. ㅋ 이 이야기에 대해 Mental Floss의 글[3]도 참고할만 하다.

1825~1830년의 예일 대학교에서는 기하학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직접 그림을 안 그렸던 모양인데, 그냥 ‘교과서 어디의 무슨 그림’ 이런 식으로 레퍼런스 방식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심지어 시험에서조차 학생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칠판이라는 새로운 첨단(?) 수업 방식이 도입되면서, 수학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칠판에 직접 기하학 그림을 그리도록 강제했던 모양인데, 특히 원뿔 곡선과 같은 수업에서 학생들의 반감이 심했던 모양이다.

예일 대학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집단으로 수학 기말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일부는 퇴학당하고 상당수가 정학을 먹는 꽤 반항적인 집단 운동이었던 같다. ㅋㅋ 위키피디아 항목을 보니 당시 정학 당한 사람들 중에 훗날 유명인사가 될 인물이 꽤 많았던 것 같다. (뭐 예일이니까-_-) 원뿔곡선은 우리 고교과정에서도 다루는 내용인데, 현대 한국의 고교생들에게는 눈꼽만큼도 공감이 안 갈 학생운동일 것 같다. ㅋㅋㅋㅋ

 


[1] 내 백과사전 [서평] 틀리지 않는 법 – 수학적 사고의 힘 2016년 8월 13일
[2] https://plus.google.com/107909926350520444591/posts/eKFkyGYBQ4A
[3] The Yale Chalkboard Rebellion of 1830 in Mental Fl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