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벽화에서 나타나는 고대인의 자폐증?

popular archaeology 기사[1]를 보니 흥미로운 논문[2]이 소개되어 있다. 고고학과 미술과 정신의학에 모두 관심이 있는 본인으로서는 흥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구만. ㅋㅋㅋㅋ

3만년 전후의 기간에 유럽 동굴벽화에는 갑작스러운 사실주의의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사진을 자주보는 현대인에게는 사실주의 화풍에 별다른 감흥이 없을 듯 하지만, 고대인에게는 꽤나 임팩트가 있는 그림일 것이라 생각한다. 일전에 Raphaella Spence의 작품[3]이나 Pedro Campos의 작품[4]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마 현대인이 이런 작품을 보며 드는 느낌이 고대인이 사실주의 작품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ㅋㅋㅋ

여하간 3만년 전후의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 이유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모양인데, 이것을 고대인의 자폐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는 모양이다. 일전에 올리버 색스 선생의 저서를 인용한 적[5]이 있었는데, 말미에 잠시 나디아 이야기가 나온다. 나디아는 서번트 신드롬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언급되는 사례인데, 나디아가 5살에 그렸다는 그림과, 일반적으로 5세 어린이가 그린 그림과의 비교가 논문[2;p271]에 들어 있다.

서번트 신드롬은 분류에 따라서 고기능 자폐,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도 부르는데, 각각의 차이는 나도 정확히 잘 모르겠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학술적인 논쟁이 좀 있는 듯… 여하간 이런 종류의 자폐아는 일전에 어느 자폐아가 쓴 시[6]에서도 볼 수 있지만, 특정분야에서 조숙하고, 디테일을 무척 신경쓰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여하간 논문[2]의 저자는 동굴벽화의 이런 화풍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자폐로 보는 듯 한데, 술먹고 읽어서 그런지 논거의 핵심이 잘 이해는 안 되네-_- 여하간 나디아의 사례를 꺼내는 건 좀 에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디아는 자주 언급되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구만.

추가로, 고대 증거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증거의 손실 때문에 실제로 갑작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고생물학의 유명한 경구를 여기서 들자면,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실제로는 서서히 일어난 변화가 갑작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ㅎㅎ

몰랐는데, 검색해보니 나디아는 지난 2015년에 4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7]고 한다. 자폐증의 몰이해의 시기에 태어나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좀 짠하다.

 


[1] popular archaeology How our ancestors with autistic traits led a revolution in Ice Age art Tue, May 15, 2018
[2] Penny Spikins, Callum Scott, Barry Wright, “How Do We Explain ‛Autistic Traits’ in European Upper Palaeolithic Art?”, Open Archaeology, Volume 4, Issue 1, Published Online: 2018-05-12 DOI: https://doi.org/10.1515/opar-2018-0016
[3] 내 백과사전 Raphaella Spence의 작품 2014년 3월 5일
[4] 내 백과사전 Pedro Campos의 작품 2012년 5월 21일
[5] 내 백과사전 숫자가 보이는 사람 2012년 5월 17일
[6] 내 백과사전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10살 어린이의 시 2016년 4월 17일
[7] the guardian Nadia Chomyn obituary Wed 9 Dec 2015 12.57 GMT

고고학의 두 문화(two cultures)

The Two Cultures라는 C. P. Snow 선생의 대단히 유명한 에세이가 있다. 뭐 대부분 아실 듯 싶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문과 지식인-_-과 이과 지식인-_-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몰이해 및 나아가 양 집단 사이의 반목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근데 제대로 요약한 거 맞나-_-?

여하간 네이쳐 기사에 고고학계에 존재하는 두 문화의 반목에 대한 기사[1]를 봤는데, 고고학과 생물학 양쪽에 관심이 있는 본인으로서는 나름 흥미롭다. ㅋ 기사[1]가 무척 길지만 재미있으니 함 읽어볼만 하다.

고대 유전체(ancient genomics)의 분석이 늘어나면서, 고고학계의 오래된 정설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가 종종 발표되는 모양인데, 기사[1] 앞부분에서도 그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고대 유전체 분석이 고고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에 Martin Jones의 저서인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2]라는 책을 읽은 적[3]이 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기사[1]에 스톤헨지 근교의 신석기 유적에 대한 연구 이야기가 나오는데, 뭐 한국인으로서는 큰 감흥이 안 오지만, 모르긴해도 영국인들에게는 나름 임팩트 있는 결과인 듯 하다. 만약 DNA 분석으로 고조선에 대하여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결과가 도출된다면, 한국인에게도 나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될 듯. ㅋ

뭐 여하간 고고학계에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모양인데, DNA 분석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부류가 있고, 지나치게 단편적인 증거로 전체 스토리를 새로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학자도 있는 것 같다.

후자의 견해도 수긍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사실 단편적인 증거나 가설만으로 이어붙이면 뭐든 못하는 게 없다. 재야 사학자들 중에는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 라는 주장[4]부터, 영어는 사실 한국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는 해괴한 주장[5,6]을 하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페이스북의 언어학 그룹에도 이런 사람들의 주기적 출몰로 골치가… -_-) 이런 사람들의 주장도 자기딴에는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리고 절대 절대 설득되지 않는다-_-)

결국 단편적인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분야들에서 나온 증거들의 조합으로 내러티브를 완성해야 고고학적 사실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지나치게 DNA 증거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고대 인류의 이동경로의 사례를 들자면, 하플로그룹의 추적으로 예상한 고대 인류의 이동경로[7]를 언어학이나 고고학으로 뒷받침 하면서 완성한 사례는 좋은 사례라 본다. 반면에 일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 흔적에 대한 이야기[8]를 했지만, 지나치게 단편적인 증거 때문에 일어나기 힘든 사실을 주장하는 일은 반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물론 DNA 증거는 강력하지만, 다양한 경우의 수와 정황을 고려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근데 본인의 견해는 생물학이든 고고학이든 전공과 무관하므로 그냥 흘려듣기 바란다-_- 사실 이 글은 술먹고 쓰는 글이니 넘어갑시다. ㅋㅋ 요새 대부분의 포스팅은 술먹고 쓰는 글임-_-

 


[1] 네이쳐 뉴스 Divided by DNA: The uneasy relationship between archaeology and ancient genomics 28 MARCH 2018
[2] 마틴 존스 저/신지영 역,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 바다출판사, 2007
[3] http://zariski.egloos.com/2227703
[4] 정용석 저,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책이있는마을, 2004
[5] 강상순 저, “영어는 우리말입니다“, 홍일, 1997
[6] 허핑턴포스트 영어가 우리 말이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2015년 10월 06일 11시 44분
[7] 내 백과사전 고인류의 유라시아 이동경로 추적 2012년 12월 5일
[8] 내 백과사전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의 흔적? 2017년 4월 28일

[서평] 임진난의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임진난의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l 그들이 본 우리 1
루이스 프로이스(저자) | 정성화(역자) | 양윤선(역자) | 살림 | 2008-03-28

 


살림 출판사의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1] 책이 꽤 많이 출간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권이다.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는 나름 흥미로운 책들이 포진해 있으므로 몇 권 사 놓고 있긴 한데, 게을러서-_- 여태 읽지 않고 있다. ㅠㅠ

16세기 예수회 소속의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포르투칼 사람이 포교를 위해 일본에 체류할 당시의 일을 남긴 기록이 ‘일본사‘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부분을 번역한 책이다. 프로이스가 직접 쓴 원본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몇 종의 사본이 남아있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번역으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번역한 책[2]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보다는 분량이 적다. 이 책은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의 p163부터 내용이 겹치고, 그 이후로 끝 부분까지 동일한 내용이다.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도 읽은지 오래되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두 책을 끝까지 비교해가면서 읽어봤다. 동일한 내용이므로 사실 어느 책을 읽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본인 같은 문외한에게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배경지식을 주석으로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주는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 쪽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 책은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에서는 보이지 않는 원본의 빈칸이나 소소하게 다른 해석의 여지를 소개하고 있어,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프로이스의 생애와 ‘일본사’의 집필과정, 서지학적 해석, 몇 가지 판본의 비교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어, 이 부분은 흥미롭게 볼만하다.

다만 주석이 각 장 뒤쪽에 있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보기 불편하다. 사람들이 왜 미주 따위를 쓰는 건지 이해가 안 됨-_- 특히 책을 파쇄하여 스캔해 두면 페이지를 찾아가며 넘기기 불편하기 때문에 각주가 무조건 좋다. ㅋㅋㅋ

특히 어지긴한 일본사 덕후가 아닌 이상-_-,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수들이 전부 누구인지 꿰고 있기란 쉽지 않으므로, 장수들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나무위키에 전국 시대의 장수들에 대한 설명이 쓸데없이 엄청 잘 돼있다. ㅋㅋㅋ 책을 읽으면서 계속 참고했다. ㅎㅎ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번역한 책이 근래 또 한 권[3] 출간되었던데, 본인은 읽지 않았다. 다만, 책 소개에 따르면, 두 번이나 번역된 임진왜란 부분은 제외 했다고 나와 있어, 한 번 사서 읽어 볼만 할 듯 하다.

 


[1] 그들이 본 우리 (aladin.co.kr)
[2] 내 백과사전 [서평]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2011년 8월 1일
[3] 루이스 프로이스 저/박수철 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 위더스북, 2017

스콧이 개썰매를 쓰지 않은 이유

에드워드 J. 라슨 저/임종기 역, “얼음의 제국“, 에이도스, 2012

p225-229

한 세기 동안, 극지탐험가들과 남극 역사가들은 난센피어리 그리고 북극탐험 세대들의 저작과 이야기들에서 개썰매가 인간 썰매보다 낫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이 왜 개씰매 보다는 대원들이 직접 썰매를 끄는 방법을 선택했는지 의아해했다. 물론 디스커버리호 탐험대 시절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개들 때문에 겪었던 끔찍한 경험과 고통 받는 개에 대한 지나친 예민함이 스콧의 판단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왜 인력으로 썰매를 끄는 방법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해답은 사실상 에드워드 시대의 남성다움의 척도와 적자에 대한 경쟁적인 증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스콧은 『디스커버리호 항해기』에 유명한 글을 남겼다. “나는 개들을 이용한 여행으로는 그 숭고한 관념의 고지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원들이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시련과 위험 그리고 난관에 정면으로 맞서고,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힘든 육체노동으로 광대한 미지의 세계가 던져주는 문제를 풀 때 그 고지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그래야만 더 고귀하고 훌륭한 정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59 레너드 다윈이 표현한 대로 “조국의 남성다움”을 입증하기 위해서 스콧과 그의 대원들은 썰매를 남극점까지 끌고 갔다가 돌아오거나 아니면 노력 끝에 죽어야 했다.

스콧이 두 번째 탐험을 할 때, 썰매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영국 극지탐험대의 특성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는 프랭클린 수색대와 함께 시작되어, 클레먼츠 마크햄을 비롯해, 탐험에 헌신한 몇몇 베테랑들에 의해서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마크햄은 디스커버리호 탐험대의 매뉴얼에 썰매여행에 관한 레오폴드 매클린턱의 에세이를 실었다. 매클린턱은 이렇게 썼다 “썰매여행의 체계가 정교화되기 전까지는 강인한 인내력과 여러 가지 즉흥적인 재능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렇게 해서 차츰 정착된 매클린턱의 썰매여행은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후 사람이 썰매를 끄는 기술은 빅토리아 시대의 유산이 되었고, 마크햄, 스콧, 새클턴이 이를 이어받았다. 예컨대, 디스커버리호 탐험을 계획할 때, 마크햄은 스키와 개를 이용한 난센피어리의 탐험을 “영국 대원의 방식”인 썰매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탐험과 비판적으로 비교한 후 이렇게 선언했다.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이 극지방에서 여행하는 방법이다. 스키도 개도 필요 없다” 1899년, 마크햄은 북극에서 개들을 이용해 썰매를 끌었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개의 도움 없이 성취해낸 것과 비교하면, 개와 함께 성취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시 탐험을 설계한 마크햄의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탐험에서 귀환한 대원들은 마크햄에게 썰매를 끄는 인간의 모습을 조각한 작은 조상彫像을 주었다. 네어스의 탐험대가 북극탐험에 나섰을 때, ‘서쪽 썰매여행’을 지휘했던 펠험 앨드리치는 1903년에 스콧에게 친절히 편지를 썼다. “후손들은 귀하의 썰매여행을 극지탐험 역사에서 최고의 탐험으로 평가할 것입니다.”60 새클턴이 이런 전통을 이어 인력으로 썰매를 끌고 남극점 가까이 갔다가 돌아와 국민의 대대적인 갈채를 받은 이후, 스콧 역시 남극으로 돌아가 전통대로 계속 인력으로 썰매를 끌었다.

테라노바호 탐험대의 대원들은 대체로 사람이 끄는 썰매의 정신을 받아들였다. 남극에서 한겨울을 나면서 스콧은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조랑말과 인간에 의존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설명하면서, 아이스 배리어에서는 조랑말을 이용했고, 이후에는 사람 힘으로 썰매를 끌었다고 말했다. 스콧은 “이런 의향에 전 대원들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고 보고했다. “대원들 모두가 빙하와 극점을 가는데 개들을 이용하는 것에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남극점을 향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랙터가 작동을 멈추자, 레슬리는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레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작동을 멈춘 트랙터를 보자마자, 스콧은 “기계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려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외쳤다. 조랑말이 뒤이어 죽자, 윌슨은 이렇게 선언했다 “천만다행히, 말들은 이제 모두 생을 다했으니, 우리는 스스로 더 힘든 일을 시작하련다.” 스콧은 비어드모어 빙하에 덮인 연질의 눈 때문에 개들이 썰매를 끄는 게 무척 힘들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개들을 데리고 출발하는 것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결국 짐은 대원들에게 넘겨졌는데, 스콧은 “우리는 꽤 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지원 팀은 남극고원에 도착한 후 돌아갔고, 스콧과 대원 네 명은 썰매 한 대를 끌고 남극점을 향해 150마일에 이르는 길을 떠났다. 지원 팀을 통해 캐슬린 스콧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H. R. “버디” 바워스(다른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걸어서 움직였다)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오늘날 영국 민족이 쇠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대원들이 직접 짐을 끌고 남극고원을 여행하는 것은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61

디스커버리호, 님로드호, 테라노바호는 세기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이의 짧은 시기에 항해에 나섰다. 세계대전으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전까지 많은 유럽인들은 운명과의 영웅적인 투쟁 그리고 인간 힘의 헛된 과시 속에서 의미를 찾았다. 빙판 위에서의 활약으로 개인적 인정을 받았던 많은 베테랑 남극탐험가들은 영국 제국의 병력 중 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던 전쟁에 참전했다. 개성을 요하지 않는 집단에 들어간 이들 탐험가들은 대부분 참호와 전장에서 살육되었다. 몇몇 탐험가들은 대부분 해상 전투 중에 죽음을 택했다. 마크햄 그리고 1911년 프랜시스 골턴의 뒤를 이어 영국 우생학교육Britain’s Eugenics Education Society 회장이 된 레너드 다윈과 같은 극지탐험 지지자들에게 탐험은 민족의 적합성과 기질을 측정하는 실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혹독하게 시험되었지만,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탐험대원들은 이러한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우생학적인 견해는 문화의 일부였다. 스콧은 1911년에 남극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우리가 이 탐험에서 증명한 것만큼 아주 명확히 민족적 기질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선 밖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마음속에 있는 목적이 중요하다. ‘신들’은 작아지고, 겸허함이 이들을 대신한다. 허영은 쓸모없다.” 나중에 탐험가들의 과학적 현장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끈기 있는 연구를 통해 얻은 위대한 결과야말로 분투하는 인류를 위한 최상의 실례이다.”62 탐험가들은 남극점에 도달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시험하기도 했지만, 또한 과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탐험의 부가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남극대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됨에 따라 과학 프로그램의 초점은 점차 지자기, 지리상의 발견, 해양학, 기상학에서 생물학, 지질학, 빙하학으로 바뀌었다.

 


59. SCott, Voyage of the “Discovery,” 1:467-68.
60. F. Leopold McClintock, “On Arctic Sledge-Travelling,” in The Antarctic Manual for the Use of the Expedition of 1901, ed. George Murray (London: Royal Geographical Society, 1901), 293; Clements R. Markham, “Memorandum for the Landing Party Committee,” n.d. National Maritime Museum Archives, MRK/46 (106); Clements Markham, “The Antarctic Expeditions,” Verhandlungen des siebenten Internationalen Geographen-Kongressess, Berlin, 1899 (Berlin: Kuhl, 1901), 625; Perlham Aldrich to R. F. Scott. Sept. 26, 1903, SPRI Archives, MS 366/15
61. Robert Falcon Scott, Journals: Captain Scott’s Last Expedition, ed. Max Jones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89; Lashly, Scott’s Command, 121; Scott, Journals, 315; Edward Wilson, Diary of the “Terra Nova” Expedition to the Antarctic, 1910-1912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7), 213; Scott, Journals, 345; H. R. Bowers to Kathleen Scott, Oct. 27, 1911, SPRI Archives, MS 1488/2 (vol. 1).
62. Scott, Journals, 185, 209

이걸 보니 근대 산악 정복의 역사에서 초등을 중시하는 등정주의에서, 등정하는 방법과 경로를 중시하는 등로주의로의 변천이 연상된다. 알파인 스타일만이 가치있는 등정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콧과 같은 입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ㅎ

스콧/새클턴과 아문센의 차이

에드워드 J. 라슨 저/임종기 역, “얼음의 제국“, 에이도스, 2012

p9-12

내가 친구들에게 남극탐험의 영웅시대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둘 중 하나였다. 어떤 친구들은 어니스트 새클턴의 리더십 스타일이 정말 감탄스럽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친구들은 로버트 스콧이 남극점에 최초로 도달하기 위해 썼던 전략을 문제시하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새클턴과 스콧이 위업을 이룬지 한 세기가 지났고, 여전히 두 사람은 개인적인 성취를 이룬 인물들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명성은 주로 지리적 남극점에 도달하려 시도하던 중 겪은 온갖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인물이 오로지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남극대륙에 갔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남극탐험을 둘러싼 다른 많은 사실들은 잊히고 말았다.

이 책은 새클턴의 리더십에 대한 찬가도 아니고 스콧의 선택을 비판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남극에 바친 영국인들의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다룬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영국이 주로 남극탐험을 기획했던 시대) 남극탐험 프로젝트는 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스콧은 20세기 들어 첫 12년 동안 남극대륙 탐험대를 두 번 이끌었고, 새클턴은 한 번 이끌었다. 스콧이 이끈 첫 번째 탐험대는 독일과 스웨덴 팀도 참여한 국제적인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물론 군사적, 상업적, 이데올로기적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동기도 숨어 있었지만, 기획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으로 과학적인 탐험이었다. 뒤이은 새클턴과 스콧의 탐험은 스콧의 첫 번째 탐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첫 탐험의 기본적인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세 차례에 걸친 영국의 남극탐험은 모두 로스 해를 통해 남극대륙으로 들어갔다. 이때의 남극탐험은 조직과 영향력 모두에 있어, 새클턴의 두 번째 탐험을 비롯해 소위 남극탐험의 영웅시대(19세기 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의 시기를 말한다_옮긴이)의 다른 탐험들과는 분명히 다른 논리적 일치성을 보인다.

결국 스콧이 남극점 도달 경쟁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결코 과학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스콧은 두 번의 탐험에서, 새클턴은 1907-1909년 탐험에서 막대한 양의 과학적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만일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것이 스콧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면, 그의 탐험 방식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만일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제대로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그는 불운하게도, 오로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고 이미 그 능력 또한 증명된 바 있는 극 지방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입장이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는 스콧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나 스콧과 새클턴은 수많은 주인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과학적 발견, 탐험, 정복’이라는 영국인의 관념이었다.

1901-1913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있었던 영국의 남극탐험을 설명하는 글들은 전부 새클턴의 리더십, 스콧의 선택, 남극점을 향한 경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은 이러한 탐험들이 복잡한 기획이었다는 점이다. 과학은 탐험의 모든 부분과 엮이며, 리더십과 선택처럼 대단히 중요한 무형의 요인을 비롯해 다양한 면들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했다. 남극탐험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탐험가들이 행한 과학 연구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다행히,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탐험가들의 과학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남극 원정 이야기만큼이나 매혹적인 사연이 많다.

남극탐험에서 행한 놀라운 연구 활동들을 살펴보면, 빅토리아 시대에드워드 7세 시대의 영국 문화에서 과학이 차지하고 있던 근본적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은 이 시기 동안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탐험가들과 제국의 관리들은 세계 각지로 서구 과학을 가지고 가 외국의 영토를 정복해 영국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고 표본들을 채집했다.

당시 막 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한 국가의 자랑스런 시민이었던 아문센은 스콧이나 새클턴과는 다른 전통을 가진 나라 출신이었고, 목표도 달랐다. 제국이란 영토들의 물리적인 정복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영국의 입장에서, 제국은 언제든 영토들을 과학적으로(과학 자체의 정의와 개념이 진화할 때조차도) 탐험하고 체계적으로 개척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선 이 이야기는 탐험가들이 관여한 다양하고 경쟁적인 형태의 과학에 관한 것 일뿐 만 아니라 권력과 정치 문화와 상업, 지구 끝에서 벌어진 오만한 도전과 영웅적 행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일단 서문만 봤는데, 이 책이 뭔가 재미있을 듯-_-

 


2018.3.14

p307-308

스콧은 매우 야심적인 과학 탐사계획을 대략적으로 구상해 놓은 상태였다. 디스커버리호님로드호 탐험대는 아직까지 과학 탐사를 그토록 대담하게 시도한 적이 없었고, 아문센은 남극점을 향한 야망을 굳이 과학 따위의 명분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스콧은 과학을 위해 탐험대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명, 공표한 목표, 즉 남극점 도달이라는 목표 때문에 현재의 대책을 비난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가장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이루려는 노력에 진심으로 지지를 보낼 것이라고 믿는다.” 스콧은 전초기지에서 계획한 여행뿐만 아니라 진행 중이 었던 과학적 관측을 재개하기 위해 인원과 장비를 챙겼다. 라이트는 측지학 및 자기 측정을 맡고, 기상학자 조지 심슨은 계속 기후를 기록하고, 해양생물학자 데니스 릴리는 바다에서 수평예인 그물, 저인망, 준설기를 이용해 표본을 채집하고, 무척추동물학자 에드워드 넬슨은 피한지 인근의 해양생물과 조류를 추적 관찰할 예정이었다. 테라노바호의 삼등항해사이자 스콧의 처남이 었던 월프레드 브루스는 훼일스 만에서 아문센과 그의 대원들을 만났을 때, 아문센 탐험대와 스콧 탐험대가 서로 무엇이 다른지 한눈에 알아챘다. 브루스는 이렇게 경고했다. “아문센 탐험대는 120마리의 개를 데리고, 남극점을 향해 가고 있다! 과학이든 뭐든 필요없이, 오직 남극점을 위해! 만일 이들 개가 제대로 잘 달린다면, 십중팔구 남극점에 최초로 도달할 것이다”37

 


37. Frank Debenham, The Quiet Land: The Diaries of Frank Debenham (Alburgh, UK: Bluntisham Books, 1992), 12.; Wilfred Bruce to Kathleen Scott, Feb. 27, 1911, SPRI Archives, 1488/2.

[서평] 몽골 제국 기행 – 마르코 폴로의 선구자들

몽골 제국 기행 – 마르코 폴로의 선구자들
플라노 드 카르피니 | 윌리엄 루브룩 (지은이) | 김호동 (옮긴이) | 까치 | 2015-08-20 | 원제 Ystoria Mongalorum / Itinerarium

 


이 책은 마르코 폴로보다 대락 30년 이전에 몽골제국을 방문했던 카르피니루브룩이 각각 남겼던 기행문을 번역한 책이다. 두 사람의 방문시기는 비교적 근접하지만 겹치지는 않는다. 일전에 읽은 김호동 선생의 동방견문록[1]을 읽고 이어서 읽는 책인데, 동방견문록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책의 분량상으로 1/3정도가 카르피니의 기록이고, 2/3정도가 루브룩의 기록이다. 여행기간이 수십 년이나 되었던 마르코 폴로와는 달리, 그들의 방문은 1년 남짓한 수준이므로, 동방견문록에 비해 양이 적어 보인다. 이전에 본 김호동 선생의 책[1]처럼 다양한 판본의 대조를 통한 내용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동방견문록보다는 재미가 좀 적었다. ㅎ 몽골 군대가 어떤 전술로 전쟁을 했는지, 간접적으로 짐작할 만한 내용이 좀 흥미로왔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수십 일만에 주파하는 당대 역참제도는 꽤 놀랍다. 사막을 고속으로 주파하는 저자들이 어찌나 개고생-_-을 했는지, 굶었다거나 아프다는 이야기도 꽤 많다. 그 고생의 느낌이 여기까지 오는 듯 하다-_- ㅋㅋ

한편 폴 펠리오의 연구논문을 자주 인용하는데, 펠리오는 1945년에 사망했는데, 1970년의 논문을 인용하길래,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검색을 해 보니 폴 펠리오 사후에 출간된 저작들이었다. 헐…-_- 젠장

p137에 몽골인들이 문지방을 밟는 것을 금기시하는 흥미로운 문화가 묘사돼 있다. 동방견문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몽골인들이 다양한 종교활동에 비교적 관대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p227에는 이러한 관용의 해석에 대해 저자의 새로운 관점이 흥미롭다. 몽골인들은 종교의 효용적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고, 종교의 본질이나 동화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종교인들을 보호하는 행동을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p235에 assassin의 어원이 마약인 hashish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주석이 있는데, 중동 사학자인 Bernard Lewis[2]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 책[2]은 뒤의 참고문헌 목록(p455)에도 있다. 아사신파의 계보에 대해서는 일전의 글[3]을 참고하기 바란다.

p339에 루브룩이 카라코룸에 방문했을 때 아사신파의 암살정보 때문에 검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은 Bernard Lewis 선생의 책[2;p33]에도 나온다.

p344에 뭉케 칸이 여러 종교인들을 모아놓고 신학논쟁을 시키는 부분은 무척 재미있다. 몽골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이나, 각 종교의 세계 인식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역사서가 다 그렇듯이 중앙아시아사 또는 몽골사에 관심이 없으면 재미있게 읽기는 어렵겠지만, 김호동 선생의 저술[1]을 재미있게 봤다면 아마 볼만할 듯 하다. 헷갈리는 여러 칸들의 계보는 일전의 글[4]을 참고하기 바란다.

 


[1] 내 백과사전 [서평]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2017년 9월 14일
[2] 버나드 루이스 저/주민아 역, “암살단“, 살림, 2007
[3] 내 백과사전 이슬람 시아파 계보 2017년 9월 2일
[4] 내 백과사전 칭기즈 칸 집안 정리 2018년 2월 12일

칭기즈 칸 집안 정리

‘몽골제국 기행'[1] 읽다가 하도 헷갈려서 공부할 겸 걍 정리함-_- 당연히 그 많은 모든 자식을 기록한 것은 아님. 아시아 인구의 8%가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추정[2]될 정도로 많다고 함 ㅋ

칭기즈 칸 (1대 대칸)
아들 1 주치 칸
손자 1-1 바투 칸 (킵차크 칸국 건설)

아들 2 차가타이 칸 (차카타이 칸국 건설)

아들 3 우구데이 (오고타이) 칸 (2대 대칸, 우구데이 칸국 통치)
손자 3-1 구육 (귀위크) 칸 (3대 대칸)

아들 4 톨루이 (툴루이) 칸
손자 4-1 훌레구 (훌라구) (일 칸국 건설)
손자 4-2 뭉케 (몽케) 칸 (4대 대칸)
손자 4-3 쿠빌라이 칸 (5대 대칸)
손자 4-4 아릭 부케 (아리크 부카)

 


Carpine : 1245년 4월 5일 리옹출발 – 1246년 7월 22일 카라코룸 도착
Rubruck : 1253년 3월경 출발 – 1253년 12월 27일 뭉케 궁정 도착
마르코 폴로 : 1269년 쿠빌라이 칸 만남

 


[1] 내 백과사전 [서평] 몽골 제국 기행 – 마르코 폴로의 선구자들 2018년 3월 1일
[2] Zerjal et. al (2003). The Genetic Legacy of the Mongols. American Journal of Human Genetics, 72(3), 717–721. doi:10.1086/367774

라이트 형제 당시의 미국 분위기

데이비드 매컬로 저/박중서 역, “라이트 형제“, 승산, 2017

p58-62

(전략)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넉넉한 자금 지원을 받은 그(Langley)의 최신 연구는 기묘한 외관에 증기 동력 무인 조종 방식의 (본인의 말마따나) “비행체”라는 결과물을 낳았다. 앞뒤에 V자 모양의 날개가 달린 이 기계는 마치 거대한 잠자리 같은 모습이었다. 릴리엔탈이 사망한 바로 그해인 1896년에 포토맥 강에 띄워 놓은 집배 지붕에서 투석기로 발사한 이 물건은 800미터쯤 날아가다가 강물에 풍덩 빠져 버렸다.

릴리엔탈과 사누트와 랭글리 외에도 19세기의 가장 저명한 공학자, 과학자, 그리고 독창적인 사상가 가운데 상당수가 조종 비행의 문제에 뛰어들었다. 그중에는 조지 케일리 경, 기관총의 발명자 하이럼 맥심 경, 심지어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토머스 에디슨까지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하이럼 맥심은 거대한 증기 동력 무인 조종 비행 기계에 10만 달러를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정작 이 기계는 이륙 시도 과정에서 추락해서 망가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전자 공학자 클레망 아데르가 제작한다는 증기 동력 비행 기계에 막대한 돈을 투입했다. 비록 전체 프로젝트가 지극히 어설픈 결과만을 내놓으며 결국 좌초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데르는 비행기를 뜻하는 단어 ‘아비옹(avion)’을 프랑스어에 추가하는 공적을 남겼다.

비행 실험에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었고, 굴욕적인 실패와 부상과 (당연한 이야기지만, 심지어) 사망의 위험도 있었으며, 자칫 괴짜니 정신병자니 하는 놀림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때까지 무려 50년 이상, 또는 라이트 형제가 이 분야에 뛰어들기 이전까지의 오랜 기간동안, (언론의 보도 내용대로) 자칭 “공중의 정복자들”과 이들의 기묘한, 또는 유치찬란한 비행 기계들은 계속해서 웃음을 유발하는 원천으로 인기를 끌었다. 예를 들어 1850년대에 한 프랑스 발명가가 내놓은 기발한 발상이란, 의자등받이에 날개 한쌍을 붙이고 커다란 우산 하나를 매단 것뿐이었다. (과연 이 우산이 “상승력”을 제공하기 위한 장치인지, 아니면 단지 차양일 뿐인지 여부는 결코 설명되지 않았다). 1870년대에는 조지아주의 미케이어 클라크 다이어라는 사람이 오리 모양의 비행장치를 내놓았다. 1890년대에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 내놓은 요약 보도에 따르면, “비행 기계 괴짜”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어리석어져서 급기야 “우둔”의 수준에 도달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미국 특허청에 승인을 바라고 쏟아져 들어온 갖가지 정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 중에는, 알루미늄 판 기체와 부채꼴 꼬리가 달린 “체공기(滯空機)”라는 이름을 붙인 거대하고 마치 물고기처럼 생긴 기계도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체 아래에 달린 앞뒤 방향으로 이어진 한 쌍의 날개가 기체를 지탱하고 기울기는 조종간으로 조종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 항공기는 원하는 만큼 상승 및 하강이 가능하다. 꽁무니에서 연이어 폭발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추진되며,작은 니트로글리세린 덩어리가 뒤쪽에 있는 컵 모양 구멍 속에 전자식으로 자동 주입 및 배출된다.

급기야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인간이 날아다닐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중략)

이런 부정적인 의견들이 팽배했지만 라이트 형제는 낙담하거나 연구를 단념하지 않았다. 대학 교육이나 정식 기술 훈련을 받은 적도, 서로를 제외한 다른 누구와 함께 일한 경험도 높은 자리에 있는 친구도, 경제적 후원자도, 정부 보조금도 전혀 없었고 모아놓은 돈조차도 별로 없었지만 라이트 형제는 개의치 않았다. 자칫하면 오토 릴리엔탈처럼 실험 중 어느 단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전적으로 현실적인 가능성도 있었지만, 라이트 형제는 개의치 않았다.

릴리엔탈이 사망하기 몇 해 전에 새뮤얼 랭글리는 비행을 시도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 역시 영웅 취급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즉 뭔가 유용한 목표를 위해 생명의 위협조차도 무릅쓰려는 사람들이 받는 것과 같은 종류의 주목과 관심을 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한 글을 《코스모폴리탄》에 기고했다. 하지만 랭글리와 옥타브 사누트는 나이 때문에 이런 위험을 직접 감수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역시나 중요하게도) 이 시대는 발명과 기술적 혁신과 온갖 종류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살아 넘치는 시대였다. 조지 이스트먼은 “코닥” 상자형 카메라를 내놓았다. 아이작 메리트 싱어는 세계 최초의 전기 재봉틀을 내놓았다. 오티스 사는 세계 최초의 엘리베이터를 뉴욕의 한 사무실 건물에 설치했다. 미국 최초의 안전면도기, 미국 최초의 쥐덫, 미국 최초의 자동차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 모두는 오빌이 인쇄소를 시작하고, 윌버가 일종의 긴 잠에서 깨어난 지 10여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스스로 부과한 고립의 마법에서 깨어난 때로부터 대략 십여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뭔가를 발명하고 끊임없이 만드는 것을 생활양식의 핵심으로 삼는 분위기가 언제나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즈음, 그러니까 세기의 전환 바로 직전에 나온 미국 특허청의 통계에 따르면, 데이턴은 미국 내에서 인구 대비 특허 창안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이 도시의 큰 공장들은 계속해서 더 커졌고, 철도 차량과 금전 등록기와 재봉틀과 총신을 제작했다(한 가지 예를 들자면, ‘데이비스 재봉틀 회사’는 길이만 1.5킬로미터에 달하는 공장에서 하루 400대의 재봉틀을 생산했다). 뿐만 아니라 마구(馬具)와 코르셋과 비누와 셔츠와 빗자루와 수레 바퀴와 갈퀴와 톱과 판지상자와 맥주통과 작업복을 생산하는 작은 상점과 작업장도 수백 개나 있었다. 물론 자전거를 생산하는 곳도 있었다.

“인간이 날아다닐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 것 같다. 현재 당연해 보이는 것들도 과거의 누군가가 극적인 노력으로 성취한 것일 수도 있다.

[서평]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 대혁명

해방의 비극10점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열린책들
마오의 대기근10점
프랑크 디쾨터 지음, 최파일 옮김/열린책들
문화 대혁명10점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열린책들

얼마전에 중국 정부의 압력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국 근대사 논문을 삭제하는 ‘영혼을 팔아먹은'[1] 행위 때문에 욕을 먹은 사건이 있었다. 여론의 반발이 심해서인지 며칠 후에 다시 복구 결정되었지만[2], 중국정부가 해외 학술논문에 넣는 압력은 여전한 듯 하다.[3] 이 삭제된 논문들 중에 디쾨터 선생의 저작도 있었던 것 같은데, 디쾨터 선생이 나름 중국 근현대사에 있어 꽤 영향력 있는 전문가로 대접받는 것 같다.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선정한 2010년 올해의 책[4]에 디쾨터 선생의 책이 나왔을 때 점찍어 두고 있었긴 했는데, 이게 역서가 나올 줄은 몰랐다. 드디어 번역서가 출간됐다길래 인제사 완독을 하게 됐다. ㅎㅎㅎ

세 권의 시기가 이어져 있고 전반적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세 권 중 일부만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읽는다면 세 권을 모두 읽는 것을 추천한다. 세 권 중 Mao’s Great FamineThe Tragedy of Liberation은 위키피디아 항목도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인민 3부작[5]이라 부르는 듯.

현대 문명에서 대량 인명학살의 정점으로 히틀러나 스탈린을 흔히 꼽고 있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아무래도 그 자리는 마오쩌둥이 차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굶어 죽거나, 자살하거나, 살해 당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_- 진실로 잘못된 정치체제를 선택한 중국사람들의 불운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사소한 개별적 사건을 방대하게 수집하여 나열함과 동시에, 그런 개별적 사건을 바탕으로 사회 문화의 전반적 흐름을 파악하도록 해주는 수법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역사적 서술에서 보이는 정치/외교적 관계나 중앙정부의 사건만에 집중하지 않고, 중국 인민들의 삶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전에 본 짤방 중에, 마오쩌둥이 ‘저 새는 해로운 새다’ 하면서 참새를 가리키는 짤방이 있었는데, 이 덕에 참새가 박멸되어 해충이 창궐하게 되어 기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6]가 있다. 좀 희화화 된 면이 있지만, 마오의 단순한 한 마디에 왜 그렇게 많은 인민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는지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진실로 마오의 시대는 중국 전체가 집단광기의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다만 본인의 중국 근현대사의 배경지식이 너무 적어서 3권의 문화 대혁명에서 묘사한 정치적 사건들의 인과관계는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다른 책들을 좀 읽어보면서 메워야 할 듯 하다.

 


[1] 가디언 Cambridge University Press accused of ‘selling its soul’ over Chinese censorship Sat 19 Aug ‘17 04.52 BST
[2] 워싱턴 포스트 In revers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restores articles after China censorship row August 21, 2017
[3] 연합뉴스 中, 美아시아학회지에도 논문삭제 압력…국제학술계 반발 확산 2017/08/23
[4] 내 백과사전 2010 이코노미스트지 선정 올해의 책 2010년 12월 16일
[5]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1896663
[6] 제사해 운동 in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