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 젠자부로와 네덜란드어 학습

스기타 겐파쿠의 회고록인 난학사시의 일부임.

난학의 세계사 – 중화적 세계를 넘어 일본이 유럽과 열대에서 접속하다
이종찬 (지은이) 알마 2014-02-19

pp41-43

나는 료타쿠가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메이와 초기 무렵이었다. 어느 해 봄에 연례적인 쇼군 예방을 위해 네덜란드인이 에도에 왔을 때 료타쿠가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지금부터 어디에 가십니까?”라고 물으니 “오늘은 네덜란드인 숙소에 가서 통사(통역가)를 만나 네덜란드에 대해 듣고 상황을 봐서 네덜란드어에 대해서도 질문을 할 예정이네.”라고 대답했다.

이 무렵 나는 아직 젊고 혈기왕성 했던지라 뭐든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기에 “괜찮다면 데려가줄 수 있습니까? 함께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매우 간단한 일이지.”라고 말해 함께 나가사키야69로 갔다.

이때 왔던 대통사가 니시 젠자부로였다. 료타쿠의 소개로 나도 네덜란드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젠자부로는 다음과 같이 충고해 주었다.

“그것은 완전히 헛수고입니다. 왜냐하면 네덜란드어를 배워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이나 술을 ‘마시다’를 네덜란드어로 무엇이라 하는지 물어보려면 처음에는 손짓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지요. ‘술을 마시다’를 물어볼 때 먼저 잔을 놓고 술을 따라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이것은?’이라고 물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고 ‘drink’ 라고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마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조고70게코71의 경우 손짓만으로는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일단 많이 마시는 것과 적게 마시는 것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마셔도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조금만 마셔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요. 이는 사람의 기분에 관련되므로 몸동작만으로는 보여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아해서 즐긴다’라는 뜻의 네덜란드어로 ‘aantrekke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통사 집안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번역에 익숙해져 있는데도 이 말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었는데, 쉰 살이 되어 이번 여행을 하는 도중에 이 의미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ann’이란 것은 본래 ‘향하다’라는 뜻이며, ‘trekken’은 ‘끌어당기다’라는 뜻입니다. ‘무언가를 향해서 끌어당기다’라는 것은 ‘맞은편에 있는 것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조고라고 할 때도 맞은편에 있는 것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긴다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것은 좋아한다는 뜻이 되지요. 고향을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또한 고향을 자기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어를 깊이 공부하려면 번거로워서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네덜란드인과 접하더라도 쉽게 배울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에도에서 공부하려 한다면 더더욱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노로와 아오키도 막부의 명령을 받아 매년 우리가 묵는 숙소를 찾아와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나 그렇게 순조롭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에게도 쓸데없는 일이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69 나가사키야는 네덜란드인들이 에도 쇼군에게 참부 또는 배례를 했을 때 묵었던 숙소로 주로 여기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에도의 경제 중심지였던 니혼바시 근처에 있었다.
70 술을 좋아해서 많이 마시는 사람.
71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

18세기 일본에 네덜란드어 통역사(통사)의 실력은 현대 통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낮은 수준의 실력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문명간에 정보가 얼마나 퍼지기 힘든지 짐작할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해체신서(解體新書)의 탄생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이종각 (지은이) 서해문집 2013-10-25

pp9-13

도쿄 우에노 역에서 전철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미나미센주 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에코인이란 조그만 절이 나온다.

절터는 도쿠가와 막부 시대(1603—1868), 에도(지금의 도쿄)의 2대 형장 중 하나인 고쓰가하라 형장이 있던 곳이다. 1651년 형장이 개설된 이래 메이지유신(I868) 직후 폐지될 때까지 210여 년 간, 무려 20만 명 이상이 처형됐다. 한 해 1000명가량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셈이다. 참수, 화형, 능지처참, 효수 등 갖가지 형이 집행됐다. 사체는 흙으로 대충 덮어 형장에 방치해 들개들이 무리지어 사육死肉을 뜯어 먹어 악취가 진동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 형장에선 일반 죄인 이외에 국사범들도 처형됐는데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하급무사들을 가르친 막부 시대 말기의 저명한 사상가로 일본인들이 높게 평가하는 요시다 쇼인도 그중 하나다. 그는 당시 국법으로 금지한 밀항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1859년 처형당했다. 처형 직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묘가 현재 절 안에 남아 있다.

형장을 개설할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에코인 절이 세워졌고, 그 후 형장 터를 가로질러 철도를 부설하면서 엔메이지란 절도 세웠다. 엔메이지 마당엔 당시 처형된 사형수가 저세상에 서라도 연명하길 바라는 뜻으로 세운 약 4미터 높이의 지장보살 불상이 남아 있다. 사람 목을 치는 형장에 있던 불상이기 때문인가, ‘구비키리 지죠首切り地蔵(참수 지장보살)’란 섬뜩한 이름이 붙어 있다.

(중략)

1771년 초봄, 바로 이 형장에서 일본 근대 의학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일본의 근대를 바꾸는 하나의 단초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스기타 겐파쿠(이하 겐파쿠)를 비롯해 에도에서 근무하는 각 번의 시의侍醫(다이묘 등을 진료하는 의사)들이 이 형장에서 인체 해부를 처음 참관하고, 모종의 결의를 한 것이다.

이날 인체 내부를 처음 본 겐파쿠를 포함한 의사 셋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옛 중국 의서에 실린 인체도는 실제와 다른 반면, 자신들이 갖고 간 네덜란드 인체 해부서에 실린 인체도는 실제 인체와 정확히 같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의사라면서 인체 구조도 제대로 모른 채 주군님을 모시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반성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해부서를 일본어로 변역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 결의는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시 겐파쿠는 알파벳조차 몰랐고, 나머지 두 사람의 네덜란드어 실력도 극히 초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 도구라고는 사전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한 필사본 네덜란드어-일본어 단어장 한 권 정도였다. 따라서 이들이 네덜란드어 의학 전문 서적을 해독하고, 번역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해냈다. 약 3년에 걸친 ‘고심참담苦心慘憺,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번역을 마치고 《해체신서》란 번역서를 출판한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해체신서》는 일본 역사상 첫 서양 의학서 번역이라는 불후의 업적이자 일본 근대 의학의 여명을 밝힌 쾌거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체신서》 출간은 이후 네덜란드(화란和蘭)를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을 뜻하는 ‘란가쿠蘭學(이하 난학)’가 일본에 융성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해체신서》 출간 이후 난학은 100년 가까이 일본 근대 의학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 나아가 교육, 사고방식, 관습 등 일본인과 일본 사회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며 퍼져 나갔다. 난학은 근대 일본을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는 촉매 역할을 하면서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를 이루는 하나의 토양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획기적 위업’으로 겐파쿠는 일본에서 ‘난학의 선구자’, ‘일본 근대 의학의 개척자’로 칭송되면서,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일본 사람 중에서 그의 이름과 《해체신서》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가히 위인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인 중에 겐파쿠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본, 일본인에 대한 호오好惡는 일단 접어 두고 200여 년 전 쇄국의 섬나라, 일본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들이 보여 준 ‘의사라면서 인체 구조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해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려는 자세는 프로페셔널의 귀감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힘든 일에 도전해 악전고투 끝에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간 것은 창의, 개척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자세는 오늘날의 한국인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것이 언뜻 보아 우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겐파쿠의 행적을 더듬어 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이 아니라 거의 암호해독 수준의 노력이 들어간 듯 하다-_- 개인적으로는 조선과 일본의 국가적 운명이 난학에서 갈렸다고 보고 있다. 여러가지 볼 게 많은 아키하바라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데 ㅋㅋㅋㅋ 언제 한 번 절터에 방문해볼까 싶다.

[서평] 아라비아의 로렌스 –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아라비아의 로렌스 –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 걸작 논픽션 12
스콧 앤더슨 (지은이),정태영 (옮긴이) 글항아리 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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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차 세계 대전 전후로 아랍 반란 당시, 아랍 지역에서 활약했던 네 명의 서구인들 T. E. Lawrence, Aaron Aaronsohn, Curt Prüfer, William Yale의 행적을 추적하는 책이다. 책의 원제 Lawrence in Arabia와 유사한 제목의 영화 Lawrence of Arabia는 로렌스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고 있어서 유명하다는데, 본인은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네 명의 행적이 병렬로 번갈아가면서 마치 소설처럼 극적인 구성으로 등장하고 있는데다가, 등장인물도 엄청 많아서 초 헷갈린다-_- 전반적으로 네 명 중 로렌스의 행적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듯 하다. 많은 부분은 로렌스 자신의 자서전 Seven Pillars of Wisdom에서 참고하고 있으나, 저자는 자서전에서 의심스러운 부분들의 사실확인을 위해 사료를 추적하는 부분도 꽤 많다. 저자는 여러가지 증거를 재구성하여 로렌스의 저서에서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는 부분까지 추적한다. 저자의 품이 상당히 들어간 책임을 느낄 수 있다. 일전에 앨런 그린스펀의 전기[1]에서와 비슷한 생각이 드는데, 한 인물을 재구성할 때 그 인물의 자서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욕심 때문에 빚어진 복잡한 사기계약들(맥마흔-후세인 통신, 사이크스-피코 협정, 밸푸어 선언) 때문에 중동의 경계가 어떻게 그어져야 올바른지에 대한 이해관계가 복잡해졌고, 결국 이것이 현재 중동 내 이스라엘 분쟁/서구권과의 갈등 등의 출발이 된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라고까지 볼 수도 있는 책인 듯하다.

pp78-94 근방에서 유럽 각국이 외교정책을 대하는 분위기와 발칸반도 문제가 설명되어 있는데, 이는 일전에 본 크리스토퍼 선생의 저서[2]에 매우 잘 설명되어 있다. 읽어보면 당대 국가간 관계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될 듯 하다.

p97 근방에서 스탠더드 오일사에 대한 역사는 Daniel Yergin을 참고라하고 주석에 나와 있는데, 이 책의 역서[3,4]가 출간되어 있다. 위키피다아 항목이 있는 걸 보면 나름 유명한 듯 한데, 게을러서 사 놓고 여태 안 읽고 있다-_-

p139 근방에서, 1차 대전 이전에는 유럽 사람들이 전쟁의 위험성과 참혹성을 간과해서, 1차 대전과 같은 재앙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비슷한 주장이 크리스토퍼 선생의 책의 맨 뒷부분[1;p857]에도 언급된다. 여러모로 크리스토퍼 선생의 책[2]을 참고할만 하다.

p195에 Mission creep이라는 군사 용어가 등장하는데, 위키피디아를 보니 원래 목표에서 초점을 잃고 점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목표가 이동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 같다. 근데 이 책에서는 한가지 오판으로 인해 전체 작전을 크게 변경한다는 의미로 쓴 듯 하여 미묘하게 다른 듯 하다. ㅎㅎ

p472부터 ‘연기처럼 떠도는 아랍군’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책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Asymmetric warfare와 일치하는 개념인 듯 하다. 일전에 번스타인 선생의 책[5]에서 본 일이 있다. 베트남전의 베트콩이나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과 같은 전술의 원류가 1차 대전때의 아랍 전쟁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p829에 주석으로 David Fromkin저서[6]에서 파로키의 역할에 대한 비판이 언급되어 있던데, 이 책[6]을 사 놓고 아직 안 읽어봐서 판단하기 어렵다. 비교하며 판단해야 할 것 같다.

1차 대전 직후인 1920년에 로렌스의 자서전 이전에 쓴 글을 어느 분께서 번역[7]하셨던데, 참고할만 하다.

전반적으로 극적 구성도 있어서 흥미롭지만, 본인의 배경지식이 부족하여 좀 어려웠다. 텍스트가 많은 책이고 크리스토퍼 선생의 책[2]이 도움이 된 듯 하다. 1차 대전 당대의 중동정세를 파악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의 일부를 인용[8,9,10]해 두었으니 독서 결정여부에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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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1
Lawrence of Arabia: Archeologist, Writer, Warrior, Spy (warhistoryon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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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서평] 앨런 그린스펀의 삶과 시대 2019년 5월 19일
[2] 내 백과사전 [서평]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2019년 6월 27일
[3] 황금의 샘 1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 황금의 샘 1 김태유,허은녕 (옮긴이) 라의눈 2017-08-01 원제 : The Prize (1991년)
[4] 황금의 샘 2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 황금의 샘 2 김태유,허은녕 (옮긴이) 라의눈 2017-08-01 원제 : The Prize (1991년)
[5] 내 백과사전 [서평]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 G2 시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2019년 8월 16일
[6] 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은이),이순호 (옮긴이)갈라파고스 2015-01-12 원제 : A Peace To End All Peace (1989년)
[7] [스크랩] [번역] 반란의 진화, 1920 (The Evolution of a Revolt – by T. E. Lawrence) (blog.daum.net/m2799103)
[8] 내 백과사전 염소치기 딜레마 2019년 9월 22일
[9] 내 백과사전 분리부정사 Split infinitive 2019년 9월 6일
[10] 내 백과사전 오스만 투르크가 1차 대전에 참가한 이유 2019년 8월 26일

염소치기 딜레마

아라비아의 로렌스 –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 걸작 논픽션 12
스콧 앤더슨 (지은이), 정태영 (옮긴이) 글항아리 2017-06-12

p541-542

석 달 전 로렌스와 반란군 동료들은 아바엘나암(Aba el Naam)에서 터키군 수비대를 기습하려고 매복하던 중 우연히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목동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목동을 그대로 돌려보냈다가는 터키군에게 반란군의 존재가 발각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목동은 양떼가 흩어질까봐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결국 매복 부대는 다소 코믹한 해법을 떠올렸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목동을 나무에 묶어두었다가 적군이 달아난 뒤에 풀어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암만의 주변을 치고 빠지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그런 배려를 베풀 틈은 없었다.

그때 마침 습격대는 시르카시아에서 온 떠돌이 상인과 맞닥뜨렸다. 그를 포로로 잡아둘 수도 없고 그냥 보내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시르카시아인은 대부분 터키 동조자였다) 일부 대원은 당장 죽이라고 외쳐댔다. 결국 찾아낸 절충안은 상인을 발가벗기고 단검으로 발가락을 모조리 자르는 것이었다. 로렌스는 담담하게 기록했다.

“기이한 장면이었다. 그래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자비롭고 효과적인 방법처럼 보였다. 발가락이 잘린 그는 철로를 향해 손바닥과 무릎으로 기어서 한 시간 정도 가야 했는데, 벌거벗었기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는 바위 그늘에 몸을 숨겨야 했을 것이다.”

그 시르카시아인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태양이 이글이글하는 6월의 시리아 사막에 벌거벗겨진 채 불구가 된 사내를 내버려두고 떠나는 행동이 과연 자비였을까.

인문학 책으로 이례적인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1] 샌델 선생의 ‘정의란 무엇인가‘[2;p40]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대한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1명을 죽일지 5명을 죽일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Trolley problem의 실제 사례로서의 예시로 등장한다.

2005년 6월, 미 해군 특수부대 실(SEAL) 소속의 마커스 루트렐 하사와 수병 세 명이 파키스탄 국경과 가까운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탈레반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였다.37 정보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이들이 찾는 인물은 140~150명의 중무장 세력을 지휘하면서 험한 산악지대의 어느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특수부대 팀이 그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직후, 아프가니스탄 농부 두 명이 약 100마리의 염소를 몰고 나타났다. 일행에는 열네 살가량의 남자아이도 끼어 있었다. 모두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미군은 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땅에 앉으라는 시늉을 한 다음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했다. 염소치기들은 비무장 민간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들을 놓아주면 미군의 소재를 탈레반에게 알려줄 위험이 있었다.

미군은 몇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했는데, 밧줄이 없어서 이 염소치기들을 묶어놓고 다른 은신처를 찾을 수도 없었다. 유일한 선택은 이 들을 죽이든가 풀어주든가, 둘 중 하나였다.

한 사람은 염소치기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상관의 지시로 적의 전선 후방에서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우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군의 결정은 자명합니다. 저들을 놓아주는 것은 잘못입니다.’38 루트렐은 갈등했다. 그는 뒷날 이 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마음속으로는 그가 옳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분명 그들을 풀어줄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속에 또다른 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였다. 그가 내게 달려들었다. 무언가 내 마음 저편에서 줄곧 속삭였다. 무장하지 않은 저들을 냉정하게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고.”39 루트렐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의미인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양심상 염소치기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풀어주자는 쪽에 표를 던졌다(다른 한 명은 기권했다). 곧 후회할 결정이었다.

염소치기들을 풀어준 지 한 시간 반쯤 지나 미군 네 명은 AK-47과 휴대용 로켓발사기로 무장한 탈레반 80〜100명에게 포위되었다. 곧 이어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탈레반 무장 세력은 실 대원을 구출하려던 미군 헬리콤터 한 대까지 격추해, 그곳에 타고 있던 군인 열여섯 명을 모두 죽였다.

중상을 입은 루트렐은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11킬로미터를 기어서 파슈툰 마을에 도착했고, 그곳 사람들은 구출될 때까지 그를 탈레반의 눈에 띄지 않게 보호해주었다.

그때를 회상하던 루트렐은 염소치기를 죽이지 않는 쪽에 표를 던진 행동을 후회 했다. “내 평생 가장 어리석고. 가장 남부인스러운 덜 떨어진 결정이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책으로 썼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다. 사형집행을 승인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쪽에 표를 던졌다. (……) 적어도 지금 그 순간을 돌아보면 그렇다. (……) 그 결정적인 표는 내가 던졌고, 그 일은 이스트텍 사스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나를 괴롭힐 것이다.’40

 


37) Marcus Luttrell, with Patrick Robinson, Lone Survivor : The Eyewitness Account of Operation Redwing and the Lost Heroes of SEAL Team 10(New York: Little, Brown and Company, 2007).

38) Ibid, p. 205.

39) Ibid.

40) Ibid, pp. 206-207.

위 사건은 Operation Red Wings 도중에 일어난 일로서, 위에 언급된 책 Lone Survivor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역사는 반복되고, 전쟁은 언제나 비극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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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5
블룸버그 Tesla’s Autopilot Could Save the Lives of Millions, But It Will Kill Some People First 2019년 10월 9일 오후 6:00 GM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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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레 ‘정의란 무엇인가’ 100만부 돌파 2011-04-18 21:44
[2]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은이),이창신 (옮긴이) 김영사 2010-05-26 원제 :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오스만 투르크가 1차 대전에 참가한 이유

아라비아의 로렌스 – 전쟁, 속임수, 어리석은 제국주의 그리고 현대 중동의 탄생 | 걸작 논픽션 12
스콧 앤더슨 (지은이), 정태영 (옮긴이) 글항아리 2017-06-12

p151

1914년 여름, 유럽 전역에 전운이 짙게 깔리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통합진보위원회CUP 소속 주요 멤버들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CUP는 고참 위원들조차 나이가 30대에 불과한 젊은 위원회로, 그중 작은 정파를 형성한 세력은 연합국 세 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했다. 반면 32세의 전쟁성 장관 엔베르 파샤가 이끄는 정파는 동맹국과 연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8월 2일 오후, 장관은 독일과 상호 방위협정을 체결했고,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독일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전투를 개시했다. 절묘하게도 나쁜 타이밍이었다.

방위협정에 서명하는 순간까지 엔베르 파샤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서너 명을 제외한 다른 어떤 CUP 동지들과도 상의하지 않았다.14 더 놀라운 사실은 전쟁이 터지고 한 주가 지날 때까지 협정한 사실을 터키 정부 관계자 가운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일 동맹국 측이 다급해하자 나이 어린 전쟁 주무장관은 자신의 동료 장관들이 놀랄 수 있으니 사전 작업을 할 시간을 달라고까지 했다. 결국 전쟁성 장관의 깜짝 이벤트로 인해 중립을 고수하기로 했던 국가 전체와 청년튀르크당 지도부의 입장은 일거에 뒤바뀌고 말았다.

중립국 벨기에가 최근에 깨달았듯이 깜짝 이벤트는 독일의 주특기로, 엔베르는 적당한 동반자를 만난 셈이었다. 터키 쪽의 숨은 조력자를 얻고 싶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막스 폰 오펜하임이 부르짖는 범 이슬람 반란보다 더 나은 방책을 찾을 수 없었다. 영국 치하의 수많은 무슬림 지역(특히 영국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빼앗은 이집트)에서 이슬람 반란을 조장할 수 있다면 오스만 지도층과 대중에게 전쟁에 뛰어들 확실한 명분을 던져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14 터키-독일 동맹군은 양측 모두 비밀을 철저하게 지켰다. 독일이 엔베르와 비밀리에 협상을 진행하던 1914년 7월 29일, 터키 지역을 담당하던 리만 폰 잔더스 장군은 전쟁이 일어나면 독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탄원했다. 빌헬름 황제는 잔더스 장군의 전보를 읽고 귀퉁이에 적었다. “거기에 머물며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면서 반란을 조장해야 한다. 동맹을 추진하는 것도 모르는 작자가 무슨 총사령관이라고?!”

헐-_- 국가간의 외교적 관계가 너무 소수의 사람에 의해 결정되고, 그 여파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 미치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외교를 잘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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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30
아무거나 세계사 (7) –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ladenijoa.egloos.com)

[서평]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 G2 시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 G2 시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리처드 번스타인 (지은이),이재황 (옮긴이) 책과함께 2016-03-16 원제 : CHINA, 1945: Mao’s Revolution and America’s Fateful Choice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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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45년을 전후로 미중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역사적 과정을 짚는 책이다. 주로 미국의 대중정책이 어떻게 흘러갔고, 공산주의자들의 기만술과 미국의 외교적 오판들, 상황파악의 실패 등의 역사적 흐름을 짚고 있다.

근래 악화되는 한일 관계[1]를 보면서도 느끼는데, 외교의 중요성은 매우 크지만, 그에 비해 매우 소수의 사람에 의해 외교적 관계가 정립되고, 국가의 대외 정책결정과 운명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비슷한 사례로 일전에 본 크리스토퍼 선생의 저서[2]에서도 나오지만, 혼란스럽고 적대적인 대외 정책으로 인해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파국적 결말(1차 대전)으로 치닫는 것과 비슷해보여서 흥미롭다.

마찬가지로 2차 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일관성이 없이 혼란스럽고, 끊임없는 오판들 때문에 혼선을 빚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결국 마오쩌둥이 승리하기까지 미국과 중국은 적대적 관계에 이르렀고, 이것은 근래 들어 발생한 미중 무역갈등의 기저에 깔린 역사적 흐름이기도 하다.

근데 과연 미국이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아마 저자는 그렇지는 않은 걸로 보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도 어쨌든 마오쩌둥은 확고한 공산주의자였고, 스탈린식 지배욕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과는 좀 다른 미중관계가 형성되었을 수는 있을 지도 모른다. 특히 루즈벨트가 일본을 과대평가했던 오판이 아니었으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하간 중국의 공산 지배 결과, 한국 전쟁 때 중국이 참여하게 되었으니 우리들과도 아주 무관한 이야기는 아닐 듯 하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1930년대 후반~194년대 후반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따라, 미국의 대중 외교와 판단에 주목하고 있다. 일전에 본 디쾨터 선생의 인민 3부작[3]은 1948년 장춘 포위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 책과 겹치는 내용은 거의 없지만, 이 책과 같이 참고해서 보면 비교적 연속적으로 중국 현대사를 파악할 수 있는 책이 될 듯하다.

p80에 마르코 폴로가 건넜다는 이유로 마르코 폴로의 이름이 붙은 다리가 언급되는데, 건넜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동방견문록에서 너무 아름답다고 칭송했기 때문이다. ㅎㅎㅎ 일전에 본 김호동 선생의 저술[4]을 참고 바람.

p90에 Bloody Saturday라는 보도 사진이 언급되는데, 책에 사진이 없어서 검색해보니 위키피디아 항목이 있었다. 유명한 전쟁보도 사진들이 많은데, 개중에 유명한 것들은 일전에 본 책[5]에 몇몇이 있으니 참고 바람.

p103에 1942년 허난성 대기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에 관해 다룬 책[6]을 일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p156에 작가 님 웨일스가 언급되는데,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으면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사람이다. 독립운동가 김산의 생애를 쓴 이 국내에 번역출간[7]되어 있다. 근데 사놓고 아직 안 읽어봤음-_-

p319에 Alexander V. Pantsov와 Steven I. Levine이 저술한 마오의 전기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 책이 번역출간[8] 돼 있다. 이 책이 알라딘 중고 매물로 여러 권 나온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내일 사야지~ 하고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순식간에 절판 되었던 기억이 있다-_- 나름 인기가 있는 책인 듯? ㅋ

p335에 독소 불가침 조약 때문에 중국 공산당이 그때까지 비난하던 히틀러에게 갑작스럽게 찬사를 보내는 장면을 보니, 유명한 명작소설 1984의 그 장면이 생각난다. 일전에 sonnet 선생의 글[9]에도 이 부분이 인용된 적이 있었는데, 진짜 오웰 선생의 엄청난 선견지명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ㅎㅎ

p496에 Asymmetric warfare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처음 듣는 말이었다. 미국의 대 아프카니스탄 공격에서 탈레반의 전술과 당시 중국 공산당의 전술 상황이 얼마나 비슷한지 궁금해진다.

텍스트의 분량은 상당하므로 읽는 데 꽤 시간이 걸린다. 현대 중국과 미국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역사를 짚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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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근래 한일 관계에 대한 단상 2019년 7월 15일
[2] 내 백과사전 [서평]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2019년 6월 27일
[3] 내 백과사전 [서평] 해방의 비극, 마오의 대기근, 문화 대혁명 2018년 1월 5일
[4] 내 백과사전 [서평]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2017년 9월 14일
[5] 내 백과사전 [서평] 논쟁이 있는 사진의 역사 : 사진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사진 이야기2011년 12월 4일
[6] 내 백과사전 [서평] 1942 대기근 – 삼백만 명이 굶어죽은 허난 대기근을 추적하다 2017년 11월 2일
[7] 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은이),송영인 (옮긴이) 동녘 2005-08-15 원제 : Song of Ariran (1941년)
[8] 마오쩌둥 평전 – 현대 중국의 마지막 절대 권력자 알렉산더 V. 판초프, 스티븐 L. 레빈 (지은이), 심규호 (옮긴이) 민음사 2017-03-24 원제 : MAO: The Real Story (2012년)
[9] 『1984』(2) (sonnet.egloos.com)

[서평]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은이),이재만 (옮긴이) 책과함께 2019-01-28 원제 :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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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알기로 1차 세계대전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른다.

가브릴로 프린치프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 살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세르비아의 보호국을 자처하는 러시아가 동원령 발동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독일도 동원령 발동
프랑스-러시아 연합에 의해 프랑스도 동원령 발동
독일의 중립국 벨기에 침공으로 인해 영국도 참전
주요 강대국들이 전부 전쟁에 돌입함에 따라, 전세계 식민지들이 본국의 전쟁에 참여

뭐 이런 수순인데, 각 단계별로 현대인의 관점에서 공감하기 어렵거나,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의아한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는 훨씬 복잡한 외교관계와 각 국가가 타국을 보는 관점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책은 그러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주로 외교적 관점에서 추적하는 책이다.

1차 세계대전 관련 저술로 일전에 존 키건 선생의 저서[1]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은 반면에 순전히 군사적 관점의 저술이고, 1차 대전의 발생경과에 대한 설명은 수 페이지에 그친다. 근데 읽은지 하도 오래돼서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나서 대충 다시 봤다. 키건 선생의 책에는 큰 프레임으로서 사건 진행의 서술은 간략하게 되어 있지만, 크리스토퍼 선생의 책은 이를 확대하여, 국가들의 대외 정책과정에서 매우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비협조적이고 불명확한 정보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져 왔음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 훌륭하다.

애초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국경을 넘어서까지 타국의 황태자를 왜 살해했는지에 대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세르비아인의 민족주의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온다. 본 블로그에 일부 인용[2]을 해 두었으니 참고 바란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본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3]가 생각나는데, 전반적으로 진실과 상당히 동떨어진 면이 있지 않나 싶다. 그 때는 그 만화[3]를 추천했지만, 지금은 추천하지 않는다.

p235에 그레이트 게임이 언급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피터 홉커크 선생의 저서[4]가 볼만하다. 다만 피터 선생의 책은 러일전쟁에서 끝나지만, 이 책을 보니 실제로 영국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에서의 긴장관계는 1차 대전까지도 유지되는 것 같다. 피터 선생의 책에서는 영국 내에서 러시아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나빴는지에 대해 상세히 나오는데, 크리스토퍼 선생의 책을 보니 비단 영국 뿐아니라 외국을 대하는 주전론적 여론이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었던 것 같다.

p236에서 영국이 고립정책을 버리고 영일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는 영국의 국제관계를 약간 설명한다. 일전에 본 도널드 킨 선생의 저서[5]에서는 영국이 아쉬울 건 거의 없고, 일본이 근대화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일본쪽이 매달려서 동맹이 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영국도 나름 이해관계가 있는 동맹임을 알 수 있다.

p346에 슐리펜 계획이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연구를 짧게 언급하는데, 뒤쪽에 참고문헌을 확인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테렌스 주버 선생의 이름이 나온다. 이에 관해서는 길잃은어린양 선생의 블로그[6]에 상당히 상세히 쟁점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람.

p742부터 러시아가 왜 세르비아 문제에 개입했는지, 대외적으로 표명된 원인이 아닌 경제적 원인을 지목하고 있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대외적으로 표명된 주장 뒤쪽에 숨은 플레이어들의 내면적 의도를 간파하는데 많은 내용을 할애하고 있다. 이런 부분이 이 책의 탁월함이 아닐까 싶다.

각 국가들은 상호 적대감과 피해망상으로 인하여 상호 저신뢰 관계에 묶여있었고, 이로 인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체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결론을 알고 있는 후대인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선택들이었으나, 당대의 당사자들이 가진 정보와 관점에서는 나름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경제학에서 개별 플레이어가 각자 자신의 이익에 최선을 다하면 국부가 증대된다는 애덤 스미스류의 주장에 대한 생생한 반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전반적으로 1차 대전의 발생원인을 외교관계를 통해 해석하고 있고, 당대 복잡했던 사안과 사회적 분위기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추적하고 있다. 다체 문제보다도 복잡한 국가간의 외교관계를 풀어내면서, 개별 플레이어들의 당대 관점에서 사건을 이해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책 겉면에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처장이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이 책을 건네줬다고 나와 있던데, 검색해보니 2017년 12월에 북한을 방문했다[7]고 나온다. 그 때 준 모양이다. 아무래도 상호 저신뢰 관계 속에서 외교가 진행되면 궁극적으로 파국이 일어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텍스트의 분량이 상당하고, 당대 복잡한 사안에 대한 설명이 많아서 아무래도 유럽사에 관심이 좀 있어야 읽을만할 듯 하다. 읽기 빡셌다-_- 아무래도 상업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운 책 같아 보이는데, 이런 책이 번역되어 나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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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4

재생시간 8분 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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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세계대전사 (보급판) 존 키건 (지은이),조행복 (옮긴이)청어람미디어 2016-04-15 원제 : The First World War
[2] 내 백과사전 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기원 2019년 6월 4일
[3] 내 백과사전 [서평] 가브릴로 프린치프- 세기를 뒤흔든 청년 2014년 7월 18일
[4] 내 백과사전 [서평] 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2012년 12월 20일
[5] 내 백과사전 [서평] 메이지라는 시대 – 유신과 천황 그리고 근대화 2018년 7월 26일
[6] 슐리펜 계획에 대한 논쟁 S-2 (panzerbear.blogspot.com)
[7] 연합뉴스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 5일부터 나흘간 북한 방문 2017-12-05 02:37

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기원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은이),이재만 (옮긴이) 책과함께 2019-01-28 원제 :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2012년)

p64-73

심상지도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이라는 이념을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전환기 발칸의 정치지도와 거의 관련이 없는 세르비아의 심상이었다. 그 이념을 표현한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은 1844년 세르비아 내무장관 일리야 가라샤닌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공을 위해 작성한 비밀 의견서였다. 1906년에 발표된 이후 《나체르타니예(초기 세르비이어의 ‘náčrt’에서 유래한 단어로 ‘초안’ 이라는 뜻)라고 알려진 이 의견서에서 가라샤닌은 “세르비아의 국가정책과 외교정책을 위한 계획”을 약술했다. 이것이 수 세대에 걸쳐 세르비아 정치인과 애국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과장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체르타니예》는 곧바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대헌장이 되었다. 가라샤닌의 의견서는 세르비아가 “소국이지만 이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37라는 소견으로 시작한다. 그는 ‘민족통일의 원칙’이 세르비아 정책의 제1계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든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 국가의 국경 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르비아인 한 명이 거주하는 곳, 그곳이 세르비아다.” 이처럼 세르비아 국가를 확장해서 보는 역사적 근거는 스테판 두샨(1308~1355) 의 중세 제국이었다. 이 제국의 광대한 영토에는 오늘날의 세르비아 공화국 대부분에 더해 알바니아 전체, 마케도니아 대부분, 그리스 중부와 북부 전체가 포함되었다. 다만 흥미롭게도 보스니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두샨 차르의 제국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패한 이후 붕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가라샤닌에 따르면 이 퇴보로 인해 세르비아 국가의 정당성이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세르비아 국가의 역사적 존재가 중단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세르비아인을 통일하는 대大세르비아 ‘복원’은 혁신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적 권리의 표명이었다. “그들은〔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고, 혁명이나 격변을 야기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정치적 필연임을, 그 토대가 아주 먼 옛날에 있고 그 뿌리가 세르비아인의 과거 정치적 • 민족적 생활에 있음을 모두가 인정해야만 한다.”38 이렇듯 가라샤닌은 통합적 민족주의에 관한 담론에서 때때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하는 기법을 구사했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은 중세에 급속히 팽창한, 합성물 같았던 두샨 차르의 다종족 정치체를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근대 민족국가의 관념과 융합할 수 있다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애국자들은 그 논증에서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옛 제국의 영역에 거주하는 사실상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세르비아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근대 세르보크로아트어 문어의 설계자인 부크 카라지치는 유명한 민족주의 책자 《방방곡곡 세르비아인Srbi svi i svuda》의 저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티미쇼아라 바나트(헝가리 동부, 현재 루마니아 서부), ‘바치카(세르비아 북부에서부터 헝가리 남부까지 뻗은지역),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그리고 트리에스테부터 알바니아까지 아드리아해 연안 지방 등에 흩어져 있는, ‘세르비아어’를 말하는 세르비아인 500만 명에 대해 언급했다. 카라지치는 이 지역들에 (특히 크로아티아인을 염두에 두고서)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이라 부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도 점차 그 이름에 익숙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39

가라샤닌이 주장한 통일 계획에 따르면, 세르비아 정치체는 민족주의자들의 상상 속 대세르비아의 영토를 잠식하는 거대한 두 육상제국, 즉 오스만제국 및 오스트리아제국과 오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844년에 오스만제국은 여전히 발칸반도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튀르크 국가의 외벽에서 돌을 하나씩 끊임없이 빼내 흡수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래야 세르비아제국의 오래되고 훌륭한 토대 위에서 이 좋은 재료를 사용해 새롭고 위대한 세르비아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40 오스트리아 역시 적이 될 운명이었다.41 헝가리,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이스트리아-달마티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베오그라드 국가의 보호 아래 통일될 날을 기다리는 세르비아인(아직 세르비아 민족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크로아티아인은 말할 것도 없고)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가라샤닌의 의견서는 그 목표들이 대부분 실현된 1918년까지 세르비아 통치자들의 핵심적인 정책 청사진이었다. 또한 이 의견서의 지침들은 어느 정도는 정부에서 조직하고 어느 정도는 언론 내 애국자네트워크에서 책동한 민족주의적 선전을 통해 전체 인구에게 조금씩 알려졌다.42 그렇지만 대세르비아라는 비전은 정부 정책이나 선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비전은 세르비아인의 문화 및 정체성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두샨의 제국에 대한 기억은 세르비아의 유달리 생기 있는 서사민요 전통 안에서 울려퍼졌다. 이 서사민요는 긴 발라드로 대개 한 줄짜리 현악기인 구슬라의 구슬픈 반주에 맞추어 불렸으며, 가수와 청자는 세르비아 역사의 위대한 원형적 순간들을 다시 체험했다. 세르비아 전역의 마을과 시장에서 서사민요는 시, 역사, 정체성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했다. 일찍이 이 전통을 관찰한 독일 역사가 레오 폴트 폰 랑케는 1829년에 출간한 세르비아 역사서에 이렇게 썼다. “시로 읊는 이 나라의 역사는 시를 통해 국유자산으로 변모해왔고, 그 결과로 민족의 기억에 간직되어 있다.”43 무엇보다 이 전통 안에 간직되었던 것은 외세의 통치에 맞선 세르비아의 투쟁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람들을 거듭 사로잡은 사건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평원에서 세르비아인이 튀르크인에게 패한 전투였다. 이 중세 전투는 사실 그리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수백 년 동안 윤색되면서 세르비아 민족과 이교도 적의 대립을 상징하는 군사작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고난의 시기에 세르비아인을 결속 했던 빛나는 영웅들뿐 아니라 공동 대의에 대한 지원을 보류하거나 세르비아인을 적에게 팔아넘긴 간악한 악당들까지 등장하는 연대기가 코소보 전투를 휘감았다. 신화적 영웅 중에는 유명한 암살자 밀로시 오빌리치가 있는데, 서사민요는 전투를 치른 날에 그가 오스만군 본부에 잠입해 술탄을 살해한 뒤 근위병에게 체포되어 참수당 했다고 이야기한다. 암살, 순교, 희생, 망자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심은 서사민요의 주요 테마였다.44

신화적인 과거에 투영한 상상 속 세르비아는 이 민요 문화 안에서 찬란하게 되살아났다. 1875년 반오스만 봉기를 일으킨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의 서사민요 공연을 본 영국 외교관 아서 에번스 경은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로 하여금 (……) 한층 영광스러운 이 전설들 속에서 왕국의 좁은 전통을 잊게” 하고, 각자의 경험을 세르비아의 모든 땅에 사는 “형제들”의 경험과 합쳐지게 하고, 그리하여 “지리학자와 외교관의 허튼소리를 무시하게” 하는 공연의 효과에 감탄했다.45 19세기 들어 이런 구비서사시 문화가 대중 인쇄물로 대체되면서 점차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897년 세르비아를 여행하던 영국 외교관 찰스 엘리엇 경은 드리나강 골짜기의 시장들에서 떠돌이 연주자들의 서사민요 공연을 여전히 들을 수 있었다. “이 랩소디는 1현 기타의 반주에 맞추어 단조롭게 노래되지만 감정과 표현이 아주 진실해서 전체적인 효과는 나쁘지 않다.”46 여하튼 부크 카라지치가 편찬해 출간한 세르비아 서사시집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성장하는 문학 엘리트층에게 꾸준히 읽혔다. 더욱이 서사시 전체의 규모가 계속 커졌다. 1847년 몬테네그로의 군주 겸 주교인 페타르 2세 페트로비치-네고스는 이 장르의 고전이 된 《산의 화환》을 펴냈는데, 신화적인 술탄 암살자이자 민족의 순교자인 밀로시 오빌리치를 찬미하고 반외세 항쟁을 재개할 것을 주창하는 작품이었다. 《산의 화환》은 세르비아의 민족 정전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47 세르비아의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두 육상제국 사이에 끼인 매우 불리한 위치가 함께 작용한 결과, 세르비아의 외교정책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첫 번째는 지리적 초점의 불확정성이다. 대세르비아를 복원하려는 운동은 원칙상 하나였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디서부터 영토를 회복해야 하는가? 헝가리왕국에 속하는 보이보디나인가? ‘구舊세르비아’로 알려진 오스만령 코소보인가? 두샨의 제국에 속한 적은 없지만 상당히 많은 세르비아인 인구를 포함하는 보스니아인가? 아니면 여전히 오스만의 통치를 받고 있는 남쪽의 마케도니아인가? ‘통일’이라는 원대한 목표와 세르비아의 변변찮은 재정 • 군사 자원 사이의 간극이 컸던 탓에 베오그라드 정책수립자들은 발칸반도의 급변하는 정세에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44년부터 1914년까지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지향점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휙휙 돌아가곤 했다. 이런 갈팡질팡 정책은 대개 이미 일어난 사태에 대응해 정해졌다. 1848년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이 헝가리 혁명정부의 마자르화 정책에 반발해 봉기했을 때, 가라샤닌은 세르비아공국의 물자와 자원 병력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1875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세르비아 본국의 이목은 온통 그곳으로 쏠렸다(이 투쟁의 현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간 이들 가운데 군 지휘관으로서 가명으로 싸운 미래의 국왕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와 파시치가 있었다). 오스만령 마케도니아에서 튀르크인에 맞선 지역 봉기가 수포로 돌아간 1903년 이후에는 그곳의 세르비아인들을 해방시키는 목표에 관심이 집중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 병합하자(1878년부터 오스트리아가 군사 점령하고 있었다) 병합된 두 지역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1912년과 1913년에 최우선 의제는 다시 한 번 마케도니아였다.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수립자들은 이 나라의 정치문화를 뒤덮은 원대한 민족주의와 발칸반도의 복잡한 종족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신화적 영토의 중심이었지만 종족 면에서 명백한 세르비아 영토가 아니었다. 적어도 18세기부터 코소보의 다수집단은 알바니아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이었다.48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에서 부크 카라지치가 세르비아인으로 셈한 이들 중 다수는 실은 크로아티아인으로, 그들은 대세르비아에 합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역사상 세르비아의 일부였던 적이 없는 보스니아에는 많은 세르비아인(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점령된 187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인구의 43퍼센트였다)이 살고 있었지만, 가톨릭교도 크로아티아인(약 20퍼센트)과 무슬림 보스니아인(약 33퍼센트)도 있었다. (무슬림 소수집단이 상당수 살아남은 것은 보스니아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오랜 독립 투쟁을 거치면서 무슬림 공동체들이 대부분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국외로 이주하거나 강제로 추방되거나 살해당했다.)49

더욱 복잡한 사례는 마케도니아였다.
(중략)

민족들의 비전과 종족들의 현실이 어긋나는 상황에서 세르비아의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은 크고 작은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 차원만이 아니라 더 낮은 도시와 마을 차원에서도 폭력적 과정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세르비아의 일부 정치인들은 다종족 협력 관념을 포함하는 좀 더 관대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정치적 비전 안에 세르비아의 민족적 목표들을 포장해 넣는 방식으로 이 난제에 대처했다. 그중 한 명인 니콜라 파시치는 1890년대에 소수민족들이 쇠망하기 마련인 세계에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연합할 필요성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그렇지만 이런 수사의 밑바탕에는 첫째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본질적으로 같은 민족이고, 둘째로 오랫동안 “외국 문화의 영향”에 노출된 가톨릭교도 크로아티아인보다 세르비아인이 더 진정한 슬라브족이므로 세르비아인이 이 과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54

세르비아는 이런 목표를 공개적으로 추구할 형편이 못 되었다. 따라서 인접한 국가나 제국에 아직 종속되어 있는 세르비아인들을 ‘해방’ 시키는 계획을 어느 정도 비밀리에 추진해야 했다. 가라샤닌은 1848년 보이보디나 봉기 때 비밀공작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숙적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세르비아 민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치적 요인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개적으로 원조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비밀리에 원조할 수밖에 없다.”55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에서도 이런 비밀공작을 선호했다. 1903년 8월 마케도니아에서 반오스만 반란이 실패한 뒤, 카라조르제비치 신정권은 이 지역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인 게릴라의 활동을 책동할 위원회들을 설립했고, 전사단을 모집하고 공급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에서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베오그라드 주재 오스만 공사를 만난 세르비아 외무장관 류보미르 칼레비치는 세르비아 정부의 관여를 일체 부인했고, 그 회의가 “전사단을 모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국경 너머 같은 종교의 신자들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조의를 표하기 위해” 열렸으므로 여하튼 불법이 아니라고 항변했다.56

 


37. 《나체르타니예》 텍스트는 Dragoslav Stranjaković, ‘Kako postalo Garašaninovo “Načertanije”‘, in Spomenik Srpske Kraljevske Akademije, VCI(1939). pp. 64-115, 그중 p. 75 참조. Wolf Dietrich Behschnitt, Nationalismus bei Serben unci kroaten 1830-1914 (Munich, 1980), p. 55에서 인용.

38. Behschnitt, Nationalismus, p.57에서 인용; 또한 Horst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bei Serben und Kroaten im 19. Jahrhundert’, Österreichische Osthefte, 39 (1997), pp. 245 -54, 그중 247 -8 참조.

39. 《방방곡곡 세르비아인》 텍스트는 Vuk Stefanović Karadžić, Kovčežic za istoriju, jezik, običaje Srba sva tri zakona〔세 종파 모든 세르비아인의 역사, 언어, 민속의 보고〕(Vienna, 1849), pp. 1 -27, 그중 pp. 1. 7. 19, 22 참조;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 명칭을 채택하기를 거부한 수수께끼 같은 사정은 PP. 2-3: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p. 246 -7 참조.

40. Karadžić, Kovčežic, pp. 2 – 3;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 248.

41. Stranjaković, ‘Kako postalo Garašaninovo “Načertanije”‘. p. 84, Behschnitt, Nationalismus, p. 56에서 인용;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 249.

42. David MacKenzie. Serbia as Piedmont and the Yugoslav Idea, 1804 -1914 , East European Quarterly, 28 (1994), pp. 153—82, 그중 p. 160.

43. Leopold von Ranke, The History of Servia and the Servian Revolution, trans. Mrs Alexander Kerr (London, 1853), p. 52.

44. Tim Judah, The Serbs. History, Myth and the Destruction of Yugoslavia (2nd edn, New Haven, 2000), pp. 29 -47.

45. Arthur J. Evans, Through Bosnia and the Herzegovina on Foot during the Insurrection, August and September, 1875 (London, 1877), p. 139.

46. Barbara Jelavich, ‘Serbia in 1897: A Report of Sir Charles Eliot’,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18 (1958), pp. 183-9, 그중 p. 185.

47. Dedijer, Road to Sarajevo, pp. 250 — 60.

48. 구세르비아(코소보. 메토히야, 산자크, 부야노바츠로 이루어진)의 정확한 인구는 알려져 있지 않다’, Behschnitt, Nationalismus, p. 39 참조.

49. Justin McCarthy, Death and Exile. The Ethnic Cleansing of Ottoman Muslims, 1821 -1922 (Princeton, 1996). pp. 161 -4 외 여러 군데 참조.

54. Djordje Stanković, Nikola Paštć, saueznivi i stvaranje Jugoslavije (Zajecar, 1995). p. 29에서 인용;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본질적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파시치의 신념은 id., Nikola Paštć, Prilozi za biografiju, 특히 제1장 참조.

55. David MacKenzie, Ilja Garašanin: Balkan Bismarck (Boulder, 1985), p. 99에서 인용.

56. Vucinich, Serbia between East and West, p. 122.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왜 국경을 넘어서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영토를 시찰하는 황태자를 살해했는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심정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한 상황을 납득할만하게 설명해주는 전반적 설명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이 책 은근히 재밌네. ㅋㅋㅋ

통계로 쿠데타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한가?

요새 멍때리며 살고 있었더니만, 1999년부터 집권하고 있었던 알제리 독재자 Abdelaziz Bouteflika가 이달 초에 물러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_- 지난 아랍의 봄[1] 시절에 발생한 시위는 어째저째 버티더니만, 요번 시위에는 군부가 갑자기 Bouteflika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하면서 쿠데타 비스무리하게 나간 듯 하다.[2] 이거 스토리가 어째 2011년에 이집트 독재자 무바락이 물러나는 과정이랑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 앞으로 알제리가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 할 듯 하다.

한편 1989년부터 집권하던 수단 독재자 Omar al-Bashir가 지지난주에 쿠데타로 쫓겨났는데[3], 뭐 이 친구의 막장성-_-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드디어 나갈 때가 됐나 싶다. 지난 다르푸르 사태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영장을 발부한 걸 생깠다는-_- 이야기[4]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형식적으로나마 다당제 선거를 처음 실시한게 2010년이니까[5,6] 징하게도 해 먹었다-_-고 생각한다. 지난 남수단 독립[7] 건도 있고, 수단 자유 운동이나 신의 저항군 등등등 수단은 국가내 갈등이 너무 심한 나라라 어찌 흘러갈런지 모르겠구만.

여하간 이코노미스트지에 꽤 재미있는 기사[8]가 실려있던데, 통계적인 어프로치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연구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외국인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안정성이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일전에 대우 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 정부와 대규모 옥수수 농장 임대계약을 했다가 전직 디스크 쟈키-_-의 쿠데타[9] 이후 일방적인 계약파기[10]를 당하면서 낙동강 오리알 된 사건-_-이 생각나는구만.

One Earth Future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여러가지 팩터를 기반으로 쿠데타 발생확률을 예측하는 모델링을 연구하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CoupCast라고 한다. ㅎㅎㅎ 발상한번 기발하구만. ㅋㅋㅋ

강우량도 하나의 팩터가 되는 부분은 흥미롭다. 아무래도 농사를 망치면 그만큼 서민들의 생활에 임팩트가 있기 때문인 듯.

홈페이지[11]를 보면 국가별로 쿠데타 발생확률을 표시한 인터랙티브 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2019년도 이내에 쿠데타가 발생할 확률은 1.59%라고 나와있다. 이야~ 이거 데레스테[12]에서 시마무라 우즈키 픽업 가챠 확률보다도 높은데???? ㅋㅋㅋㅋㅋㅋㅋ 음.. 아무래도 이부분은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감이 있다.

예전에 쿠데타의 가장 큰 성공팩터는 스피드라는 주장[13]을 본 기억이 나는데, 2016년 터키 쿠데타의 실패의 이유 중 하나가 에르도안 체포 실패라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나름 설득력있는 주장 같다. 여하간 쿠데타는 간헐적으로 갑자기 발생한다는 점에서 포아송 분포 같은 거와 관련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도 좀 든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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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과일 가판대가 23년 간의 독재정권을 무너트렸다 2011년 1월 30일
[2] the National Interest Power Struggle: Why Algeria’s President Was Forced to Step Aside April 3, 2019
[3] 연합뉴스 30년 집권 바시르 수단 대통령, 군부 쿠데타로 축출돼(종합3보) 2019-04-11 21:38
[4] 이코노미스트 Catch me if you can Mar 28th 2009
[5] 이코노미스트 Better late than never Apr 12th 2010
[6] BBC Sudan holds landmark multi-party elections 22:22 GMT, Sunday, 11 April 2010 23:22 UK
[7] 내 백과사전 남수단 독립 선거 2010년 10월 6일
[8] 이코노미스트 How to predict when a despot will fall Apr 17th 2019
[9] 이코노미스트 An odd way to change a government Mar 19th 2009
[10] BBC Madagascar leader axes land deal 15:49 GMT, Thursday, 19 March 2009
[11] COUPCAST (oefresearch.org)
[12] 내 백과사전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스타라이트 스테이지 アイドルマスター シンデレラガールズ スターライトステージ 2017년 2월 10일
[13] 조선시대 쿠데타 : 쿠데타에 성공하려면, 병사 몇명이 필요했을까? (blog.naver.com/alsn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