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수학으로 평양 고지도 분석??

교수신문에서 topology를 써서 평양 고지도를 분석했다는 엉터리 연구[1]에 세금이 쓰이고 논문이 철회되지도 않았다는 기사[2]를 봤다.

헐-_- 놀라운 이야기라 검색을 해 봤는데, 꽤 많은 언론에서 이 내용을 이미 기사화[3,4,5] 했더만. ㅎㅎㅎ 한겨레에도 기사가 있었는데, 벌써 눈치까고 내린 것 같다-_- 월간인물 기사[5]에 genus를 이용하였다는 언급이 조금 있다. 뭐 소규모 언론사는 글을 주는 대로 쓰는 듯 하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을 듯 하다.

논문의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작년에 역사학자인 이문영 선생과 기경량 선생이 자신의 블로그에 반박글[6,7]을 자세하게 써 놓았다. 기경량 선생은 교수신문[2] 뿐만 아니라 뉴스톱[8]에도 글을 쓰신 듯.

일전에 두 문화 이야기[9]를 했지만, 단일분야/파편적 증거로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보통 위험한 듯 하다. 설령 위상수학으로 어떤 관련성을 보았다 하더라도, 각종 기록 자료나 역사학적 뒷받침이 있어야 이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종 학계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크로스 체킹이 중요한 듯 하다.

여하간 저번 경상대의 아가왈 수-_-[10] 사건[11]과 더불어 인하대도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하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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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acksun, Jung & Choi, Q-Heung. (2017). 위상수학 교육과 묘청의 서경 평양성 고지도 분석에의 응용. Journal of Education & Culture. 23. 271-296. doi:10.24159/joec.2017.23.6.271
[2] 교수신문 엉터리 학술, 마비된 학계검증 시스템 2019.01.28 10:52
[3] 국민일보 최규흥 인하대 수학교육과 명예교수, 수학으로 우리나라 고지도 분석 논문 발표 ‘월간 인물’ 1월호 보세요 2018-01-18 16:46
[4] 디지털타임즈 인하대 최규흥 교수, 고려영토 중국으로 확장 수학적으로 입증 2018-01-18 12:35
[5] 월간인물 세계최초 수학으로 고지도를 분석하여 고려 서경 평양 위치를 찾다 2018.01.05 12:02
[6] 고려 평양이 중국 요양이라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 (orumi.egloos.com)
[7] 수학으로 푼 고지도? 언론과 학술지의 총체적인 문제다 (kirang.tistory.com)
[8] 뉴스톱 평양 위치가 중국? 엉터리 연구에 놀아난 한국 2018.01.22 02:23
[9] 내 백과사전 고고학의 두 문화(two cultures) 2018년 5월 14일
[10] ‘세계 1% 연구자’를 둘러싼 논란 (brunch.co.kr/@dkam)
[11] 내 백과사전 약탈적 저널 : 오픈 액세스 운동의 부작용 2018년 12월 26일

1913년의 비엔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하면 수리논리학의 성지라 할 수 있는데, 일전에 이야기한 적[1]이 있다. 죽기 전에 함 가봐야 할 텐데 ㅋㅋㅋ

1913년의 빈에 살고 있었던 인물들에 대햔 기사[2]를 봤는데 쓸데없이 재밌어서 포스팅함. ㅋ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13년의 빈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38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도망칠 때까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빈에서 살았다고 한다.

히틀러도 비엔나에 5년간 거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지냈던 모양인데, 비엔나 미술 대학에 응시하였다가 두 번이나 낙방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트로츠키도 1913년 비엔나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기사[2]에 따르면 히틀러와 남서쪽으로 1마일정도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이 Lev Davidovich Bronstein인 줄은 몰랐네. ㅎ

당시 크라쿠프에 거주하였으나 자주 비엔나에 방문했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트로츠키는 비엔나의 유명한 까페들 중의 한 곳에서 사람을 자주 만났던 모양이다. 이오시프 스탈린과도 까페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당시 스탈린의 몰골이 거지꼴-_-이라서 트로츠키가 쉽게 사람을 알아봤다고 한다. 스탈린은 비엔나에 매우 짧은 기간만 체류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Marxism and the National Question”이라는 소책자를 쓴다.

스탈린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유고슬라비아의 독재자였던 티토가 살았다고 한다.

동일 도시의 4마일 내에 이렇게나 유명한 인물들이 동시에 있었던 것은 아마 우연이겠지만, 서로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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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비엔나의 Reichsrat 까페 :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처음 발표한 곳 2014년 7월 25일
[2] The Vintage News Vienna 1913 – Home of the Dictators who Shaped the 20th Century Nov 29, 2018

1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별 세수 변화

황금 족쇄 –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배리 아이켄그린 (지은이), 박복영 (옮긴이) | 미지북스 | 2016-12-10 | 원제 Golden Fetters: The Gold Standard and the Great Depression, 1919-1939 (1992년)

p144-149

관리들은 이런 덤불 속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미리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 거의 없었다. 런던에서 유행한 이야기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육군, 해군, 수송 및 조달에 관해서는 준비 작업을 마쳤지만, 자금 조달에 관해서는 전쟁이 선포되고서야 비로소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어느 정부도 전쟁에 비용이 얼마나 들지 예측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해군이 동맹군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적군을 봉쇄하면 대규모 상비군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전쟁 계획을 세웠다. 독일작전참모부는 전투가 아무리 길어도 2년 내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 큰 비용을 치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각국 정부는 세금 인상을 미뤘다. 세금 인상의 거부는 선전 효과가 있었다. 즉 독일과 프랑스 모두 자신들의 튼튼한 재정 상황을 과시하기 위해 세금 인상을 삼가려고 했다.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선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계산에서는 배상금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적국이 결국에는 채무와 은행권을 상환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차입이나 통화 발행을 통해 전쟁 자금을 조달했다. 대부분의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재무부 장관을 지낸 보수주의 경제학자 카를 헬페리흐는 “평화가 찾아온 뒤, 우리 적들에게 우리가 지불한 전쟁 비용의 청구서를 제시할 것이다”고 말했다.19

따라서 “각국 정부는 신용의 운전대를 꽉 쥐고 있었다.”20 전쟁 첫 해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앙 정부 지출 중 세금으로 조달된 비중은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표 3.1을 보라). 이 비중은 그 후에 훨씬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주요 참전국들이 세금을 통해 경상 지출을 충당한 비율은 3분의 1에도 미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세수 확대 노력이 매우 미미했다. 전시 부채의 지불 유예 조항에 따라 도시 임차인과 소작농은 징집되었을 경우 지대 납부를 면제받았는데 이 때문에 지주의 과세 대상 소득이 줄어들었다. 세무 관리들은, 군인 가족은 기소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쟁 기간은 “황금시대, 세금도 없고 지대도 없고 빚도 갚을 필요가 없는 멋진 시간이었기에, 전쟁이 끝나는 것을 크게 아쉬워했다” 는 냉소적인 묘사도 있었다.21 1914년 말경의 조세 수입은 평상시의 6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의회는 간접세, 주로 관세와 소비세를 인상했다. 그러나 간접세는 이미 높은 수준이어서 세수가 더 늘어날 여지가 크지 않았다. 전쟁으로 소비재 수입이 위축되어 관세 수입 역시 줄어들었다. 1916년, 한때 사회당 당원이었던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리더십하에서 채택된 전쟁 이윤세War Profit Tax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세수 전체에서 직접세 비중은 20% 근처에 줄곧 머물렀다. 1914년에 표결된 소득세는 3년 후에나 실행되었으며 1918년까지는 그 기여분이 정부 수입의 5% 미만이었다. 1917년 6월이 되어서야 관세를 제외한 총세수가 전전 수준을 회복했다.22

독일의 재정 노력은 더욱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독일제국은 전비 지출에서 8%만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23 이것은 독일에서 중앙 정부와 각 주들 사이에 명확한 분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1871년 헌법에 따라 직접세 부과 권한을 각 주가 가지고 있었다. 각 주들은 이런 세금의 주요 수익자로서 평상시 정부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24 주 수준에서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던 엘리트들은 전시에도 직접세의 통제권을 제국으로 넘기는 것을 주저했다. 직접세 수입이 전쟁을 거치면서 두 배가 되었지만, 전시 자금 조달에서는 미미한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독일제국은 거의 전적으로 간접세 (관세와 소비세의 비중이 비슷했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국이 식료품을 비롯한 필수품 수입에 대해 관세를 유예한 이후에는 관세 수입이 뚝 떨어졌다. 정부는 제국중앙은행, 석탄, 철도 여행 등에 대해 추가 세금을 부과했다. 1918년에 음료와 사치재에 대해 새로운 소비세가 부과되었다. 주들도 적자를 겪었지만 중앙 정부에 비하면 적자 규모는 작았다. 제국과 주의 지출을 합하면, 정부 지출 대비 적자 비율이 92에서 83으로 떨어졌다.25

소득세가 존재하고 직접세 부과 원칙이 확고히 자리 잡혀 있던 영국에서는 세수를 늘리는 것이 더 용이했다. 독일에서는 직접세 수입이 전쟁 기간에 두 배가 되었지만, 영국에서는 네 배가 되었다.26 소득세와 부가세의 세율이 1914년 11월에 배로 올랐다. 1913~1914년과 1918~1919년 사이에 정상 소득세율은 5배가 되었다. 전시 특수로 혜택을 입은 기업에 대한 군수세와 초과 이윤세가 소득세를 보완했다.27 간접세 부과에는 소홀했다. “노동자 계급의 반발”을 야기 할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맥주와 차에 대한 세금이 인상되었다.28 영국 정부는 자유 무역 전통과 결별하고 수입 자동차, 영화, 벽시계, 손목시계, 악기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그런데도 영국 세수 전체 중 직접세 비중은 1913~1914년의 60% 미만에서 전쟁 후반의 80%로 올라갔다. 이후 사람들은 영국이 예산 관리에 “미온적”이었다고 비판하지만, 프랑스나 독일과 비교하면 영국은 전시 지출 중 인상적일 정도로 큰 비중을 세금으로 충당하는 데 성공했다.29

미국은 전통적으로 연방 세수를 관세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쟁 직전 미국의 산업계는 7% 최고 세율의 소득세를 대가로 수입 원자재에 대한 관세 인하를 얻어냈다. 1909년에 이윤이 5000달러를 초과한 기업에게 처음으로 부과된 1%의 법인세가 1913년에는 모든 기업에 부과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면서 관세 수입이 하락하자, 미국 재정 당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직접세로 눈을 돌렸다. 당국은 1916년 소득세 기준 세율을 두 배로 올렸고 2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해 누진세를 부과했다. 독일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자, 기업과 합자 회사에 대해 기존 세금에다가 초과 이윤세를 추가해서 부과했다. 전쟁 비용 중 3분의 1은 세금으로 충당하고 3분의 2는 대출로 충당한다는 것이 재무부의 계산이었다. 개인 소득세의 누진 세율은 63%까지 인상되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높았다. 자본 이득에 대해서는 최고 60%의 세율이 적용되었다. 1917년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와 이윤세가 관세 수입을 초과하게 되었다.30

각국의 이런 조세 정책은 비판에 직면했다. 관리들은 예산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즉 전시 지출을 세수로 충당하고 국가 재정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세금 인상이라는 쓴 약을 처방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 중 일부는 타당성이 떨어졌다. 건전한 비평가들은 군사비 지출이라는 일시 프로그램 비용은 장기간에 걸쳐 분산되어야 하고, 사실상 미래 세대가 분담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31 전시에 정치가들이 이기심과 편의주의 때문에 그 부담을 미래로 지나치게 많이 이전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 정치적 논란은 세대 간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납세자들 사이에서 그 부담을 나누는 데서 발생했다. 관리들이 어떤 전략을 추구하든 전전 상태와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세금 부담과 소득 분배에 관한 합의를 뒤집어 놓았다. 전쟁이 끝나자, 부자들은 새로운 소득세를 폐지해야 하고 기존 세금도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노동계 대표들은 전쟁 관련 산업 분야의 소유주와 경영자들이 얻은 막대한 이윤과 자본 이득을 재분배하기 위한 자본 과세를 요구했다. 재정시스템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모든 노력은 정부 재정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이어지면서 엉키게 되었다. 전쟁 영웅의 나라에서는 전쟁 연금, 의료 지원, 실업 수당, 주거 지원금 등을 제공해야 했다.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다. 문제는 전전의 방식대로 징수를 해야 하느냐 아니면 전시의 임시방편들을 계속 연장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후 각국 정부가 직면한 최대의 논란거리였다.

적절한 과세 프로그램에 대해 합의를 이룰 수 없었던 정부는 부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참전국들 중 영국과 미국은 장기 대출을 통해 전시 예산 적자를 충당하는데 가장 성공한 나라였다. 영국 정부는 재무부 단기 채권 발행과 잉글랜드은행 대출로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세 번에 걸쳐 대규모 장기 차입을 했다. 첫 번째 차입 에서는 대규모 금융 기관과 10만 명의 재력가들이 채권을 인수했다. 두 번째 차입을 위해서는 100만 명 이상의 저축을 동원해야 했는데, 채권 인수자들 중에는 일반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는 재무부가 국내 저축을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했다. 예를 들면, 채권의 인수 기간을 정하지 않은 채 전쟁 채권을 계속해서 발행했다.

 


19. Bogart, Ernest Ludlow (1921), War Costs and Their Financing,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186쪽에서 인용
20. Birck, L. V. (1927) The Public Debt, New York: The Dial Press 226쪽
21. Gide, M. Charles (1919), “French War Budgets for 1919-1920”, Economic Journal 29, 129쪽
22. Charbonnet, Germain (1922), La politique financier de la France pendant la guerre, Bordeaux: Imprimerie de L’Université; Fisk, Harvey E. (1922), French Public Finance in the Great War and To-day, New York: Bankers Trust Company 29~31쪽; Flora, Peter (1983), State, Economy, and Society in Western Europe, 1815-1915, Volume 1, Frankfurt am Main: Campus Verlag. 300쪽; Peel, George (1925), The Financial Crisis in France, London: Macmillan and Co. 101쪽; Germain-Martin, Louis (1936), Le problème financier 1930-1936, Paris: Domat-Montchristien. 3~4부를 참고하라.
23. 표 3.1은 Balderston, T. (1989), “War Finance and Inflation in Britain and Germany, 1914-1918,” Economic History Review, sec. ser. 42, pp. 222-244을 따라 경상수입에서 정부채 매입을 통해 경감된 세금부담을 제외하였으며, 공식 통계상의 1918/1919년 지출 추정치를 같은 기간 제국의 미지불 채무 증가액으로 올렸다.
24. 상세한 것은 Holtfrerich, Carl-Ludwig (1986b), The German Inflation, 1914-1923, New York: Walter de Gruyter., 109~110쪽과 Witt (1987), 여러 곳을 보라.
25. Balderston, T. (1989), “War Finance and Inflation in Britain and Germany, 1914-1918,” Economic History Review, sec. ser. 42. 225쪽
26. 위의 책 230쪽
27. 처음에는 전전 수준을 초과한 이윤의 50%를, 1917년부터는 80%를 초과 이윤세로 부과했는데, 이 세금이 1914년에서 1920년 사이 총세수의 약 25%를 차지했다. Grady, Henry F. (1927), British War Finance 1914-1919,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Hicks, J. R., U. K. Hicks, L. Rostas (1941), The Taxation of War Wealth, Oxford: Clarendon Press (second ed.).를 보라.
28. Stamp, Sir Josiah (1932), Taxation During the War, London: Humphrey Milford. 29쪽
29. Morgan, E. Victor (1952), Studies in British Financial Policy, London: Macmillan. 94쪽. 그리고 Balderston, T. (1989), “War Finance and Inflation in Britain and Germany, 1914-1918,” Economic History Review, sec. ser. 42.를 보라.
30. Bogart, Ernest Ludlow (1921), War Costs and Their Financing,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295쪽, Gilbert, Charles (1970), American Financing of World War I, Westport, Conn.: Greenwood Publishing Corp. 제 5장. 세금 3분의 1, 대출 3분의 2의 정책은 Annual Report, the Secretary of the Tresury for 1918, 47~49쪽에 명시되어 있다.
31. ‘조세 평준화tax smoothing’에 관한 최근 연구들은 정부 지출의 일시적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차입하는 것이 분명히 타당함을 보여준다. 세율이 올라가면 왜곡된 세금 부과로 인해 사회 후생의 상실deadweight loss도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권자의 후생 극대화를 추구하는 정부는 시기에 따라 상대적으로 일정한 세율을 유지하려는 유인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 지출이 특별히 높을 때는 차입을 하고 지출 수요가 상대적으로 낮을 때는 채무를 상환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한 참고문헌은 Barro, Robert J. (1979), “On the Determination of the Public Debt,”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87, pp.940-971에서 찾을 수 있다.

위 참고 문헌 중 Witt (1987)은 뭔지 모르겠음.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이와 같은 전후 배상금 기대감이 2차 세계 대전의 근원이 된 듯 하다. 왠지 독일 배상금이 엄청나더니만 이런 사정이 있었군. ㅎㅎ

한편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양차 대전으로 인해 증가된 직접세는 불평등을 감소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피케티 선생의 책[1]에서도 본 듯한데, 연관이 있는 내용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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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은이), 장경덕 (옮긴이),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09-12 | 원제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2014년)

[서평]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은이), 이순호 (옮긴이) | 갈라파고스 | 2017-12-22 | 원제 Spain In Our Hearts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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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이념들의 도가니였고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기도 했던 스페인 내전사에 대해 관심이 있어 본 책이다. 내전 전체를 조망하는 책은 아니고, 내전 당시 참가했던 국제여단과 미국인 중심으로 몇몇 인물들의 행로를 추적하는 점에서, 전쟁 속 미시 사건에 더 주목을 하고 있으나,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전황설명이나 당대의 분위기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타국의 내전속에 휘말린 미국인들의 운명이나 행로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는 관련없지만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1]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스페인 내전의 전반적인 전황과 복잡한 정치적 흐름은 앤터니 비버 선생의 책[2]을 참고하는 편이 좋다. 국제여단에 대해서는 일전에 한국일보의 기사[3]에 대체적으로 잘 나와 있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먼저 알고 읽는 편이 좋다고 본다.

서문[4]을 읽어봤을 때부터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이상을 꿈꾸던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에 퇴역해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감상적이다. 독서 결정 여부에 도움이 되도록 서문의 일부를 별도로 인용을 해 두었다.

이 책 안에서 일전에 본 오웰카탈로니아 찬가[5]를 많이 인용하는데, 읽은지 오래 되다보니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 일전에 빠트린 11장을 포함하여 다시 읽어봤다. 당시 POUM이 불법인 이유가 아나키즘 노선을 따랐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다-_- 젠장. POUM은 트로츠키 노선을 따랐기 때문인 듯 하다. 뭐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공산주의자와 사이가 안 좋았으니 언제나 탄압 대상이긴 하다. ㅎ

한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흥미로운 아나키즘 병영문화에 대한 묘사[5;p40]는 무척 흥미로왔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이상적으로 잘 작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p195) ㅎㅎㅎ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바르셀로나 전화교환국에서의 총격전에 대한 묘사[5;10장]도, 전황에 대한 본서의 설명(p271)을 보니 좀 더 상황이 이해가 된다.

미국 석유기업인 Texaco가 프랑코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야기는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석유의 외상지원과 더불어 공화파 배편의 이동정보를 독일에게 넘겨주는 이야기 등, 여러모로 책의 본 목적인 미시사와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나름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아무래도 미국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 듯 하다.

스페인의 운명은 이웃나라에서 결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의 내전과도 많이 겹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가는 개인의 역사를 조망한다는 측면에서 현장감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위키피디아에 별도 항목이 있는 걸 보면 나름 인지도가 있는 책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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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은이), 정윤미 (옮긴이) | 살림 | 2009-05-20 | 원제 The Coldest Winter
[2] 내 백과사전 [서평]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2010년 12월 13일
[3] 한국일보 반파시즘 세계연대… 국제여단이 일깨운 것 2014.12.15 13:58
[4] 내 백과사전 ‘Spain In Our Hearts’ 서문 중에서 2018년 12월 5일
[5] 내 백과사전 [서평] 카탈로니아 찬가 2015년 2월 13일

‘Spain In Our Hearts’ 서문 중에서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은이), 이순호 (옮긴이) | 갈라파고스 | 2017-12-22 | 원제 Spain In Our Hearts (2016년)

p11-19

(전략)

머나먼 타국의 강변에서 네 명의 미국인이 조우한 전쟁은 스페인의 역사를 바꿔놓은 주요 사건이었다. 급부상하는 파시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유럽에서는 이 전쟁이 도덕과 정치의 시금석, 다가올 세계대전의 서막으로도 인식되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미국인도 대략 2,800명이었으며, 이 중 750여 명이 전사했다.5 20세기에 미군이 참전한 그 어느 전쟁들 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스페인 내전은 다수의 퇴역병과 일부 미국 특파원들에게도 그들 삶을 결정지은 주요한 경험이었다. 매슈스가 “이 세상 어디든, 남자든 여자든, 나는 스페인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만난다. 동종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6라고 쓴 대로였다. 내전을 취재한 기자들은 미국 저널리즘의 관례마저 무너뜨리며, 참전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동지애를 느꼈다. 스페인 내전 앞에서는 일체의 허식을 떨쳐버린 것이다. 1938년 봄 공화파군이 프랑코군의 맹공을 피해 도망칠 때 《뉴욕 타임스》 특파원 매슈스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특파원이, 기자이면서도 개인 자격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화국에 무기를 지원해 주도록 간청하는 전문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7

스페인 내전은 그 뒤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에 묻혀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서는 대체로 사라졌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미국인 수천만 명이 그 소식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뉴욕타임스》만 해도 1936년 중엽부터 1939년 초까지 계속된 내전 기간 동안 그와 관련된 기사를 1,000번 이상이나 1면 헤드라인으로 실었다.8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 나치 독일의 부상, 대공황으로 초래된 재앙을 포함해 다른 모든 기사들을 실은 횟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 미국 정부와 달리, 일반 미국인들은 공화파와 국가주의자 양쪽 모두에 깊숙이 관여했다. 미국 의용병들에게 폭격을 가하고 기총소사를 퍼부은 나치 전투기와 폭격기에 연료를 대준 사람도 다름 아닌, 우익 독재자들을 좋아하고 허세가 심했던 텍사스의 오일맨이었다.

내가 스페인 내전을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중엽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신문사의 선배 기자 두 명이 미국 지원병들을 비공식적으로 부르는 호칭이던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의 퇴역병이었던 것이 내가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지금 기억하기로, 그때 나는 내전 때 구급차를 운전한 선배 기자에게 스페인 내전을 어떻게 회상하느냐고 물었다.9 그러자 수동 타자기와 전신기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 식자공에게 기사를 보낼 때 기송관에서 나는 휙 소리 너머로 그가 뉴스룸에서 흔히 오가는 농담과는 확연히 다른 진지한 어조로 “이겼으면 좋았겠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바람과 달리 공화국은 패했고, 그 후에도 내전에는 얼마 간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전이 프랑코 반군의 승리로 끝난 이듬해에 발간되어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소설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만 해도,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내전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분위기로 충만하다. 스페인 내전은 당대에 일어난 그 어느 사건보다 “만일의 문제”를 많이 야기시키기도 했다. 만일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구매를 원했던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다면? 그랬다면 그 무기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보내준 비행기, 잠수함, 군대를 쳐부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끝내는 다른 십 수 개 나라들도 침략했을까? 만일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다면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한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다른 방식의 전쟁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을까? 이런 문제들 말이다.

미국 의용병들도 대부분 자신들이 세계대전의 전초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4년 전에 그들은 이미 스페인에서 나치 전투기의 폭격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스페인 내전을 그 시대의 시험대로 생각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도 많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도 이런 글을 썼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가슴 속에 모두 스페인을 간직하고 있다. … 옳은데도 패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이길 수 있으며, 용기가 보상받지 못한 시대가 있다는 것을 체득한 곳이 바로 스페인이었다.”10

스페인의 위기에 대해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선명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파시즘이 급속히 확산되자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여기서 저항하지 않으면 어디서 저항하겠느냐는 것과도 같았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내전에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 뒤 인권운동 시위, 1960년대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 1980년대의 중앙아메리카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 퇴역병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내가 보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전에 참가한 의용병들도 여럿 만나고, 그중 두 사람과는 몇 년 간 친구로도 지냈다(그러고 보니 책에는 짧게 언급되었지만, 어릴 때 내가 사고를 당했을 때 상처를 꿰매준 외과의사 자크 그룬블랏 박사도 스페인 내전의 퇴역병이었다). 어느 날에는 이 책의 1장에 등장하는 부부의 남편이 버클리대학교의 대학원생이던 1930년대에 내가 지금 사는 곳에서 고작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백번도 더 지나쳤을 건물에 그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한층 용이해지는 느낌이었다. 사회적 정의에 관심을 가진 우리 모두는 정치적 조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남녀들-여자 의용병들은 대개 간호사로 지원했는데 대략 75명 정도였다-이야말로 정치적 조상이 아니겠는가.

나는 1960년대 세대의 사람들 못지않게 그것을 강하게 느꼈다. 시공간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 시대에 살았다면 스페인으로 갔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물론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알려진 것보다 어둡고 그리 낭만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계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소련만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으나, 나중에 스페인이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만 해도 그렇다. 실제로나 상상으로나 일부 스페인 사람들은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특징이던, 적에 대한 잔혹함의 희생양이 되었다.

(중략 : 소련에서 희생된 스페인인들의 이야기)

스페인 내전의 이 두 얼굴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군사반란에 저항한 스페인인들의 행위는 물론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코 정부만큼이나 잔혹했던 소련과의 얽히고설킨 관계만으로 공화파가 패한 것이었을까? 공화국 수호자들은 가장 비열한 동맹국의 하나를 위해서도 싸웠지만 가장 훌륭한 대의 가운데 하나를 위해서도 싸웠기에 묻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점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기는 했을까? 아니 생존을 위한 절박한 전쟁이었던 만큼 피아를 구분할 여유조차 없지 않았을까? 이런 문제들도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 대다수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공산주의가 왜 그처럼 강한 호소력을 가졌고, 소련이 왜 다수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비쳐졌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인터내서널가〉를 처음 들은 것은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의 의용병 가운데 한 명의 장례식 때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가 스페인을 떠난 지 65년이 지나고 미국 공산당과 결별한 지는 45년이 지난 뒤에 치러진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찬가였던 〈인터내셔널가〉가 그 무렵에는 젊은 시절의 꿈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몇몇 노인들에 의해서만 불리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무정부주의도 대개는 기반을 상실하고, 그 이념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옛 논거들도 중세의 종교 분쟁만큼이나 아득하고 멀게 느껴진다.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에 봉착해 더는 지속될 수 없다는 신념과 누구의 청사진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은 있을지언정, 미래의 청사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광범위한 신념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비록 그 신념은 낯설게 느껴질지라도, 1930년대의 스페인에 만연한 다른 양상들은 현재의 많은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주의적 독재정권과 토지, 교육,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오랫동안 공정한 분배를 거부당한 수백만 명의 힘없는 사람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그렇다. 1930년대의 스페인이 그 시대의 주요 전역이 되고, 우리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전역이 된 것도 그래서였다.

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밖에도 또 있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전쟁, 특히 베트남,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이라크 혹은 여타 나라들에서 일어난 내전이나, 혹은 다른 나라 내정에 미국 정부가 간섭하는 것에 50년 가까이 맹렬하게 저항해왔다. 그런데 유독 스페인 내전에는 그때 미국이 관여했더라면 세계가 한층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전 세대 미국인들도 영웅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다 보니 먼 타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때는 따로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은 다수의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의 내전에 참여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그것도 미국 정부의 끈질긴 방해를 물리치고 행한 일이었다. 참여자들의 출신 성분도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온 빈자와 부자, 아이비리그 졸업생, 화물열차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다닌 사람들 등 다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그곳에 감으로써 자신들, 전쟁, 자신들이 지켜주려고 한 나라, 자신들이 떠나온 나라에 대해 무엇을 배웠을까? 혹시 나중에 그 일을 후회한 사람은 있었을까?

이 시기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일부 미국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가 행하는 전투에 이끌려 스페인에 간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전선 뒤에서 벌어진 사회혁명에 이끌려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용병들이 스페인에 오기 몇 달 전에 이미 신혼여행차 스페인 땅을 밟은 정열적인 켄터키 여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무리의 사람들도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나 자신이 해외에서 자주 취재를 하고 때로는 분쟁 지역에서 취재 활동을 해온 저널리스트이다 보니, 이제는 다분히 신화적 존재가 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미국 기자들의 면면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이다. 매슈스, 헤밍웨이, 그들의 동료 기자들은 기사를 정직하게 썼을까? 열정-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장에서 취재하는 특파원이 백악관에 전문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에 하는 말이다-이 지나쳐 기사를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의 삶을 조사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범위를 조금 넓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영국인 세 명-미국인들 편에서 싸운 사람, 미국인들에 맞서 싸운 사람, 모든 미국 독자들이 알만한 사람-도 조사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도 스페인 내전의 역사만은 아니며,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만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격동의 시대에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너 삶의 진로를 택한 일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물론 역사는 말끔하게 포장된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당시 스페인에 간 남녀들 중에는 아무리 용기 있게 행동했다 해도 지금 시각으로는 환상과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이상주의와 용기가 지혜와 언제나 같을 수는 없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알아가고, 그들이 속한 시기와 장소에서 나라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내가 그들의 삶을 알기 위해 그들의 후손을 만나고,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를 찾아다니며, 벽장이나 서랍속에 오랫동안 쑤셔 박혀있던 문서들을 끄집어내고, 마지막에는 에브로 강가를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5. 이 수치에는 의료 지원병들도 포함돼 있다. 크리스토퍼 브룩스가 관리하는 ALBA 데이터베이스에는 미국인 의용병이 2,644명, 사망자가 734명으로 데이터가 정리돼 있다. 그러나 브룩스도 그렇고, 링컨 대대를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은 실제로는 의용병과 사망자 수가 그보다 많았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책의 본문 175쪽에도 언급되었듯, 링컨 대대와 관련된 일부 초기 기록물들이 트럭 두 대와 함께 사라진 것이 숫자의 정확성을 기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1938년 3월과 4월의 혼란스러웠던 퇴각 때처럼, 다른 때에는 그보다 더 많은 기록물이 분실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6. Matthews, Herbert L. The Education of a Correspondent. New York: Harcourt Brace, 1946, p. 67.

7.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빈센트 쉬안 기자가 전문을 보낸 부분은 Voros, Sandor American Commissar. Philadelphia: Chilton, 1961, pp. 430-431을 참조할 것. 매슈스는 “전투기 200대를 즉시 보내지 않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고 말하는 전문을 여러 매개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James Roosevelt papers, Franklin D. Roosevelt Presidential Library, Hyde Park, NY. Box 62에 나타난 것처럼 《시카고 트리뷴》의 제이 앨런 기자도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남 제임스 루스벨트에게 전문을 보냈다.

8. Chapman, Michael E. Arguing Americanism: Franco Lobbyists, Roosevelt’s Foreign Policy and the Spanish civil War, Kent, OH: Kent State University Press, 2011, pp. 226-227.

9. 교육부 기자 제임스 베넷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일한 또 다른 링컨 대대의 퇴역병이었다.

10. L’Espagne libre(Paris: Calmann-Lévy, 1946),p. 9.

Tetteh Quarshie : 가나의 문익점

이코노미스트지[1]를 읽다가 관련정보를 검색하다가, 위키피디아를 읽다가, 읽은게 아까워서 포스팅 함 해봄. ㅋㅋㅋ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cacao라는 단어는 맥시코 중부지방에서 널리 쓰였던 고대 나후아틀어 단어 cacahuatl이 스페인어로 넘어오면서 cacao가 되었다고 한다. 시기는 아마 스페인이 마야문명을 파괴하던 때 근처가 아닐까 싶다. 코코아는 원래 카카오 나무의 씨를 가공한 것을 가리켰던 모양인데, 현대에서는 두 단어를 동일한 의미로 혼용하는 듯 하다. 이코노미스트지[1]에서도 실제로 cacao라고 써야겠지만 cocoa라고 쓰고 있다.

가나 하면, 막장정치가 판치는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 가운데 드물게 민주주의가 번성하는 지역인데,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를 적어도 두 번 이상 경험한 적(2008년, 2016년)이 있다. 일전에 아프리카 민주화 도표[2]를 참고하기 바란다.

1876년 당시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비오코 섬에서 카카오가 재배되고 있었던 모양인데, 가나 출신의 대장장이였던 Tetteh Quarshie라는 사람이 카카오 콩을 공구함에 몰래 넣어서 가나로 밀수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현재 가나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듯.

위키피디아를 보니 나름 장인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던 모양인데, 취미가 농사였다고 한다. 여하간 그 덕에 가나와 코트디부아르는 합쳐서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카카오 산업이 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앙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식물이 현재는 아프리카에 더 널리 번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ㅎ 우리가 맛있게 먹는 초코렛도 어찌보면 이 사람의 유산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예전에 원자재 전문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카카오 생산량을 추정하기 위해,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일대를 순찰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기억이 안 나네-_- 지난 2008년에 이 지역의 흉년 + 투기세력 덕분에 국제 카카오 가격이 폭등한 사건[3]이 생각난다. 당분 매니아들은 아무래도 이 지역의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해야 할 듯 하다. ㅎㅎ

여하간 Tetteh Quarshie는 카카오 씨를 뿌려서 작물을 키워내는데 성공하여 친구와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생산량 증대로 점차 주변국으로 수출하기에 이른 듯 하다. 1892년 크리스마스에 사망하였다니 성공적으로 재배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었던 듯 하다. 지금은 이 사람의 이름을 기념하는 병원도 있는 듯. 한국의 문익점 보다 더 대접을 받는 것 같다. ㅎ

간장 발효를 위한 미생물을 코 속에 넣어 가져온 이야기[4]도 생각나는데, 여하간 문익점 이야기는 이래저래 뭔가 흥미로운 것 같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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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코노미스트 Cocoa processing is not a golden ticket for west Africa Nov 15th 2018
[2] 내 백과사전 아프리카의 민주화 2010년 7월 31일
[3] Cocoa 폭등 (skynet.tistory.com)
[4] 내 백과사전 [노컷피플] ”간장의 달인” 오경환 샘표식품 상무 2014년 5월 25일

자연어 처리로 Voynich manuscript를 해독하기

갑자기 미야자키 이치사다 선생의 말[1]이 생각나는데, 고문서 해독은 당대의 언어와 문화 전반에 걸쳐 두루 꿰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샹폴리옹이 고대 이집트 신성문자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개고생-_-을 했는지, 일전에 읽은 Roy와 Lesley의 책[2]에 잘 나와 있다.

미해독된 고대 필사본들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이 Voynich manuscript인데, 많이들 들어보셨을 터이다. 현재까지 해독이 되지 않고 있는 문서인데, 위키피디아를 보니 양피지의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으로 대략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악명높은 고문서를 자연어 처리 기법으로 뚫어보려는 시도[3]가 있었는 듯 하다. 2016년 논문이라 좀 오래 됐는데, 나는 방금 봤으므로-_- 걍 포스팅 함. ㅋㅋㅋ

Alberta 대학 소속의 자연어 처리 연구자인 Greg Kondrak 선생이 Voynich manuscript를 해독하려고 시도한 모양인데, 무료로 논문을 볼 수 있다. 논문 앞쪽[3;p77]에는 암호해독의 정석 중의 정석인 frequency attack과 문자들 사이의 이산 거리 확률을 비교하는 시도를 한 듯 한데, 이렇게 오랫동안 해독되지 않은 문서에 그런 흔한 방법이 통할런지 의문이다. ㅎ

여하간 캐릭터 빈도 분석과 anagram 분석을 이용해서 통계적인 자연어 처리 방식으로 어느 언어인지 맞추기를 시도한 듯 한데, 세계 인권 선언에 들어 있는 380개 언어들과 비교한 결과 히브리 어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을 내린 듯 하다. 근데 위키피디아를 보니 유대인 매거진인 Mosaic에서 그럴리 없다고 주장[4]하는 듯. ㅋ 논문의 몇몇 가정이 매우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듯 한데, 뭐 본인은 히브리 어는 전혀 모르니 넘어갑시다. ㅋ

여하간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통계적 접근을 했다지만, 그 기반은 매우 잘 알려진 고전적 암호해독 기법인데, 히브리 어가 정말 정답이라면 과거 누군가는 히브리 어로 해독을 시도해 이미 풀렸을 가능성이 높을 듯 하다. 역시 고문서를 해독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문화와 배경을 연결해야 가능하지, 문자만으로는 곤란하다고 본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꽤나 회의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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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15
voynich manuscript 보이니치 필사본 (jayhoon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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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의 한마디(宮崎市定) (sonnet.egloos.com)
[2] 내 백과사전 [서평] 문자를 향한 열정 : 세계 최초로 로제타석을 해독한 샹폴리옹 이야기 2012년 7월 14일
[3] Hauer, B., & Kondrak, G. (2016). Decoding Anagrammed Texts Written in an Unknown Language and Script. Transactions Of The Association For Computational Linguistics, 4, 75-86. Retrieved from https://transacl.org/ojs/index.php/tacl/article/view/821
[4] Mosaic No, the Mysterious Voynich Manuscript Is Not Written in Hebrew FEB. 7 2018

데이터 분석으로 비교한 역사상 최고의 장군?

흥미로운 글[1]을 봐서 그냥 포스팅해 봄. ㅋ

농구에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ins Above Replacement; WAR)라는 시스템이 있는 듯 한데, 나는 스포츠에 문외한이라 처음 듣는 이야기다. ㅎ

WAR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듯 한데, 어떤 선수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선수로 대체된 것 보다 팀의 승리에 얼마나 더 기여를 했는지, 점수로 정량화하여 승리 기여도를 평가하는 시스템 같다. 농구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가???

뭐 여하간 이 아이디어에 기반하여, 역사상 각종 전투에 대해 장군들의 WAR 평가 시스템을 적용하면, 누가 뛰어난 장군이었는지 비교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같다. ㅎㅎ 블로그 저자가 직접 만든 인터랙티브 페이지[2]가 있으니 직접 클릭해서 확인하기 바란다.


전쟁 데이터는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대부분 구했다고 한다. 카이사르 같은 고대 장군도 있고, 마마보이-_-[3] 맥아더 같은 현대의 장군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 같은 일본의 장수도 포함된 듯 한데, 영문 위키피디아가 부실한건지 몰라도 이순신은 없는 듯. ㅎㅎ 대부분 장군들의 WAR 점수가 하단부에 있는 반면에, 최우측 상단에 아웃라이어가 한 명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WAR 점수가 16.703으로서 2위의 두 배가 넘는다.

나폴레옹하면 Nasica 선생의 블로그[4]가 떠오르는데, 웬만한 책보다도 더 많은 나폴레옹 시대의 정보가 있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 나름 인기가 있는 사람인 듯 하다. 나폴레옹에 관심있으면 이 블로그[4]의 정독을 추천함. ㅎㅎ

글[1]의 뒷부분에 현대의 장군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알렉산더 대왕한니발의 비교도 잠시 언급되어 있다. 근데 포위섬멸작전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캐니 전투의 위키피디아 내용이 엄청 자세하구만. ㅋ 우리로 치면 고조선 끝자락인데, 기원전 전투를 어째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지 신박하네. ㅋ 훨씬 후대인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만 하더라도 자세한 tactics는 거의 알려진게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뭐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은 결과지만, 단 한 명이 유럽 전체를 뒤흔든 역사 무용담을 들어보면 나폴레옹이 진짜 역사상 최고의 장군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 하긴 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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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apoleon was the Best General Ever, and the Math Proves it. (towardsdatascience.com)
[2] https://ethanarsht.github.io/military_rankings/
[3] 내 백과사전 더글라스 맥아더의 성격 2011년 3월 1일
[4] Nasica의 뜻은 ? (nasica1.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