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기원

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은이),이재만 (옮긴이) 책과함께 2019-01-28 원제 :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2012년)

p64-73

심상지도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이라는 이념을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전환기 발칸의 정치지도와 거의 관련이 없는 세르비아의 심상이었다. 그 이념을 표현한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은 1844년 세르비아 내무장관 일리야 가라샤닌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공을 위해 작성한 비밀 의견서였다. 1906년에 발표된 이후 《나체르타니예(초기 세르비이어의 ‘náčrt’에서 유래한 단어로 ‘초안’ 이라는 뜻)라고 알려진 이 의견서에서 가라샤닌은 “세르비아의 국가정책과 외교정책을 위한 계획”을 약술했다. 이것이 수 세대에 걸쳐 세르비아 정치인과 애국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과장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체르타니예》는 곧바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대헌장이 되었다. 가라샤닌의 의견서는 세르비아가 “소국이지만 이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37라는 소견으로 시작한다. 그는 ‘민족통일의 원칙’이 세르비아 정책의 제1계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든 세르비아인이 세르비아 국가의 국경 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세르비아인 한 명이 거주하는 곳, 그곳이 세르비아다.” 이처럼 세르비아 국가를 확장해서 보는 역사적 근거는 스테판 두샨(1308~1355) 의 중세 제국이었다. 이 제국의 광대한 영토에는 오늘날의 세르비아 공화국 대부분에 더해 알바니아 전체, 마케도니아 대부분, 그리스 중부와 북부 전체가 포함되었다. 다만 흥미롭게도 보스니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두샨 차르의 제국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패한 이후 붕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가라샤닌에 따르면 이 퇴보로 인해 세르비아 국가의 정당성이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세르비아 국가의 역사적 존재가 중단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세르비아인을 통일하는 대大세르비아 ‘복원’은 혁신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적 권리의 표명이었다. “그들은〔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고, 혁명이나 격변을 야기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정치적 필연임을, 그 토대가 아주 먼 옛날에 있고 그 뿌리가 세르비아인의 과거 정치적 • 민족적 생활에 있음을 모두가 인정해야만 한다.”38 이렇듯 가라샤닌은 통합적 민족주의에 관한 담론에서 때때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하는 기법을 구사했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은 중세에 급속히 팽창한, 합성물 같았던 두샨 차르의 다종족 정치체를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근대 민족국가의 관념과 융합할 수 있다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애국자들은 그 논증에서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옛 제국의 영역에 거주하는 사실상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세르비아인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근대 세르보크로아트어 문어의 설계자인 부크 카라지치는 유명한 민족주의 책자 《방방곡곡 세르비아인Srbi svi i svuda》의 저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티미쇼아라 바나트(헝가리 동부, 현재 루마니아 서부), ‘바치카(세르비아 북부에서부터 헝가리 남부까지 뻗은지역),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그리고 트리에스테부터 알바니아까지 아드리아해 연안 지방 등에 흩어져 있는, ‘세르비아어’를 말하는 세르비아인 500만 명에 대해 언급했다. 카라지치는 이 지역들에 (특히 크로아티아인을 염두에 두고서) “스스로를 세르비아인이라 부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들도 점차 그 이름에 익숙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39

가라샤닌이 주장한 통일 계획에 따르면, 세르비아 정치체는 민족주의자들의 상상 속 대세르비아의 영토를 잠식하는 거대한 두 육상제국, 즉 오스만제국 및 오스트리아제국과 오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844년에 오스만제국은 여전히 발칸반도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튀르크 국가의 외벽에서 돌을 하나씩 끊임없이 빼내 흡수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래야 세르비아제국의 오래되고 훌륭한 토대 위에서 이 좋은 재료를 사용해 새롭고 위대한 세르비아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40 오스트리아 역시 적이 될 운명이었다.41 헝가리,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이스트리아-달마티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베오그라드 국가의 보호 아래 통일될 날을 기다리는 세르비아인(아직 세르비아 민족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크로아티아인은 말할 것도 없고)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가라샤닌의 의견서는 그 목표들이 대부분 실현된 1918년까지 세르비아 통치자들의 핵심적인 정책 청사진이었다. 또한 이 의견서의 지침들은 어느 정도는 정부에서 조직하고 어느 정도는 언론 내 애국자네트워크에서 책동한 민족주의적 선전을 통해 전체 인구에게 조금씩 알려졌다.42 그렇지만 대세르비아라는 비전은 정부 정책이나 선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비전은 세르비아인의 문화 및 정체성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두샨의 제국에 대한 기억은 세르비아의 유달리 생기 있는 서사민요 전통 안에서 울려퍼졌다. 이 서사민요는 긴 발라드로 대개 한 줄짜리 현악기인 구슬라의 구슬픈 반주에 맞추어 불렸으며, 가수와 청자는 세르비아 역사의 위대한 원형적 순간들을 다시 체험했다. 세르비아 전역의 마을과 시장에서 서사민요는 시, 역사, 정체성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했다. 일찍이 이 전통을 관찰한 독일 역사가 레오 폴트 폰 랑케는 1829년에 출간한 세르비아 역사서에 이렇게 썼다. “시로 읊는 이 나라의 역사는 시를 통해 국유자산으로 변모해왔고, 그 결과로 민족의 기억에 간직되어 있다.”43 무엇보다 이 전통 안에 간직되었던 것은 외세의 통치에 맞선 세르비아의 투쟁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람들을 거듭 사로잡은 사건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평원에서 세르비아인이 튀르크인에게 패한 전투였다. 이 중세 전투는 사실 그리 결정적인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수백 년 동안 윤색되면서 세르비아 민족과 이교도 적의 대립을 상징하는 군사작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고난의 시기에 세르비아인을 결속 했던 빛나는 영웅들뿐 아니라 공동 대의에 대한 지원을 보류하거나 세르비아인을 적에게 팔아넘긴 간악한 악당들까지 등장하는 연대기가 코소보 전투를 휘감았다. 신화적 영웅 중에는 유명한 암살자 밀로시 오빌리치가 있는데, 서사민요는 전투를 치른 날에 그가 오스만군 본부에 잠입해 술탄을 살해한 뒤 근위병에게 체포되어 참수당 했다고 이야기한다. 암살, 순교, 희생, 망자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심은 서사민요의 주요 테마였다.44

신화적인 과거에 투영한 상상 속 세르비아는 이 민요 문화 안에서 찬란하게 되살아났다. 1875년 반오스만 봉기를 일으킨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의 서사민요 공연을 본 영국 외교관 아서 에번스 경은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로 하여금 (……) 한층 영광스러운 이 전설들 속에서 왕국의 좁은 전통을 잊게” 하고, 각자의 경험을 세르비아의 모든 땅에 사는 “형제들”의 경험과 합쳐지게 하고, 그리하여 “지리학자와 외교관의 허튼소리를 무시하게” 하는 공연의 효과에 감탄했다.45 19세기 들어 이런 구비서사시 문화가 대중 인쇄물로 대체되면서 점차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897년 세르비아를 여행하던 영국 외교관 찰스 엘리엇 경은 드리나강 골짜기의 시장들에서 떠돌이 연주자들의 서사민요 공연을 여전히 들을 수 있었다. “이 랩소디는 1현 기타의 반주에 맞추어 단조롭게 노래되지만 감정과 표현이 아주 진실해서 전체적인 효과는 나쁘지 않다.”46 여하튼 부크 카라지치가 편찬해 출간한 세르비아 서사시집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성장하는 문학 엘리트층에게 꾸준히 읽혔다. 더욱이 서사시 전체의 규모가 계속 커졌다. 1847년 몬테네그로의 군주 겸 주교인 페타르 2세 페트로비치-네고스는 이 장르의 고전이 된 《산의 화환》을 펴냈는데, 신화적인 술탄 암살자이자 민족의 순교자인 밀로시 오빌리치를 찬미하고 반외세 항쟁을 재개할 것을 주창하는 작품이었다. 《산의 화환》은 세르비아의 민족 정전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47 세르비아의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두 육상제국 사이에 끼인 매우 불리한 위치가 함께 작용한 결과, 세르비아의 외교정책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첫 번째는 지리적 초점의 불확정성이다. 대세르비아를 복원하려는 운동은 원칙상 하나였다. 그렇지만 정확히 어디서부터 영토를 회복해야 하는가? 헝가리왕국에 속하는 보이보디나인가? ‘구舊세르비아’로 알려진 오스만령 코소보인가? 두샨의 제국에 속한 적은 없지만 상당히 많은 세르비아인 인구를 포함하는 보스니아인가? 아니면 여전히 오스만의 통치를 받고 있는 남쪽의 마케도니아인가? ‘통일’이라는 원대한 목표와 세르비아의 변변찮은 재정 • 군사 자원 사이의 간극이 컸던 탓에 베오그라드 정책수립자들은 발칸반도의 급변하는 정세에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844년부터 1914년까지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지향점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휙휙 돌아가곤 했다. 이런 갈팡질팡 정책은 대개 이미 일어난 사태에 대응해 정해졌다. 1848년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이 헝가리 혁명정부의 마자르화 정책에 반발해 봉기했을 때, 가라샤닌은 세르비아공국의 물자와 자원 병력으로 그들을 지원했다. 1875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오스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자 세르비아 본국의 이목은 온통 그곳으로 쏠렸다(이 투쟁의 현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간 이들 가운데 군 지휘관으로서 가명으로 싸운 미래의 국왕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와 파시치가 있었다). 오스만령 마케도니아에서 튀르크인에 맞선 지역 봉기가 수포로 돌아간 1903년 이후에는 그곳의 세르비아인들을 해방시키는 목표에 관심이 집중 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 병합하자(1878년부터 오스트리아가 군사 점령하고 있었다) 병합된 두 지역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1912년과 1913년에 최우선 의제는 다시 한 번 마케도니아였다.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수립자들은 이 나라의 정치문화를 뒤덮은 원대한 민족주의와 발칸반도의 복잡한 종족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신화적 영토의 중심이었지만 종족 면에서 명백한 세르비아 영토가 아니었다. 적어도 18세기부터 코소보의 다수집단은 알바니아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이었다.48 달마티아와 이스트리아에서 부크 카라지치가 세르비아인으로 셈한 이들 중 다수는 실은 크로아티아인으로, 그들은 대세르비아에 합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역사상 세르비아의 일부였던 적이 없는 보스니아에는 많은 세르비아인(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점령된 187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인구의 43퍼센트였다)이 살고 있었지만, 가톨릭교도 크로아티아인(약 20퍼센트)과 무슬림 보스니아인(약 33퍼센트)도 있었다. (무슬림 소수집단이 상당수 살아남은 것은 보스니아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세르비아에서는 오랜 독립 투쟁을 거치면서 무슬림 공동체들이 대부분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국외로 이주하거나 강제로 추방되거나 살해당했다.)49

더욱 복잡한 사례는 마케도니아였다.
(중략)

민족들의 비전과 종족들의 현실이 어긋나는 상황에서 세르비아의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은 크고 작은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 차원만이 아니라 더 낮은 도시와 마을 차원에서도 폭력적 과정이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세르비아의 일부 정치인들은 다종족 협력 관념을 포함하는 좀 더 관대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정치적 비전 안에 세르비아의 민족적 목표들을 포장해 넣는 방식으로 이 난제에 대처했다. 그중 한 명인 니콜라 파시치는 1890년대에 소수민족들이 쇠망하기 마련인 세계에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연합할 필요성에 대해 긴 글을 썼다. 그렇지만 이런 수사의 밑바탕에는 첫째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본질적으로 같은 민족이고, 둘째로 오랫동안 “외국 문화의 영향”에 노출된 가톨릭교도 크로아티아인보다 세르비아인이 더 진정한 슬라브족이므로 세르비아인이 이 과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54

세르비아는 이런 목표를 공개적으로 추구할 형편이 못 되었다. 따라서 인접한 국가나 제국에 아직 종속되어 있는 세르비아인들을 ‘해방’ 시키는 계획을 어느 정도 비밀리에 추진해야 했다. 가라샤닌은 1848년 보이보디나 봉기 때 비밀공작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숙적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모든 세르비아 민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다. (……) 그러나 정치적 요인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공개적으로 원조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비밀리에 원조할 수밖에 없다.”55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에서도 이런 비밀공작을 선호했다. 1903년 8월 마케도니아에서 반오스만 반란이 실패한 뒤, 카라조르제비치 신정권은 이 지역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인 게릴라의 활동을 책동할 위원회들을 설립했고, 전사단을 모집하고 공급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에서 수차례 회의를 열었다. 베오그라드 주재 오스만 공사를 만난 세르비아 외무장관 류보미르 칼레비치는 세르비아 정부의 관여를 일체 부인했고, 그 회의가 “전사단을 모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국경 너머 같은 종교의 신자들을 위해 기금을 모으고 조의를 표하기 위해” 열렸으므로 여하튼 불법이 아니라고 항변했다.56

 


37. 《나체르타니예》 텍스트는 Dragoslav Stranjaković, ‘Kako postalo Garašaninovo “Načertanije”‘, in Spomenik Srpske Kraljevske Akademije, VCI(1939). pp. 64-115, 그중 p. 75 참조. Wolf Dietrich Behschnitt, Nationalismus bei Serben unci kroaten 1830-1914 (Munich, 1980), p. 55에서 인용.

38. Behschnitt, Nationalismus, p.57에서 인용; 또한 Horst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bei Serben und Kroaten im 19. Jahrhundert’, Österreichische Osthefte, 39 (1997), pp. 245 -54, 그중 247 -8 참조.

39. 《방방곡곡 세르비아인》 텍스트는 Vuk Stefanović Karadžić, Kovčežic za istoriju, jezik, običaje Srba sva tri zakona〔세 종파 모든 세르비아인의 역사, 언어, 민속의 보고〕(Vienna, 1849), pp. 1 -27, 그중 pp. 1. 7. 19, 22 참조;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 명칭을 채택하기를 거부한 수수께끼 같은 사정은 PP. 2-3: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p. 246 -7 참조.

40. Karadžić, Kovčežic, pp. 2 – 3;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 248.

41. Stranjaković, ‘Kako postalo Garašaninovo “Načertanije”‘. p. 84, Behschnitt, Nationalismus, p. 56에서 인용; Haselsteiner, ‘Nationale Expansionsvorstellungen’, p. 249.

42. David MacKenzie. Serbia as Piedmont and the Yugoslav Idea, 1804 -1914 , East European Quarterly, 28 (1994), pp. 153—82, 그중 p. 160.

43. Leopold von Ranke, The History of Servia and the Servian Revolution, trans. Mrs Alexander Kerr (London, 1853), p. 52.

44. Tim Judah, The Serbs. History, Myth and the Destruction of Yugoslavia (2nd edn, New Haven, 2000), pp. 29 -47.

45. Arthur J. Evans, Through Bosnia and the Herzegovina on Foot during the Insurrection, August and September, 1875 (London, 1877), p. 139.

46. Barbara Jelavich, ‘Serbia in 1897: A Report of Sir Charles Eliot’, Journal of Central European Affairs, 18 (1958), pp. 183-9, 그중 p. 185.

47. Dedijer, Road to Sarajevo, pp. 250 — 60.

48. 구세르비아(코소보. 메토히야, 산자크, 부야노바츠로 이루어진)의 정확한 인구는 알려져 있지 않다’, Behschnitt, Nationalismus, p. 39 참조.

49. Justin McCarthy, Death and Exile. The Ethnic Cleansing of Ottoman Muslims, 1821 -1922 (Princeton, 1996). pp. 161 -4 외 여러 군데 참조.

54. Djordje Stanković, Nikola Paštć, saueznivi i stvaranje Jugoslavije (Zajecar, 1995). p. 29에서 인용;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본질적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파시치의 신념은 id., Nikola Paštć, Prilozi za biografiju, 특히 제1장 참조.

55. David MacKenzie, Ilja Garašanin: Balkan Bismarck (Boulder, 1985), p. 99에서 인용.

56. Vucinich, Serbia between East and West, p. 122.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왜 국경을 넘어서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영토를 시찰하는 황태자를 살해했는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심정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한 상황을 납득할만하게 설명해주는 전반적 설명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이 책 은근히 재밌네. ㅋㅋㅋ

통계로 쿠데타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한가?

요새 멍때리며 살고 있었더니만, 1999년부터 집권하고 있었던 알제리 독재자 Abdelaziz Bouteflika가 이달 초에 물러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_- 지난 아랍의 봄[1] 시절에 발생한 시위는 어째저째 버티더니만, 요번 시위에는 군부가 갑자기 Bouteflika에게 적대적으로 돌변하면서 쿠데타 비스무리하게 나간 듯 하다.[2] 이거 스토리가 어째 2011년에 이집트 독재자 무바락이 물러나는 과정이랑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 앞으로 알제리가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 할 듯 하다.

한편 1989년부터 집권하던 수단 독재자 Omar al-Bashir가 지지난주에 쿠데타로 쫓겨났는데[3], 뭐 이 친구의 막장성-_-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서, 드디어 나갈 때가 됐나 싶다. 지난 다르푸르 사태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영장을 발부한 걸 생깠다는-_- 이야기[4]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형식적으로나마 다당제 선거를 처음 실시한게 2010년이니까[5,6] 징하게도 해 먹었다-_-고 생각한다. 지난 남수단 독립[7] 건도 있고, 수단 자유 운동이나 신의 저항군 등등등 수단은 국가내 갈등이 너무 심한 나라라 어찌 흘러갈런지 모르겠구만.

여하간 이코노미스트지에 꽤 재미있는 기사[8]가 실려있던데, 통계적인 어프로치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연구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외국인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안정성이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일전에 대우 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 정부와 대규모 옥수수 농장 임대계약을 했다가 전직 디스크 쟈키-_-의 쿠데타[9] 이후 일방적인 계약파기[10]를 당하면서 낙동강 오리알 된 사건-_-이 생각나는구만.

One Earth Future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여러가지 팩터를 기반으로 쿠데타 발생확률을 예측하는 모델링을 연구하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CoupCast라고 한다. ㅎㅎㅎ 발상한번 기발하구만. ㅋㅋㅋ

강우량도 하나의 팩터가 되는 부분은 흥미롭다. 아무래도 농사를 망치면 그만큼 서민들의 생활에 임팩트가 있기 때문인 듯.

홈페이지[11]를 보면 국가별로 쿠데타 발생확률을 표시한 인터랙티브 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2019년도 이내에 쿠데타가 발생할 확률은 1.59%라고 나와있다. 이야~ 이거 데레스테에서 시마무라 우즈키 픽업 가챠 확률보다도 높은데???? ㅋㅋㅋㅋㅋㅋㅋ 음.. 아무래도 이부분은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감이 있다.

예전에 쿠데타의 가장 큰 성공팩터는 스피드라는 주장[12]을 본 기억이 나는데, 2016년 터키 쿠데타의 실패의 이유 중 하나가 에르도안 체포 실패라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나름 설득력있는 주장 같다. 여하간 쿠데타는 간헐적으로 갑자기 발생한다는 점에서 포아송 분포 같은 거와 관련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도 좀 든다. ㅎ

.


[1] 내 백과사전 과일 가판대가 23년 간의 독재정권을 무너트렸다 2011년 1월 30일
[2] the National Interest Power Struggle: Why Algeria’s President Was Forced to Step Aside April 3, 2019
[3] 연합뉴스 30년 집권 바시르 수단 대통령, 군부 쿠데타로 축출돼(종합3보) 2019-04-11 21:38
[4] 이코노미스트 Catch me if you can Mar 28th 2009
[5] 이코노미스트 Better late than never Apr 12th 2010
[6] BBC Sudan holds landmark multi-party elections 22:22 GMT, Sunday, 11 April 2010 23:22 UK
[7] 내 백과사전 남수단 독립 선거 2010년 10월 6일
[8] 이코노미스트 How to predict when a despot will fall Apr 17th 2019
[9] 이코노미스트 An odd way to change a government Mar 19th 2009
[10] BBC Madagascar leader axes land deal 15:49 GMT, Thursday, 19 March 2009
[11] COUPCAST (oefresearch.org)
[12] 조선시대 쿠데타 : 쿠데타에 성공하려면, 병사 몇명이 필요했을까? (blog.naver.com/alsn76)

Sweetheart grip의 진화

사진기의 발명 이래로, 군인들은 항상 곁에 두는 생활 물품에 애인이나 가족 사진을 넣는 일을 해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라, 많은 군인들이 피스톨 손잡이에 자신의 애인이나 가족 사진을 넣어두곤 했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는 [3]임.

이른바 Sweetheart grip이라는 건데, 일전에 1913년 비엔나 이야기[1]할 때 언급한 역사 트리비아 사이트인 vintage news[2]에 다양한 예시 사진들과 함께 설명이 잘 돼 있다.

여하간 이런 오래된 전통을 살려, 요즘에는 피스톨 손잡이에 최애캐-_-를 넣어놓는 친구들이 있는 듯 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1] 내 백과사전 1913년의 비엔나 2019년 1월 5일
[2] The Vintage News “Sweetheart Grips” – WWII soldiers would make clear grips for their pistols to display their sweethearts Sep 2, 2016
[3] the daily calender World War II Sweetheart Grips 5:39 PM 02/13/2015

장 레옹 제롬 – 스핑크스 앞의 나폴레옹 Bonaparte devant le Sphinx

Jean-Léon Gérôme, Bonaparte Before the Sphinx, 1867–1868, Oil on canvas, 61.6 cm × 101.9 cm

Jean-Léon Gérôme이라는 화가의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그의 작품들을 대충 쭉 보니 사실주의 경향이 강하네. 역사화가로 나름 이름을 날린 듯 하다. 대충 연도를 보니 모네, 고흐, 르누아르 같은 사람들이랑 비슷한 시대에 산 모양인데, 역시나 내가 보기에는 인상파들에 비해서는 느낌의 임팩트가 조금 떨어지는 감은 있다. ㅎㅎㅎ 개인적으로는 르누아르가 최고다. 여자 그림이 이쁘잖아. ㅋㅋㅋ

여하간 사진이 보편화 되지 않았으니, 사실주의적 화풍도 당대에는 나름 수요가 있었을 듯 하다. 러일전쟁까지만 해도 전쟁 보도를 하는데, 전쟁화가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니[1;p208], 사실주의 화풍은 사진이 보편화되기까지 실용적으로도 의미가 있었을 듯 하다.

위 그림은 유명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그린 것인데, 이후에 유럽제패를 할 나폴레옹의 야심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웅장함(?) 비스무리한게 느껴져서 마음에 든다. ㅎㅎㅎㅎ 이집트 원정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798년부터 1801년까지니까 대충 60년 후에 그린 그림이 되겠다. 본인이 어릴 적에는 기자의 대피라미드 앞 스핑크스의 코가 깨진 이유는 나폴레옹의 부하가 재미로 맞추기 놀이를 하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들었는데-_- 지금 위키피디아를 읽어보니 나폴레옹 출생 이전에 스케치된 그림에서, 이미 코가 깨진 그림이 발견되어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헐… -_-

위 그림의 가로세로비는 대략 1.654 정도 되는데, 표준적인 컴퓨터 모니터비인 16/9 = 1.778과 얼추 비슷하다. 제롬 화백이 백년 후의 컴퓨터 디스플레이의 예측을 했을 리는 없지만, 여하간 표준적인 모니터 16:9에 꽤나 잘 맞아서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쓰기 좋다-_- 일전에 산 모니터[2]의 배경하면으로 놓으니 쥑이네. ㅋㅋㅋ 나폴레옹 팬은 필수인 듯 하다. 본인은 좌측에 작업표시줄을 놓고쓰니, 가로 비가 조금 모자란 이미지가 더 잘 맞는 듯 하다. ㅎㅎ

.


[1] 내 백과사전 [서평] 청일 러일전쟁 2012년 11월 30일
[2] 내 백과사전 와사비망고 UHD490 REAL4K HDMI 2.0 엣지 사용 소감 2017년 4월 8일

음성기호 Phonetic Code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원래 해군을 지원했는데, 사관학교에서 수학성적이 좋은 바람에 포병을 추천받았다고 한다.[1] 이후 방데미에르 쿠테타에서 나폴레옹이 대포를 이용한 신속한 진압에 성공하여 유명인사가 되었고, 이후 승승가도를 달리며 승진하였다. 만일 역사상 최고의 장군[2]인 나폴레옹이 포병이 아니었다면 진짜로 세계사는 상당히 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ㅎㅎㅎㅎ 이는 국내사정도 비슷한데, 주변사람들을 관찰해보니 경험상 수학과 남학생들은 특별히 지원병과가 없으면 대체로 포병/박격포 주특기를 받게 되는 듯 하다. 본인도 측지반에서 복무했다. 무릇 포병과 수학은 (쓸데없지만) 나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ㅋㅋㅋㅋ

무전병이나 포병은 원거리에서 정보를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나름의 Error detection and correction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수치를 주고받을 때 쓰는 숫자 읽기로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공‘은 포병과 무전병에게 필수다. 포병은 모든 숫자 읽기에 이것을 적용하는데, 이것을 실수할 경우 선임이 신참을 갈구는 좋은 요소가 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를 들어 세 번째 물건을 ‘셋’이라 세는 경우, 개갈굼을 당한다. ㅋㅋㅋ) 지나고나서 하는 이야기지만, 갈굼 당하는 것 자체는 부조리이긴 하나, 이것을 체화하지 않으면 작전을 원활히 진행할 수 없으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롱카운트’로 알파벳의 철차 하나하나를 일일이 원거리로 송신할 때,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알파벳을 일일이 분해하는 음성기호를 사용한다. 어릴 때는 이것을 왜 외우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았으므로 그냥 외웠지만, 지나고 보니 이것을 Phonetic Code라고 부르는 걸 알게 됐다. ㅎㅎㅎㅎ 좀 검색해봤는데, 역시나 나무위키에 밀덕이 많은건지 자세히 나와있다.[3] 쓸데없이 초 훌륭하네-_- 한국어의 음성기호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ㅎㅎ 내가 배운 영문 음성 기호는 NATO에서 쓰는 음성기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군사적 적대관계에 있으면 이 코드를 공유하지 않으므로 러시아는 별도의 코드[4]를 쓰는 듯 하다. 사실 러시아어에 대해 찾아보다가 나온거다.

아 이걸 보니 어릴 때, 군대에서 숏카운트로 개갈굼당하던-_- 추억이 생각난다. ㅋㅋㅋ 수학과 학생들은 포병되기 전에 좀 외워 두는 게 좋을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총번, 군번등의 각종 숫자나열을 연습없이 숏카운트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영화 같은데서 무전신호로 알겠다는 의미로 roger라고 대답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1956년 이전 음성기호는 r이 roger(현재는 romeo)이다. received의 의미로 ‘r’을 말하려고 roger가 된 듯 한데, 확실하지는 않다. 혹시 진위를 아시는 밀덕은 출처와 함께 댓글 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칭 밀덕이라는 사람들이 출처없는 정보를 남발하는 경우가 많아서… ㅎㅎㅎㅎㅎ

.


[1] 내 백과사전 나폴레옹이 포병이 된 이유 2012년 7월 12일
[2] 내 백과사전 데이터 분석으로 비교한 역사상 최고의 장군? 2018년 8월 19일
[3] 음성 기호 (나무위키)
[4] Russian phonetic alphabet (priyom.org)

위상수학으로 평양 고지도 분석??

교수신문에서 topology를 써서 평양 고지도를 분석했다는 엉터리 연구[1]에 세금이 쓰이고 논문이 철회되지도 않았다는 기사[2]를 봤다.

헐-_- 놀라운 이야기라 검색을 해 봤는데, 꽤 많은 언론에서 이 내용을 이미 기사화[3,4,5] 했더만. ㅎㅎㅎ 한겨레에도 기사가 있었는데, 벌써 눈치까고 내린 것 같다-_- 월간인물 기사[5]에 genus를 이용하였다는 언급이 조금 있다. 뭐 소규모 언론사는 글을 주는 대로 쓰는 듯 하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을 듯 하다.

논문의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작년에 역사학자인 이문영 선생과 기경량 선생이 자신의 블로그에 반박글[6,7]을 자세하게 써 놓았다. 기경량 선생은 교수신문[2] 뿐만 아니라 뉴스톱[8]에도 글을 쓰신 듯.

일전에 두 문화 이야기[9]를 했지만, 단일분야/파편적 증거로 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보통 위험한 듯 하다. 설령 위상수학으로 어떤 관련성을 보았다 하더라도, 각종 기록 자료나 역사학적 뒷받침이 있어야 이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종 학계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크로스 체킹이 중요한 듯 하다.

여하간 저번 경상대의 아가왈 수-_-[10] 사건[11]과 더불어 인하대도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하다-_-

.


[1] Tacksun, Jung & Choi, Q-Heung. (2017). 위상수학 교육과 묘청의 서경 평양성 고지도 분석에의 응용. Journal of Education & Culture. 23. 271-296. doi:10.24159/joec.2017.23.6.271
[2] 교수신문 엉터리 학술, 마비된 학계검증 시스템 2019.01.28 10:52
[3] 국민일보 최규흥 인하대 수학교육과 명예교수, 수학으로 우리나라 고지도 분석 논문 발표 ‘월간 인물’ 1월호 보세요 2018-01-18 16:46
[4] 디지털타임즈 인하대 최규흥 교수, 고려영토 중국으로 확장 수학적으로 입증 2018-01-18 12:35
[5] 월간인물 세계최초 수학으로 고지도를 분석하여 고려 서경 평양 위치를 찾다 2018.01.05 12:02
[6] 고려 평양이 중국 요양이라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 (orumi.egloos.com)
[7] 수학으로 푼 고지도? 언론과 학술지의 총체적인 문제다 (kirang.tistory.com)
[8] 뉴스톱 평양 위치가 중국? 엉터리 연구에 놀아난 한국 2018.01.22 02:23
[9] 내 백과사전 고고학의 두 문화(two cultures) 2018년 5월 14일
[10] ‘세계 1% 연구자’를 둘러싼 논란 (brunch.co.kr/@dkam)
[11] 내 백과사전 약탈적 저널 : 오픈 액세스 운동의 부작용 2018년 12월 26일

1913년의 비엔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하면 수리논리학의 성지라 할 수 있는데, 일전에 이야기한 적[1]이 있다. 죽기 전에 함 가봐야 할 텐데 ㅋㅋㅋ

1913년의 빈에 살고 있었던 인물들에 대햔 기사[2]를 봤는데 쓸데없이 재밌어서 포스팅함. ㅋ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13년의 빈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38년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도망칠 때까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빈에서 살았다고 한다.

히틀러도 비엔나에 5년간 거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지냈던 모양인데, 비엔나 미술 대학에 응시하였다가 두 번이나 낙방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트로츠키도 1913년 비엔나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기사[2]에 따르면 히틀러와 남서쪽으로 1마일정도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이 Lev Davidovich Bronstein인 줄은 몰랐네. ㅎ

당시 크라쿠프에 거주하였으나 자주 비엔나에 방문했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트로츠키는 비엔나의 유명한 까페들 중의 한 곳에서 사람을 자주 만났던 모양이다. 이오시프 스탈린과도 까페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당시 스탈린의 몰골이 거지꼴-_-이라서 트로츠키가 쉽게 사람을 알아봤다고 한다. 스탈린은 비엔나에 매우 짧은 기간만 체류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Marxism and the National Question”이라는 소책자를 쓴다.

스탈린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유고슬라비아의 독재자였던 티토가 살았다고 한다.

동일 도시의 4마일 내에 이렇게나 유명한 인물들이 동시에 있었던 것은 아마 우연이겠지만, 서로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


[1] 내 백과사전 비엔나의 Reichsrat 까페 :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처음 발표한 곳 2014년 7월 25일
[2] The Vintage News Vienna 1913 – Home of the Dictators who Shaped the 20th Century Nov 29, 2018

1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별 세수 변화

황금 족쇄 –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배리 아이켄그린 (지은이), 박복영 (옮긴이) | 미지북스 | 2016-12-10 | 원제 Golden Fetters: The Gold Standard and the Great Depression, 1919-1939 (1992년)

p144-149

관리들은 이런 덤불 속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미리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 거의 없었다. 런던에서 유행한 이야기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육군, 해군, 수송 및 조달에 관해서는 준비 작업을 마쳤지만, 자금 조달에 관해서는 전쟁이 선포되고서야 비로소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어느 정부도 전쟁에 비용이 얼마나 들지 예측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해군이 동맹군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적군을 봉쇄하면 대규모 상비군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전쟁 계획을 세웠다. 독일작전참모부는 전투가 아무리 길어도 2년 내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나 큰 비용을 치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각국 정부는 세금 인상을 미뤘다. 세금 인상의 거부는 선전 효과가 있었다. 즉 독일과 프랑스 모두 자신들의 튼튼한 재정 상황을 과시하기 위해 세금 인상을 삼가려고 했다.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선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계산에서는 배상금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나라 모두 적국이 결국에는 채무와 은행권을 상환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차입이나 통화 발행을 통해 전쟁 자금을 조달했다. 대부분의 전쟁 기간 동안 독일 재무부 장관을 지낸 보수주의 경제학자 카를 헬페리흐는 “평화가 찾아온 뒤, 우리 적들에게 우리가 지불한 전쟁 비용의 청구서를 제시할 것이다”고 말했다.19

따라서 “각국 정부는 신용의 운전대를 꽉 쥐고 있었다.”20 전쟁 첫 해에 영국, 프랑스, 독일의 중앙 정부 지출 중 세금으로 조달된 비중은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표 3.1을 보라). 이 비중은 그 후에 훨씬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주요 참전국들이 세금을 통해 경상 지출을 충당한 비율은 3분의 1에도 미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세수 확대 노력이 매우 미미했다. 전시 부채의 지불 유예 조항에 따라 도시 임차인과 소작농은 징집되었을 경우 지대 납부를 면제받았는데 이 때문에 지주의 과세 대상 소득이 줄어들었다. 세무 관리들은, 군인 가족은 기소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쟁 기간은 “황금시대, 세금도 없고 지대도 없고 빚도 갚을 필요가 없는 멋진 시간이었기에, 전쟁이 끝나는 것을 크게 아쉬워했다” 는 냉소적인 묘사도 있었다.21 1914년 말경의 조세 수입은 평상시의 6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의회는 간접세, 주로 관세와 소비세를 인상했다. 그러나 간접세는 이미 높은 수준이어서 세수가 더 늘어날 여지가 크지 않았다. 전쟁으로 소비재 수입이 위축되어 관세 수입 역시 줄어들었다. 1916년, 한때 사회당 당원이었던 아리스티드 브리앙의 리더십하에서 채택된 전쟁 이윤세War Profit Tax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세수 전체에서 직접세 비중은 20% 근처에 줄곧 머물렀다. 1914년에 표결된 소득세는 3년 후에나 실행되었으며 1918년까지는 그 기여분이 정부 수입의 5% 미만이었다. 1917년 6월이 되어서야 관세를 제외한 총세수가 전전 수준을 회복했다.22

독일의 재정 노력은 더욱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독일제국은 전비 지출에서 8%만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23 이것은 독일에서 중앙 정부와 각 주들 사이에 명확한 분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1871년 헌법에 따라 직접세 부과 권한을 각 주가 가지고 있었다. 각 주들은 이런 세금의 주요 수익자로서 평상시 정부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24 주 수준에서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던 엘리트들은 전시에도 직접세의 통제권을 제국으로 넘기는 것을 주저했다. 직접세 수입이 전쟁을 거치면서 두 배가 되었지만, 전시 자금 조달에서는 미미한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독일제국은 거의 전적으로 간접세 (관세와 소비세의 비중이 비슷했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국이 식료품을 비롯한 필수품 수입에 대해 관세를 유예한 이후에는 관세 수입이 뚝 떨어졌다. 정부는 제국중앙은행, 석탄, 철도 여행 등에 대해 추가 세금을 부과했다. 1918년에 음료와 사치재에 대해 새로운 소비세가 부과되었다. 주들도 적자를 겪었지만 중앙 정부에 비하면 적자 규모는 작았다. 제국과 주의 지출을 합하면, 정부 지출 대비 적자 비율이 92에서 83으로 떨어졌다.25

소득세가 존재하고 직접세 부과 원칙이 확고히 자리 잡혀 있던 영국에서는 세수를 늘리는 것이 더 용이했다. 독일에서는 직접세 수입이 전쟁 기간에 두 배가 되었지만, 영국에서는 네 배가 되었다.26 소득세와 부가세의 세율이 1914년 11월에 배로 올랐다. 1913~1914년과 1918~1919년 사이에 정상 소득세율은 5배가 되었다. 전시 특수로 혜택을 입은 기업에 대한 군수세와 초과 이윤세가 소득세를 보완했다.27 간접세 부과에는 소홀했다. “노동자 계급의 반발”을 야기 할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맥주와 차에 대한 세금이 인상되었다.28 영국 정부는 자유 무역 전통과 결별하고 수입 자동차, 영화, 벽시계, 손목시계, 악기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그런데도 영국 세수 전체 중 직접세 비중은 1913~1914년의 60% 미만에서 전쟁 후반의 80%로 올라갔다. 이후 사람들은 영국이 예산 관리에 “미온적”이었다고 비판하지만, 프랑스나 독일과 비교하면 영국은 전시 지출 중 인상적일 정도로 큰 비중을 세금으로 충당하는 데 성공했다.29

미국은 전통적으로 연방 세수를 관세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쟁 직전 미국의 산업계는 7% 최고 세율의 소득세를 대가로 수입 원자재에 대한 관세 인하를 얻어냈다. 1909년에 이윤이 5000달러를 초과한 기업에게 처음으로 부과된 1%의 법인세가 1913년에는 모든 기업에 부과되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면서 관세 수입이 하락하자, 미국 재정 당국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직접세로 눈을 돌렸다. 당국은 1916년 소득세 기준 세율을 두 배로 올렸고 2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해 누진세를 부과했다. 독일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자, 기업과 합자 회사에 대해 기존 세금에다가 초과 이윤세를 추가해서 부과했다. 전쟁 비용 중 3분의 1은 세금으로 충당하고 3분의 2는 대출로 충당한다는 것이 재무부의 계산이었다. 개인 소득세의 누진 세율은 63%까지 인상되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높았다. 자본 이득에 대해서는 최고 60%의 세율이 적용되었다. 1917년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소득세와 이윤세가 관세 수입을 초과하게 되었다.30

각국의 이런 조세 정책은 비판에 직면했다. 관리들은 예산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즉 전시 지출을 세수로 충당하고 국가 재정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세금 인상이라는 쓴 약을 처방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 중 일부는 타당성이 떨어졌다. 건전한 비평가들은 군사비 지출이라는 일시 프로그램 비용은 장기간에 걸쳐 분산되어야 하고, 사실상 미래 세대가 분담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31 전시에 정치가들이 이기심과 편의주의 때문에 그 부담을 미래로 지나치게 많이 이전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실제 정치적 논란은 세대 간 문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납세자들 사이에서 그 부담을 나누는 데서 발생했다. 관리들이 어떤 전략을 추구하든 전전 상태와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세금 부담과 소득 분배에 관한 합의를 뒤집어 놓았다. 전쟁이 끝나자, 부자들은 새로운 소득세를 폐지해야 하고 기존 세금도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노동계 대표들은 전쟁 관련 산업 분야의 소유주와 경영자들이 얻은 막대한 이윤과 자본 이득을 재분배하기 위한 자본 과세를 요구했다. 재정시스템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려는 모든 노력은 정부 재정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이어지면서 엉키게 되었다. 전쟁 영웅의 나라에서는 전쟁 연금, 의료 지원, 실업 수당, 주거 지원금 등을 제공해야 했다. 다른 수입원이 필요했다. 문제는 전전의 방식대로 징수를 해야 하느냐 아니면 전시의 임시방편들을 계속 연장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후 각국 정부가 직면한 최대의 논란거리였다.

적절한 과세 프로그램에 대해 합의를 이룰 수 없었던 정부는 부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주요 참전국들 중 영국과 미국은 장기 대출을 통해 전시 예산 적자를 충당하는데 가장 성공한 나라였다. 영국 정부는 재무부 단기 채권 발행과 잉글랜드은행 대출로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세 번에 걸쳐 대규모 장기 차입을 했다. 첫 번째 차입 에서는 대규모 금융 기관과 10만 명의 재력가들이 채권을 인수했다. 두 번째 차입을 위해서는 100만 명 이상의 저축을 동원해야 했는데, 채권 인수자들 중에는 일반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는 재무부가 국내 저축을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했다. 예를 들면, 채권의 인수 기간을 정하지 않은 채 전쟁 채권을 계속해서 발행했다.

 


19. Bogart, Ernest Ludlow (1921), War Costs and Their Financing,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186쪽에서 인용
20. Birck, L. V. (1927) The Public Debt, New York: The Dial Press 226쪽
21. Gide, M. Charles (1919), “French War Budgets for 1919-1920”, Economic Journal 29, 129쪽
22. Charbonnet, Germain (1922), La politique financier de la France pendant la guerre, Bordeaux: Imprimerie de L’Université; Fisk, Harvey E. (1922), French Public Finance in the Great War and To-day, New York: Bankers Trust Company 29~31쪽; Flora, Peter (1983), State, Economy, and Society in Western Europe, 1815-1915, Volume 1, Frankfurt am Main: Campus Verlag. 300쪽; Peel, George (1925), The Financial Crisis in France, London: Macmillan and Co. 101쪽; Germain-Martin, Louis (1936), Le problème financier 1930-1936, Paris: Domat-Montchristien. 3~4부를 참고하라.
23. 표 3.1은 Balderston, T. (1989), “War Finance and Inflation in Britain and Germany, 1914-1918,” Economic History Review, sec. ser. 42, pp. 222-244을 따라 경상수입에서 정부채 매입을 통해 경감된 세금부담을 제외하였으며, 공식 통계상의 1918/1919년 지출 추정치를 같은 기간 제국의 미지불 채무 증가액으로 올렸다.
24. 상세한 것은 Holtfrerich, Carl-Ludwig (1986b), The German Inflation, 1914-1923, New York: Walter de Gruyter., 109~110쪽과 Witt (1987), 여러 곳을 보라.
25. Balderston, T. (1989), “War Finance and Inflation in Britain and Germany, 1914-1918,” Economic History Review, sec. ser. 42. 225쪽
26. 위의 책 230쪽
27. 처음에는 전전 수준을 초과한 이윤의 50%를, 1917년부터는 80%를 초과 이윤세로 부과했는데, 이 세금이 1914년에서 1920년 사이 총세수의 약 25%를 차지했다. Grady, Henry F. (1927), British War Finance 1914-1919,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Hicks, J. R., U. K. Hicks, L. Rostas (1941), The Taxation of War Wealth, Oxford: Clarendon Press (second ed.).를 보라.
28. Stamp, Sir Josiah (1932), Taxation During the War, London: Humphrey Milford. 29쪽
29. Morgan, E. Victor (1952), Studies in British Financial Policy, London: Macmillan. 94쪽. 그리고 Balderston, T. (1989), “War Finance and Inflation in Britain and Germany, 1914-1918,” Economic History Review, sec. ser. 42.를 보라.
30. Bogart, Ernest Ludlow (1921), War Costs and Their Financing, New York: D. Appleton and Company. 295쪽, Gilbert, Charles (1970), American Financing of World War I, Westport, Conn.: Greenwood Publishing Corp. 제 5장. 세금 3분의 1, 대출 3분의 2의 정책은 Annual Report, the Secretary of the Tresury for 1918, 47~49쪽에 명시되어 있다.
31. ‘조세 평준화tax smoothing’에 관한 최근 연구들은 정부 지출의 일시적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차입하는 것이 분명히 타당함을 보여준다. 세율이 올라가면 왜곡된 세금 부과로 인해 사회 후생의 상실deadweight loss도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권자의 후생 극대화를 추구하는 정부는 시기에 따라 상대적으로 일정한 세율을 유지하려는 유인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 지출이 특별히 높을 때는 차입을 하고 지출 수요가 상대적으로 낮을 때는 채무를 상환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한 참고문헌은 Barro, Robert J. (1979), “On the Determination of the Public Debt,”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87, pp.940-971에서 찾을 수 있다.

위 참고 문헌 중 Witt (1987)은 뭔지 모르겠음.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이와 같은 전후 배상금 기대감이 2차 세계 대전의 근원이 된 듯 하다. 왠지 독일 배상금이 엄청나더니만 이런 사정이 있었군. ㅎㅎ

한편 좀 다른 이야기지만, 양차 대전으로 인해 증가된 직접세는 불평등을 감소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피케티 선생의 책[1]에서도 본 듯한데, 연관이 있는 내용일 듯 하다.

.


[1]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은이), 장경덕 (옮긴이),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09-12 | 원제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2014년)

[서평]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은이), 이순호 (옮긴이) | 갈라파고스 | 2017-12-22 | 원제 Spain In Our Hearts (2016년)

.


각종 이념들의 도가니였고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기도 했던 스페인 내전사에 대해 관심이 있어 본 책이다. 내전 전체를 조망하는 책은 아니고, 내전 당시 참가했던 국제여단과 미국인 중심으로 몇몇 인물들의 행로를 추적하는 점에서, 전쟁 속 미시 사건에 더 주목을 하고 있으나,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전황설명이나 당대의 분위기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타국의 내전속에 휘말린 미국인들의 운명이나 행로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는 관련없지만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1]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스페인 내전의 전반적인 전황과 복잡한 정치적 흐름은 앤터니 비버 선생의 책[2]을 참고하는 편이 좋다. 국제여단에 대해서는 일전에 한국일보의 기사[3]에 대체적으로 잘 나와 있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먼저 알고 읽는 편이 좋다고 본다.

서문[4]을 읽어봤을 때부터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이상을 꿈꾸던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에 퇴역해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감상적이다. 독서 결정 여부에 도움이 되도록 서문의 일부를 별도로 인용을 해 두었다.

이 책 안에서 일전에 본 오웰카탈로니아 찬가[5]를 많이 인용하는데, 읽은지 오래 되다보니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 일전에 빠트린 11장을 포함하여 다시 읽어봤다. 당시 POUM이 불법인 이유가 아나키즘 노선을 따랐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다-_- 젠장. POUM은 트로츠키 노선을 따랐기 때문인 듯 하다. 뭐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공산주의자와 사이가 안 좋았으니 언제나 탄압 대상이긴 하다. ㅎ

한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흥미로운 아나키즘 병영문화에 대한 묘사[5;p40]는 무척 흥미로왔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이상적으로 잘 작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p195) ㅎㅎㅎ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바르셀로나 전화교환국에서의 총격전에 대한 묘사[5;10장]도, 전황에 대한 본서의 설명(p271)을 보니 좀 더 상황이 이해가 된다.

미국 석유기업인 Texaco가 프랑코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야기는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석유의 외상지원과 더불어 공화파 배편의 이동정보를 독일에게 넘겨주는 이야기 등, 여러모로 책의 본 목적인 미시사와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나름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아무래도 미국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 듯 하다.

스페인의 운명은 이웃나라에서 결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의 내전과도 많이 겹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가는 개인의 역사를 조망한다는 측면에서 현장감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위키피디아에 별도 항목이 있는 걸 보면 나름 인지도가 있는 책인 듯 하다.

.


[1] 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은이), 정윤미 (옮긴이) | 살림 | 2009-05-20 | 원제 The Coldest Winter
[2] 내 백과사전 [서평]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2010년 12월 13일
[3] 한국일보 반파시즘 세계연대… 국제여단이 일깨운 것 2014.12.15 13:58
[4] 내 백과사전 ‘Spain In Our Hearts’ 서문 중에서 2018년 12월 5일
[5] 내 백과사전 [서평] 카탈로니아 찬가 2015년 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