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불전쟁 당시 일본의 반응

도널드 킨 저/김유동 역, “메이지 라는 시대1”,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2017
p396-398

그러는 사이 천황의 관심은 아득히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쏠려 있었다. 보불 전쟁(1870년 7월-1871년 5월)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 정부는 전황 시찰을 위해 네 명의 무사를 유럽으로 파견했다. 이들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프로이센은 연전연승을 거듭해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네 명은 파리로 가서 양군의 전황, 장병의 강약, 병기의 장단점, 승패의 원인, 유럽의 동정 등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프로이센군의 막강함과 전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때까지 일본은 근대 육군을 조직하는 데 프랑스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패배로 일본은 모범으로 심을 모델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때부터 독일식이 일본 육군의 모범이 되었다.450

천황은 이 전쟁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다음은 육군 사관이었던 다카시마 도모노스케(高島鞆之助)의 회상이다.

천황은 보불 전쟁의 전황 보고서를 세밀하게 살펴보고 양군이 채택한 전략에 대해 자꾸만 신하들에게 질문하셨다. 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독일 군함이 요코하마 항에 기항했을 때, 함장은 천황에 게 한 장의 사진을 바쳤다. 그것은 보불 전쟁 때 사진이었는데, 포연이 하늘을 뒤덮고 창공에 살기가 꽉 차 있는 피가 끓고 살이 떨리는 장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독일 함장이 사진 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다고 제의하자, 천황께서는 즉시 허락했다. 사진이 촬영된 날의 양군의 전략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천황은 깊은 관심을 갖고 설명에 귀를 기울이셨다. 용안을 빛내시며 경청하셨다.451

천황은 1S72년 4월 7일, 독일 변리공사로부터 보불 전쟁 개선 축제 사진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물론 천황이 외국인을 이러한 목적으로 어전에 부른 일은 전례가 없었다.452 그 다음 날 천황은 다시 전례를 깨고 다른 나라로 전임하는 영국 대리공사 F. O. 애덤스를 접견했다. 천황은 애덤스에게 “이번 영전은 귀국 황제가 귀하의 가치와 공적을 인정한 결과요, 기뻐할 일이다. 석별의 정은 있으나 차마 붙잡지는 않겠다. 원양만리 자중자애하라”는 칙어를 내렸다.

천황의 말 자체에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은 없으나 일본 궁중이 유럽 궁중의 관습에 대해 얼마나 급속도로 익숙해져 있던가를 보여준다.

프로이센 왕 빌헬름은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1871년 1월, 베르사유에서 독일연방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그 뜻을 전하는 국서가 메이지 천황에게 도착했다.453 천황은 빌헬름 황제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며 야마토 회화첩 두 질을 보냈다. 이것은 전년 가을, 빌헬름 황제가 보내온 전쟁 화집 세 권에 대한 답례였다.454 일본과 유럽의 거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천황이 ‘사촌’인 유럽 황제들의 새로운 소식을 항시 접하고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450메이지 천황기』 제2권 pp. 326-327, p. 333. 처음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네 명의 시찰단 대표격으로 선택되었으나 번(落)의 사정을 이유로 사퇴했다. 네 명 중에서 연장자에 해당하는 오야마 야스케(大山弥助=이와오巖)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촌으로서 후에 육군대신이 되었고 청일 전쟁 때는 제2군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는 그대로 유럽에 6년간 머물렀으며 후에 내무대신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451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진무(神武) 이래의 영주(英主)」(〈태양〉, 임시 중간호, 『메이지 성천자』 p. 34). 와타나베 이쿠지로는 『메이지 천황』상권 p. 129에(함장이 아니라) 공사가 사진을 가져와서 천황에게 보여주었다고 쓰고 있다. 와타나베는 이 사실을 오하라 시게미(大原重実)가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쓴 1872년 4월 14일자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다. 물론 보불 전쟁은 일찌감치 끝난 뒤였다. 다카시마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똑같은 일이 두 번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아스카이는, 『메이지 대제』 p. 149에서 다카시마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독일 공사가 개선 축제 사진을 바치며 설명했다고 한다. 『메이지 천황기』제2권 p. 665의 기술도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452 와타나베, 『메이지 천황』 상권 p. 129. 장소는 학문소로 되어 있다.

453 일본어 번역문은 『메이지 천황기』 제2권 p. 429에 있다. 메이지 천황의 답신은 동 P. 430에 있다.

454 황제는 메이지 천황에게 주기 위해 전쟁 사진을 독일 대리공사 폰 브란트에게 보냈다. 대리공사는 그것을 가지고 1870년 9월 12일 입궐했으나 천황은 몸이 편치 않았기 때문에 아키히토 친왕이 대신 받았다. 『메이지 천황기』 제2권 p. 336.

병인양요 당시 일본의 반응

도널드 킨 저/김유동 역, “메이지 라는 시대1”,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2017
p211-212

요시노부는 일본에 주재하는 외국 사절과의 친교를 두텁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다. 오사카 성에서 공식 접견을 한 최초의 상대는 영국 특파 특명전권공사 해리 파크스였다. 요시노부는 큰 홀 앞뜰에서 영국 기병의 승마 묘기를 관람한 다음, 우호의 표시로 파크스에게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요시노부는 또 다음 날부터 차례로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공사와 총영사 등을 접견했다. 모두가 최고의 접대를 받았으며 요시노부는 열강 제국과의 조약이 충실히 이행될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그 전해, 조선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아홉 명과 미국 상선의 수 병 몇 명一그 중에는 영국인 승무원도 있었다一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함대가 출격하는 등 조선과 열강들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일본 내에서는 조선과 연맹을 맺어 구미에 대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막부는 조선에 사절을 보내 구미열강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의 불리한 점을 설명하면서 이 분쟁의 중재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또한 막부는 1867년 4월에 로주 세 명이 연서한 서한을 미국 공사에게 보내 만일 조선이 태도를 바꾸어 미국과의 강화께 동의한다면 미국은 조속히 이에 응하라고 종용했다. 2세기 반에 걸쳐 서양과의 접촉을 끊어 온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적절한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 조언하는 입장에 서려 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일본은 만일 조선이 서구 열강에 공격당하는 일이 벌어지면 이웃나라인 일본에도 영향이 미치리라 우려했을 것이다. 11월, 미국 정부는 일본이 분쟁 조정에 나선 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203 그러나 12월 9일, 중재 역할을 하기 위해 한반도로 건너갈 예정이었던 외교 사절 파견은 국내 정변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203 10월 22일, 미국 변리공사 R. B. 반 발켄버그는 일본의 호의에 대한 존슨 미국 대통령이 사의를 표한 서한을 전했다. 『메이지 천황기』 제1권 p549 참조.

언급한 ‘국내 정변’은 아마 보신 전쟁을 가리키는 듯 하다. 훗날 일제의 지배를 생각하면 꽤 재미있는 일본의 반응인 것 같다. 외교사절이 파견되었다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해지는 구만. ㅋ

참고로 검색해보니 ‘변리공사‘는 영어로 minister resident라고 하는 듯. 뭔 말인가 했다. ㅋ

1857년 해리스의 주장에 대한 간조부교의 반론

미일 수호 통상조약에 따른 재일 미국 총영사로 취임한 해리스가 일본 개항의 당위성에 대한 주장에 대해 당시 간조부교(번 소속의 행정관)들이 한 반박.

이노우에 가츠오 저/이원우 역, “막말 유신”, 어문학사, 2013
p57

두 가지의 의견

앞서 소개한 적극적 개국론과 소극적 개국론이 그것이다. 적극적 개국론은 메쓰케이와세 다다나리 등으로부터 제출되었다. 가나가와 • 요코하마를 자진해서 개항하고 오사카에 있는 천하의 이권을 에도로 가져오는 ‘중흥일신의 사업’ 으로 막부의 부국강병올 이룩하자는 의견이었다. 서양의 신기한 발명품을 간단히 배울 수가 있다고도 기대했다. 이 참신한 개명론은 종래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것에 대하여 가와지 등 간조부교들은 거절하면 전쟁의 발단이 되므로 현재의 형세를 보아서는 온건한 조치 외에는 없다고 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네덜란드 별단풍설서번서조소에서 번각한 한역 서양서적, 집적된 ‘대화서’ 등을 근거로 하여 해리스의 대연설을 상세하게 점검한 것이다. 다른 곳에 영토를 획득하는 것은 금지한다며 미국은 비침략국이라고 해리스가 설명한 조항에 대해서는 네덜란드 별단 풍설서로 검토하고, 멕시코전쟁에서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약취한 것, 그 후, 배상금 대신에 뉴멕시코를 빼앗았다고 하는 기사를 근거로 사실이 아닌 것을 지적했다.

해리스가 영국의 중국에 대한 아편 판매를 수 개조에 걸쳐 비판하고, 미국 대통령은 일본을 위해서 아편을 전쟁보다도 위험하게 생각 한다는 미국우호론을 주장한 부분에 대해서도 간조부교는 북경에서 한역된 『해국도지』 기사 속에서 미국이 터키 아편 천여 상자를 매년 중국으로 반입하고 있다는 기사를 찾아내 해리스의 거짓말을 입증했다. 미국 상인이 광둥 하류에 있는 영정도(伶汀島)부근에서 무장한 거룻배에 터키 아편을 저장해두고 대규모로 밀매한 사실은 『해국도지』에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영사가 주둔하면 문제가 없다고 하는 해리스의 설명에도, 최근 7 • 80년 이래로 유럽은 편안할 날이 없었으며, 영사는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이라고 듣지 못했다며 전란을 거듭하는 유럽 역사를 개관하면서 비판했다. 그 외에 해리스의 연설은 전체를 상세하게 검토하여 증거가 되는 ‘자료편’을 첨부하여 상신되었다. 간조부교는 작성한 장문의 발췌에 권수 등을 기재하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이 아편을 운반하고 있다는 기사 원문은 『해국도지』 120권본 제83권, ‘화사이언녹요(華事夷言錄要, 중국관계에 관한 서양인 논설의 발췌라는 의미)’의 20단락째, 영국인 데이비스의 저서『중국인』의 초록으로 간조부교의 발췌와 한 글자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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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벽화에서 나타나는 고대인의 자폐증?

popular archaeology 기사[1]를 보니 흥미로운 논문[2]이 소개되어 있다. 고고학과 미술과 정신의학에 모두 관심이 있는 본인으로서는 흥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구만. ㅋㅋㅋㅋ

3만년 전후의 기간에 유럽 동굴벽화에는 갑작스러운 사실주의의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사진을 자주보는 현대인에게는 사실주의 화풍에 별다른 감흥이 없을 듯 하지만, 고대인에게는 꽤나 임팩트가 있는 그림일 것이라 생각한다. 일전에 Raphaella Spence의 작품[3]이나 Pedro Campos의 작품[4]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마 현대인이 이런 작품을 보며 드는 느낌이 고대인이 사실주의 작품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ㅋㅋㅋ

여하간 3만년 전후의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 이유에 대한 논의가 분분한 모양인데, 이것을 고대인의 자폐증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는 모양이다. 일전에 올리버 색스 선생의 저서를 인용한 적[5]이 있었는데, 말미에 잠시 나디아 이야기가 나온다. 나디아는 서번트 신드롬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언급되는 사례인데, 나디아가 5살에 그렸다는 그림과, 일반적으로 5세 어린이가 그린 그림과의 비교가 논문[2;p271]에 들어 있다.

서번트 신드롬은 분류에 따라서 고기능 자폐,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도 부르는데, 각각의 차이는 나도 정확히 잘 모르겠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학술적인 논쟁이 좀 있는 듯… 여하간 이런 종류의 자폐아는 일전에 어느 자폐아가 쓴 시[6]에서도 볼 수 있지만, 특정분야에서 조숙하고, 디테일을 무척 신경쓰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여하간 논문[2]의 저자는 동굴벽화의 이런 화풍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자폐로 보는 듯 한데, 술먹고 읽어서 그런지 논거의 핵심이 잘 이해는 안 되네-_- 여하간 나디아의 사례를 꺼내는 건 좀 에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디아는 자주 언급되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구만.

추가로, 고대 증거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증거의 손실 때문에 실제로 갑작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고생물학의 유명한 경구를 여기서 들자면,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실제로는 서서히 일어난 변화가 갑작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ㅎㅎ

몰랐는데, 검색해보니 나디아는 지난 2015년에 4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7]고 한다. 자폐증의 몰이해의 시기에 태어나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좀 짠하다.

 


[1] popular archaeology How our ancestors with autistic traits led a revolution in Ice Age art Tue, May 15, 2018
[2] Penny Spikins, Callum Scott, Barry Wright, “How Do We Explain ‛Autistic Traits’ in European Upper Palaeolithic Art?”, Open Archaeology, Volume 4, Issue 1, Published Online: 2018-05-12 DOI: https://doi.org/10.1515/opar-2018-0016
[3] 내 백과사전 Raphaella Spence의 작품 2014년 3월 5일
[4] 내 백과사전 Pedro Campos의 작품 2012년 5월 21일
[5] 내 백과사전 숫자가 보이는 사람 2012년 5월 17일
[6] 내 백과사전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10살 어린이의 시 2016년 4월 17일
[7] the guardian Nadia Chomyn obituary Wed 9 Dec 2015 12.57 GMT

고고학의 두 문화(two cultures)

The Two Cultures라는 C. P. Snow 선생의 대단히 유명한 에세이가 있다. 뭐 대부분 아실 듯 싶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문과 지식인-_-과 이과 지식인-_-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몰이해 및 나아가 양 집단 사이의 반목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근데 제대로 요약한 거 맞나-_-?

여하간 네이쳐 기사에 고고학계에 존재하는 두 문화의 반목에 대한 기사[1]를 봤는데, 고고학과 생물학 양쪽에 관심이 있는 본인으로서는 나름 흥미롭다. ㅋ 기사[1]가 무척 길지만 재미있으니 함 읽어볼만 하다.

고대 유전체(ancient genomics)의 분석이 늘어나면서, 고고학계의 오래된 정설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가 종종 발표되는 모양인데, 기사[1] 앞부분에서도 그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고대 유전체 분석이 고고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에 Martin Jones의 저서인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2]라는 책을 읽은 적[3]이 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기사[1]에 스톤헨지 근교의 신석기 유적에 대한 연구 이야기가 나오는데, 뭐 한국인으로서는 큰 감흥이 안 오지만, 모르긴해도 영국인들에게는 나름 임팩트 있는 결과인 듯 하다. 만약 DNA 분석으로 고조선에 대하여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결과가 도출된다면, 한국인에게도 나름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될 듯. ㅋ

뭐 여하간 고고학계에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모양인데, DNA 분석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부류가 있고, 지나치게 단편적인 증거로 전체 스토리를 새로 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학자도 있는 것 같다.

후자의 견해도 수긍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데, 사실 단편적인 증거나 가설만으로 이어붙이면 뭐든 못하는 게 없다. 재야 사학자들 중에는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 라는 주장[4]부터, 영어는 사실 한국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라는 해괴한 주장[5,6]을 하는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페이스북의 언어학 그룹에도 이런 사람들의 주기적 출몰로 골치가… -_-) 이런 사람들의 주장도 자기딴에는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리고 절대 절대 설득되지 않는다-_-)

결국 단편적인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분야들에서 나온 증거들의 조합으로 내러티브를 완성해야 고고학적 사실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지나치게 DNA 증거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고대 인류의 이동경로의 사례를 들자면, 하플로그룹의 추적으로 예상한 고대 인류의 이동경로[7]를 언어학이나 고고학으로 뒷받침 하면서 완성한 사례는 좋은 사례라 본다. 반면에 일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 흔적에 대한 이야기[8]를 했지만, 지나치게 단편적인 증거 때문에 일어나기 힘든 사실을 주장하는 일은 반감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물론 DNA 증거는 강력하지만, 다양한 경우의 수와 정황을 고려할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근데 본인의 견해는 생물학이든 고고학이든 전공과 무관하므로 그냥 흘려듣기 바란다-_- 사실 이 글은 술먹고 쓰는 글이니 넘어갑시다. ㅋㅋ 요새 대부분의 포스팅은 술먹고 쓰는 글임-_-

 


[1] 네이쳐 뉴스 Divided by DNA: The uneasy relationship between archaeology and ancient genomics 28 MARCH 2018
[2] 마틴 존스 저/신지영 역,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 바다출판사, 2007
[3] http://zariski.egloos.com/2227703
[4] 정용석 저,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책이있는마을, 2004
[5] 강상순 저, “영어는 우리말입니다“, 홍일, 1997
[6] 허핑턴포스트 영어가 우리 말이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2015년 10월 06일 11시 44분
[7] 내 백과사전 고인류의 유라시아 이동경로 추적 2012년 12월 5일
[8] 내 백과사전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의 흔적? 2017년 4월 28일

[서평] 임진난의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임진난의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l 그들이 본 우리 1
루이스 프로이스(저자) | 정성화(역자) | 양윤선(역자) | 살림 | 2008-03-28

 


살림 출판사의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1] 책이 꽤 많이 출간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권이다.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는 나름 흥미로운 책들이 포진해 있으므로 몇 권 사 놓고 있긴 한데, 게을러서-_- 여태 읽지 않고 있다. ㅠㅠ

16세기 예수회 소속의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포르투칼 사람이 포교를 위해 일본에 체류할 당시의 일을 남긴 기록이 ‘일본사‘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부분을 번역한 책이다. 프로이스가 직접 쓴 원본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몇 종의 사본이 남아있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번역으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번역한 책[2]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보다는 분량이 적다. 이 책은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의 p163부터 내용이 겹치고, 그 이후로 끝 부분까지 동일한 내용이다.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도 읽은지 오래되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두 책을 끝까지 비교해가면서 읽어봤다. 동일한 내용이므로 사실 어느 책을 읽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본인 같은 문외한에게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배경지식을 주석으로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주는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 쪽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 책은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에서는 보이지 않는 원본의 빈칸이나 소소하게 다른 해석의 여지를 소개하고 있어,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프로이스의 생애와 ‘일본사’의 집필과정, 서지학적 해석, 몇 가지 판본의 비교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어, 이 부분은 흥미롭게 볼만하다.

다만 주석이 각 장 뒤쪽에 있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보기 불편하다. 사람들이 왜 미주 따위를 쓰는 건지 이해가 안 됨-_- 특히 책을 파쇄하여 스캔해 두면 페이지를 찾아가며 넘기기 불편하기 때문에 각주가 무조건 좋다. ㅋㅋㅋ

특히 어지긴한 일본사 덕후가 아닌 이상-_-,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수들이 전부 누구인지 꿰고 있기란 쉽지 않으므로, 장수들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나무위키에 전국 시대의 장수들에 대한 설명이 쓸데없이 엄청 잘 돼있다. ㅋㅋㅋ 책을 읽으면서 계속 참고했다. ㅎㅎ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번역한 책이 근래 또 한 권[3] 출간되었던데, 본인은 읽지 않았다. 다만, 책 소개에 따르면, 두 번이나 번역된 임진왜란 부분은 제외 했다고 나와 있어, 한 번 사서 읽어 볼만 할 듯 하다.

 


[1] 그들이 본 우리 (aladin.co.kr)
[2] 내 백과사전 [서평]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2011년 8월 1일
[3] 루이스 프로이스 저/박수철 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 위더스북, 2017

스콧이 개썰매를 쓰지 않은 이유

에드워드 J. 라슨 저/임종기 역, “얼음의 제국“, 에이도스, 2012

p225-229

한 세기 동안, 극지탐험가들과 남극 역사가들은 난센피어리 그리고 북극탐험 세대들의 저작과 이야기들에서 개썰매가 인간 썰매보다 낫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이 왜 개씰매 보다는 대원들이 직접 썰매를 끄는 방법을 선택했는지 의아해했다. 물론 디스커버리호 탐험대 시절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개들 때문에 겪었던 끔찍한 경험과 고통 받는 개에 대한 지나친 예민함이 스콧의 판단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왜 인력으로 썰매를 끄는 방법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해답은 사실상 에드워드 시대의 남성다움의 척도와 적자에 대한 경쟁적인 증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스콧은 『디스커버리호 항해기』에 유명한 글을 남겼다. “나는 개들을 이용한 여행으로는 그 숭고한 관념의 고지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원들이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시련과 위험 그리고 난관에 정면으로 맞서고,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힘든 육체노동으로 광대한 미지의 세계가 던져주는 문제를 풀 때 그 고지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그래야만 더 고귀하고 훌륭한 정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59 레너드 다윈이 표현한 대로 “조국의 남성다움”을 입증하기 위해서 스콧과 그의 대원들은 썰매를 남극점까지 끌고 갔다가 돌아오거나 아니면 노력 끝에 죽어야 했다.

스콧이 두 번째 탐험을 할 때, 썰매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영국 극지탐험대의 특성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이는 프랭클린 수색대와 함께 시작되어, 클레먼츠 마크햄을 비롯해, 탐험에 헌신한 몇몇 베테랑들에 의해서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마크햄은 디스커버리호 탐험대의 매뉴얼에 썰매여행에 관한 레오폴드 매클린턱의 에세이를 실었다. 매클린턱은 이렇게 썼다 “썰매여행의 체계가 정교화되기 전까지는 강인한 인내력과 여러 가지 즉흥적인 재능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렇게 해서 차츰 정착된 매클린턱의 썰매여행은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이후 사람이 썰매를 끄는 기술은 빅토리아 시대의 유산이 되었고, 마크햄, 스콧, 새클턴이 이를 이어받았다. 예컨대, 디스커버리호 탐험을 계획할 때, 마크햄은 스키와 개를 이용한 난센피어리의 탐험을 “영국 대원의 방식”인 썰매를 인력으로 끌고 가는 탐험과 비판적으로 비교한 후 이렇게 선언했다.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이 극지방에서 여행하는 방법이다. 스키도 개도 필요 없다” 1899년, 마크햄은 북극에서 개들을 이용해 썰매를 끌었던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개의 도움 없이 성취해낸 것과 비교하면, 개와 함께 성취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시 탐험을 설계한 마크햄의 역할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탐험에서 귀환한 대원들은 마크햄에게 썰매를 끄는 인간의 모습을 조각한 작은 조상彫像을 주었다. 네어스의 탐험대가 북극탐험에 나섰을 때, ‘서쪽 썰매여행’을 지휘했던 펠험 앨드리치는 1903년에 스콧에게 친절히 편지를 썼다. “후손들은 귀하의 썰매여행을 극지탐험 역사에서 최고의 탐험으로 평가할 것입니다.”60 새클턴이 이런 전통을 이어 인력으로 썰매를 끌고 남극점 가까이 갔다가 돌아와 국민의 대대적인 갈채를 받은 이후, 스콧 역시 남극으로 돌아가 전통대로 계속 인력으로 썰매를 끌었다.

테라노바호 탐험대의 대원들은 대체로 사람이 끄는 썰매의 정신을 받아들였다. 남극에서 한겨울을 나면서 스콧은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조랑말과 인간에 의존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설명하면서, 아이스 배리어에서는 조랑말을 이용했고, 이후에는 사람 힘으로 썰매를 끌었다고 말했다. 스콧은 “이런 의향에 전 대원들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고 보고했다. “대원들 모두가 빙하와 극점을 가는데 개들을 이용하는 것에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남극점을 향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랙터가 작동을 멈추자, 레슬리는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레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사람이 썰매를 끌고 가는 일이 시작되었다.” 작동을 멈춘 트랙터를 보자마자, 스콧은 “기계로부터 큰 도움을 받으려는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고 외쳤다. 조랑말이 뒤이어 죽자, 윌슨은 이렇게 선언했다 “천만다행히, 말들은 이제 모두 생을 다했으니, 우리는 스스로 더 힘든 일을 시작하련다.” 스콧은 비어드모어 빙하에 덮인 연질의 눈 때문에 개들이 썰매를 끄는 게 무척 힘들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개들을 데리고 출발하는 것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 결국 짐은 대원들에게 넘겨졌는데, 스콧은 “우리는 꽤 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지원 팀은 남극고원에 도착한 후 돌아갔고, 스콧과 대원 네 명은 썰매 한 대를 끌고 남극점을 향해 150마일에 이르는 길을 떠났다. 지원 팀을 통해 캐슬린 스콧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H. R. “버디” 바워스(다른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가는 동안 그는 걸어서 움직였다)는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오늘날 영국 민족이 쇠퇴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대원들이 직접 짐을 끌고 남극고원을 여행하는 것은 훌륭한 일일 것입니다.”61

디스커버리호, 님로드호, 테라노바호는 세기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사이의 짧은 시기에 항해에 나섰다. 세계대전으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전까지 많은 유럽인들은 운명과의 영웅적인 투쟁 그리고 인간 힘의 헛된 과시 속에서 의미를 찾았다. 빙판 위에서의 활약으로 개인적 인정을 받았던 많은 베테랑 남극탐험가들은 영국 제국의 병력 중 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던 전쟁에 참전했다. 개성을 요하지 않는 집단에 들어간 이들 탐험가들은 대부분 참호와 전장에서 살육되었다. 몇몇 탐험가들은 대부분 해상 전투 중에 죽음을 택했다. 마크햄 그리고 1911년 프랜시스 골턴의 뒤를 이어 영국 우생학교육Britain’s Eugenics Education Society 회장이 된 레너드 다윈과 같은 극지탐험 지지자들에게 탐험은 민족의 적합성과 기질을 측정하는 실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혹독하게 시험되었지만,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탐험대원들은 이러한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우생학적인 견해는 문화의 일부였다. 스콧은 1911년에 남극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우리가 이 탐험에서 증명한 것만큼 아주 명확히 민족적 기질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선 밖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마음속에 있는 목적이 중요하다. ‘신들’은 작아지고, 겸허함이 이들을 대신한다. 허영은 쓸모없다.” 나중에 탐험가들의 과학적 현장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끈기 있는 연구를 통해 얻은 위대한 결과야말로 분투하는 인류를 위한 최상의 실례이다.”62 탐험가들은 남극점에 도달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시험하기도 했지만, 또한 과학 프로그램을 통해서 탐험의 부가적 의미를 찾고자 했다. 남극대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됨에 따라 과학 프로그램의 초점은 점차 지자기, 지리상의 발견, 해양학, 기상학에서 생물학, 지질학, 빙하학으로 바뀌었다.

 


59. SCott, Voyage of the “Discovery,” 1:467-68.
60. F. Leopold McClintock, “On Arctic Sledge-Travelling,” in The Antarctic Manual for the Use of the Expedition of 1901, ed. George Murray (London: Royal Geographical Society, 1901), 293; Clements R. Markham, “Memorandum for the Landing Party Committee,” n.d. National Maritime Museum Archives, MRK/46 (106); Clements Markham, “The Antarctic Expeditions,” Verhandlungen des siebenten Internationalen Geographen-Kongressess, Berlin, 1899 (Berlin: Kuhl, 1901), 625; Perlham Aldrich to R. F. Scott. Sept. 26, 1903, SPRI Archives, MS 366/15
61. Robert Falcon Scott, Journals: Captain Scott’s Last Expedition, ed. Max Jones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89; Lashly, Scott’s Command, 121; Scott, Journals, 315; Edward Wilson, Diary of the “Terra Nova” Expedition to the Antarctic, 1910-1912 (New York: Humanities Press, 1967), 213; Scott, Journals, 345; H. R. Bowers to Kathleen Scott, Oct. 27, 1911, SPRI Archives, MS 1488/2 (vol. 1).
62. Scott, Journals, 185, 209

이걸 보니 근대 산악 정복의 역사에서 초등을 중시하는 등정주의에서, 등정하는 방법과 경로를 중시하는 등로주의로의 변천이 연상된다. 알파인 스타일만이 가치있는 등정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콧과 같은 입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ㅎ

스콧/새클턴과 아문센의 차이

에드워드 J. 라슨 저/임종기 역, “얼음의 제국“, 에이도스, 2012

p9-12

내가 친구들에게 남극탐험의 영웅시대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하는 말은 대체로 둘 중 하나였다. 어떤 친구들은 어니스트 새클턴의 리더십 스타일이 정말 감탄스럽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친구들은 로버트 스콧이 남극점에 최초로 도달하기 위해 썼던 전략을 문제시하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새클턴과 스콧이 위업을 이룬지 한 세기가 지났고, 여전히 두 사람은 개인적인 성취를 이룬 인물들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명성은 주로 지리적 남극점에 도달하려 시도하던 중 겪은 온갖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근거하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인물이 오로지 남극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남극대륙에 갔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남극탐험을 둘러싼 다른 많은 사실들은 잊히고 말았다.

이 책은 새클턴의 리더십에 대한 찬가도 아니고 스콧의 선택을 비판한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남극에 바친 영국인들의 노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다룬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영국이 주로 남극탐험을 기획했던 시대) 남극탐험 프로젝트는 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스콧은 20세기 들어 첫 12년 동안 남극대륙 탐험대를 두 번 이끌었고, 새클턴은 한 번 이끌었다. 스콧이 이끈 첫 번째 탐험대는 독일과 스웨덴 팀도 참여한 국제적인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물론 군사적, 상업적, 이데올로기적일 뿐 아니라 개인적인 동기도 숨어 있었지만, 기획에서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으로 과학적인 탐험이었다. 뒤이은 새클턴과 스콧의 탐험은 스콧의 첫 번째 탐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첫 탐험의 기본적인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세 차례에 걸친 영국의 남극탐험은 모두 로스 해를 통해 남극대륙으로 들어갔다. 이때의 남극탐험은 조직과 영향력 모두에 있어, 새클턴의 두 번째 탐험을 비롯해 소위 남극탐험의 영웅시대(19세기 말에서 1920년대 초까지의 시기를 말한다_옮긴이)의 다른 탐험들과는 분명히 다른 논리적 일치성을 보인다.

결국 스콧이 남극점 도달 경쟁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결코 과학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스콧은 두 번의 탐험에서, 새클턴은 1907-1909년 탐험에서 막대한 양의 과학적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만일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것이 스콧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면, 그의 탐험 방식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만일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제대로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럴 경우 그는 불운하게도, 오로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고 이미 그 능력 또한 증명된 바 있는 극 지방 탐험가 로알 아문센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입장이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는 스콧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나 스콧과 새클턴은 수많은 주인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과학적 발견, 탐험, 정복’이라는 영국인의 관념이었다.

1901-1913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있었던 영국의 남극탐험을 설명하는 글들은 전부 새클턴의 리더십, 스콧의 선택, 남극점을 향한 경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은 이러한 탐험들이 복잡한 기획이었다는 점이다. 과학은 탐험의 모든 부분과 엮이며, 리더십과 선택처럼 대단히 중요한 무형의 요인을 비롯해 다양한 면들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했다. 남극탐험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탐험가들이 행한 과학 연구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다행히,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탐험가들의 과학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의 남극 원정 이야기만큼이나 매혹적인 사연이 많다.

남극탐험에서 행한 놀라운 연구 활동들을 살펴보면, 빅토리아 시대에드워드 7세 시대의 영국 문화에서 과학이 차지하고 있던 근본적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은 이 시기 동안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탐험가들과 제국의 관리들은 세계 각지로 서구 과학을 가지고 가 외국의 영토를 정복해 영국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고 표본들을 채집했다.

당시 막 외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한 국가의 자랑스런 시민이었던 아문센은 스콧이나 새클턴과는 다른 전통을 가진 나라 출신이었고, 목표도 달랐다. 제국이란 영토들의 물리적인 정복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영국의 입장에서, 제국은 언제든 영토들을 과학적으로(과학 자체의 정의와 개념이 진화할 때조차도) 탐험하고 체계적으로 개척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선 이 이야기는 탐험가들이 관여한 다양하고 경쟁적인 형태의 과학에 관한 것 일뿐 만 아니라 권력과 정치 문화와 상업, 지구 끝에서 벌어진 오만한 도전과 영웅적 행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일단 서문만 봤는데, 이 책이 뭔가 재미있을 듯-_-

 


2018.3.14

p307-308

스콧은 매우 야심적인 과학 탐사계획을 대략적으로 구상해 놓은 상태였다. 디스커버리호님로드호 탐험대는 아직까지 과학 탐사를 그토록 대담하게 시도한 적이 없었고, 아문센은 남극점을 향한 야망을 굳이 과학 따위의 명분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스콧은 과학을 위해 탐험대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명, 공표한 목표, 즉 남극점 도달이라는 목표 때문에 현재의 대책을 비난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현명한 사람들이라면, 가장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이루려는 노력에 진심으로 지지를 보낼 것이라고 믿는다.” 스콧은 전초기지에서 계획한 여행뿐만 아니라 진행 중이 었던 과학적 관측을 재개하기 위해 인원과 장비를 챙겼다. 라이트는 측지학 및 자기 측정을 맡고, 기상학자 조지 심슨은 계속 기후를 기록하고, 해양생물학자 데니스 릴리는 바다에서 수평예인 그물, 저인망, 준설기를 이용해 표본을 채집하고, 무척추동물학자 에드워드 넬슨은 피한지 인근의 해양생물과 조류를 추적 관찰할 예정이었다. 테라노바호의 삼등항해사이자 스콧의 처남이 었던 월프레드 브루스는 훼일스 만에서 아문센과 그의 대원들을 만났을 때, 아문센 탐험대와 스콧 탐험대가 서로 무엇이 다른지 한눈에 알아챘다. 브루스는 이렇게 경고했다. “아문센 탐험대는 120마리의 개를 데리고, 남극점을 향해 가고 있다! 과학이든 뭐든 필요없이, 오직 남극점을 위해! 만일 이들 개가 제대로 잘 달린다면, 십중팔구 남극점에 최초로 도달할 것이다”37

 


37. Frank Debenham, The Quiet Land: The Diaries of Frank Debenham (Alburgh, UK: Bluntisham Books, 1992), 12.; Wilfred Bruce to Kathleen Scott, Feb. 27, 1911, SPRI Archives, 1488/2.

[서평] 몽골 제국 기행 – 마르코 폴로의 선구자들

몽골 제국 기행 – 마르코 폴로의 선구자들
플라노 드 카르피니 | 윌리엄 루브룩 (지은이) | 김호동 (옮긴이) | 까치 | 2015-08-20 | 원제 Ystoria Mongalorum / Itinerarium

 


이 책은 마르코 폴로보다 대락 30년 이전에 몽골제국을 방문했던 카르피니루브룩이 각각 남겼던 기행문을 번역한 책이다. 두 사람의 방문시기는 비교적 근접하지만 겹치지는 않는다. 일전에 읽은 김호동 선생의 동방견문록[1]을 읽고 이어서 읽는 책인데, 동방견문록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책의 분량상으로 1/3정도가 카르피니의 기록이고, 2/3정도가 루브룩의 기록이다. 여행기간이 수십 년이나 되었던 마르코 폴로와는 달리, 그들의 방문은 1년 남짓한 수준이므로, 동방견문록에 비해 양이 적어 보인다. 이전에 본 김호동 선생의 책[1]처럼 다양한 판본의 대조를 통한 내용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동방견문록보다는 재미가 좀 적었다. ㅎ 몽골 군대가 어떤 전술로 전쟁을 했는지, 간접적으로 짐작할 만한 내용이 좀 흥미로왔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수십 일만에 주파하는 당대 역참제도는 꽤 놀랍다. 사막을 고속으로 주파하는 저자들이 어찌나 개고생-_-을 했는지, 굶었다거나 아프다는 이야기도 꽤 많다. 그 고생의 느낌이 여기까지 오는 듯 하다-_- ㅋㅋ

한편 폴 펠리오의 연구논문을 자주 인용하는데, 펠리오는 1945년에 사망했는데, 1970년의 논문을 인용하길래,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검색을 해 보니 폴 펠리오 사후에 출간된 저작들이었다. 헐…-_- 젠장

p137에 몽골인들이 문지방을 밟는 것을 금기시하는 흥미로운 문화가 묘사돼 있다. 동방견문록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몽골인들이 다양한 종교활동에 비교적 관대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데, p227에는 이러한 관용의 해석에 대해 저자의 새로운 관점이 흥미롭다. 몽골인들은 종교의 효용적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고, 종교의 본질이나 동화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종교인들을 보호하는 행동을 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p235에 assassin의 어원이 마약인 hashish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주석이 있는데, 중동 사학자인 Bernard Lewis[2]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 책[2]은 뒤의 참고문헌 목록(p455)에도 있다. 아사신파의 계보에 대해서는 일전의 글[3]을 참고하기 바란다.

p339에 루브룩이 카라코룸에 방문했을 때 아사신파의 암살정보 때문에 검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은 Bernard Lewis 선생의 책[2;p33]에도 나온다.

p344에 뭉케 칸이 여러 종교인들을 모아놓고 신학논쟁을 시키는 부분은 무척 재미있다. 몽골인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이나, 각 종교의 세계 인식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역사서가 다 그렇듯이 중앙아시아사 또는 몽골사에 관심이 없으면 재미있게 읽기는 어렵겠지만, 김호동 선생의 저술[1]을 재미있게 봤다면 아마 볼만할 듯 하다. 헷갈리는 여러 칸들의 계보는 일전의 글[4]을 참고하기 바란다.

 


[1] 내 백과사전 [서평]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2017년 9월 14일
[2] 버나드 루이스 저/주민아 역, “암살단“, 살림, 2007
[3] 내 백과사전 이슬람 시아파 계보 2017년 9월 2일
[4] 내 백과사전 칭기즈 칸 집안 정리 2018년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