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은이), 이순호 (옮긴이) | 갈라파고스 | 2017-12-22 | 원제 Spain In Our Hearts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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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이념들의 도가니였고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기도 했던 스페인 내전사에 대해 관심이 있어 본 책이다. 내전 전체를 조망하는 책은 아니고, 내전 당시 참가했던 국제여단과 미국인 중심으로 몇몇 인물들의 행로를 추적하는 점에서, 전쟁 속 미시 사건에 더 주목을 하고 있으나,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전황설명이나 당대의 분위기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 타국의 내전속에 휘말린 미국인들의 운명이나 행로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는 관련없지만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1]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스페인 내전의 전반적인 전황과 복잡한 정치적 흐름은 앤터니 비버 선생의 책[2]을 참고하는 편이 좋다. 국제여단에 대해서는 일전에 한국일보의 기사[3]에 대체적으로 잘 나와 있다.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먼저 알고 읽는 편이 좋다고 본다.

서문[4]을 읽어봤을 때부터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이상을 꿈꾸던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에 퇴역해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감상적이다. 독서 결정 여부에 도움이 되도록 서문의 일부를 별도로 인용을 해 두었다.

이 책 안에서 일전에 본 오웰카탈로니아 찬가[5]를 많이 인용하는데, 읽은지 오래 되다보니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 일전에 빠트린 11장을 포함하여 다시 읽어봤다. 당시 POUM이 불법인 이유가 아나키즘 노선을 따랐기 때문으로 알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다-_- 젠장. POUM은 트로츠키 노선을 따랐기 때문인 듯 하다. 뭐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공산주의자와 사이가 안 좋았으니 언제나 탄압 대상이긴 하다. ㅎ

한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흥미로운 아나키즘 병영문화에 대한 묘사[5;p40]는 무척 흥미로왔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이상적으로 잘 작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p195) ㅎㅎㅎ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바르셀로나 전화교환국에서의 총격전에 대한 묘사[5;10장]도, 전황에 대한 본서의 설명(p271)을 보니 좀 더 상황이 이해가 된다.

미국 석유기업인 Texaco가 프랑코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이야기는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석유의 외상지원과 더불어 공화파 배편의 이동정보를 독일에게 넘겨주는 이야기 등, 여러모로 책의 본 목적인 미시사와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나름 비중있게 소개하고 있다. 아무래도 미국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 듯 하다.

스페인의 운명은 이웃나라에서 결정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의 내전과도 많이 겹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가는 개인의 역사를 조망한다는 측면에서 현장감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위키피디아에 별도 항목이 있는 걸 보면 나름 인지도가 있는 책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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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은이), 정윤미 (옮긴이) | 살림 | 2009-05-20 | 원제 The Coldest Winter
[2] 내 백과사전 [서평] 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2010년 12월 13일
[3] 한국일보 반파시즘 세계연대… 국제여단이 일깨운 것 2014.12.15 13:58
[4] 내 백과사전 ‘Spain In Our Hearts’ 서문 중에서 2018년 12월 5일
[5] 내 백과사전 [서평] 카탈로니아 찬가 2015년 2월 13일

‘Spain In Our Hearts’ 서문 중에서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애덤 호크실드 (지은이), 이순호 (옮긴이) | 갈라파고스 | 2017-12-22 | 원제 Spain In Our Hearts (2016년)

p11-19

(전략)

머나먼 타국의 강변에서 네 명의 미국인이 조우한 전쟁은 스페인의 역사를 바꿔놓은 주요 사건이었다. 급부상하는 파시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유럽에서는 이 전쟁이 도덕과 정치의 시금석, 다가올 세계대전의 서막으로도 인식되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미국인도 대략 2,800명이었으며, 이 중 750여 명이 전사했다.5 20세기에 미군이 참전한 그 어느 전쟁들 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스페인 내전은 다수의 퇴역병과 일부 미국 특파원들에게도 그들 삶을 결정지은 주요한 경험이었다. 매슈스가 “이 세상 어디든, 남자든 여자든, 나는 스페인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만난다. 동종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6라고 쓴 대로였다. 내전을 취재한 기자들은 미국 저널리즘의 관례마저 무너뜨리며, 참전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동지애를 느꼈다. 스페인 내전 앞에서는 일체의 허식을 떨쳐버린 것이다. 1938년 봄 공화파군이 프랑코군의 맹공을 피해 도망칠 때 《뉴욕 타임스》 특파원 매슈스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특파원이, 기자이면서도 개인 자격으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공화국에 무기를 지원해 주도록 간청하는 전문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7

스페인 내전은 그 뒤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에 묻혀 우리의 집단 기억 속에서는 대체로 사라졌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미국인 수천만 명이 그 소식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뉴욕타임스》만 해도 1936년 중엽부터 1939년 초까지 계속된 내전 기간 동안 그와 관련된 기사를 1,000번 이상이나 1면 헤드라인으로 실었다.8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 나치 독일의 부상, 대공황으로 초래된 재앙을 포함해 다른 모든 기사들을 실은 횟수보다 많은 것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 미국 정부와 달리, 일반 미국인들은 공화파와 국가주의자 양쪽 모두에 깊숙이 관여했다. 미국 의용병들에게 폭격을 가하고 기총소사를 퍼부은 나치 전투기와 폭격기에 연료를 대준 사람도 다름 아닌, 우익 독재자들을 좋아하고 허세가 심했던 텍사스의 오일맨이었다.

내가 스페인 내전을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중엽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수습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신문사의 선배 기자 두 명이 미국 지원병들을 비공식적으로 부르는 호칭이던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의 퇴역병이었던 것이 내가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지금 기억하기로, 그때 나는 내전 때 구급차를 운전한 선배 기자에게 스페인 내전을 어떻게 회상하느냐고 물었다.9 그러자 수동 타자기와 전신기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 식자공에게 기사를 보낼 때 기송관에서 나는 휙 소리 너머로 그가 뉴스룸에서 흔히 오가는 농담과는 확연히 다른 진지한 어조로 “이겼으면 좋았겠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바람과 달리 공화국은 패했고, 그 후에도 내전에는 얼마 간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전이 프랑코 반군의 승리로 끝난 이듬해에 발간되어 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소설들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만 해도,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내전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분위기로 충만하다. 스페인 내전은 당대에 일어난 그 어느 사건보다 “만일의 문제”를 많이 야기시키기도 했다. 만일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그토록 절박하게 구매를 원했던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다면? 그랬다면 그 무기들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보내준 비행기, 잠수함, 군대를 쳐부술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끝내는 다른 십 수 개 나라들도 침략했을까? 만일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다면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야기한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다른 방식의 전쟁이 일어나게 할 수 있었을까? 이런 문제들 말이다.

미국 의용병들도 대부분 자신들이 세계대전의 전초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4년 전에 그들은 이미 스페인에서 나치 전투기의 폭격을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스페인 내전을 그 시대의 시험대로 생각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도 많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알베르 카뮈도 이런 글을 썼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라면 가슴 속에 모두 스페인을 간직하고 있다. … 옳은데도 패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이길 수 있으며, 용기가 보상받지 못한 시대가 있다는 것을 체득한 곳이 바로 스페인이었다.”10

스페인의 위기에 대해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선명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파시즘이 급속히 확산되자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여기서 저항하지 않으면 어디서 저항하겠느냐는 것과도 같았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내전에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 뒤 인권운동 시위, 1960년대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 1980년대의 중앙아메리카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 퇴역병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내가 보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내전에 참가한 의용병들도 여럿 만나고, 그중 두 사람과는 몇 년 간 친구로도 지냈다(그러고 보니 책에는 짧게 언급되었지만, 어릴 때 내가 사고를 당했을 때 상처를 꿰매준 외과의사 자크 그룬블랏 박사도 스페인 내전의 퇴역병이었다). 어느 날에는 이 책의 1장에 등장하는 부부의 남편이 버클리대학교의 대학원생이던 1930년대에 내가 지금 사는 곳에서 고작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골백번도 더 지나쳤을 건물에 그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한층 용이해지는 느낌이었다. 사회적 정의에 관심을 가진 우리 모두는 정치적 조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남녀들-여자 의용병들은 대개 간호사로 지원했는데 대략 75명 정도였다-이야말로 정치적 조상이 아니겠는가.

나는 1960년대 세대의 사람들 못지않게 그것을 강하게 느꼈다. 시공간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 시대에 살았다면 스페인으로 갔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물론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알려진 것보다 어둡고 그리 낭만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계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소련만 공화파에 무기를 팔았으나, 나중에 스페인이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만 해도 그렇다. 실제로나 상상으로나 일부 스페인 사람들은 이오시프 스탈린 독재의 특징이던, 적에 대한 잔혹함의 희생양이 되었다.

(중략 : 소련에서 희생된 스페인인들의 이야기)

스페인 내전의 이 두 얼굴을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의 군사반란에 저항한 스페인인들의 행위는 물론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코 정부만큼이나 잔혹했던 소련과의 얽히고설킨 관계만으로 공화파가 패한 것이었을까? 공화국 수호자들은 가장 비열한 동맹국의 하나를 위해서도 싸웠지만 가장 훌륭한 대의 가운데 하나를 위해서도 싸웠기에 묻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 점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기는 했을까? 아니 생존을 위한 절박한 전쟁이었던 만큼 피아를 구분할 여유조차 없지 않았을까? 이런 문제들도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 대다수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공산주의가 왜 그처럼 강한 호소력을 가졌고, 소련이 왜 다수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비쳐졌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인터내서널가〉를 처음 들은 것은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의 의용병 가운데 한 명의 장례식 때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연대가 스페인을 떠난 지 65년이 지나고 미국 공산당과 결별한 지는 45년이 지난 뒤에 치러진 장례식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찬가였던 〈인터내셔널가〉가 그 무렵에는 젊은 시절의 꿈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몇몇 노인들에 의해서만 불리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무정부주의도 대개는 기반을 상실하고, 그 이념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옛 논거들도 중세의 종교 분쟁만큼이나 아득하고 멀게 느껴진다.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에 봉착해 더는 지속될 수 없다는 신념과 누구의 청사진이 옳은가에 대한 논쟁은 있을지언정, 미래의 청사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광범위한 신념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비록 그 신념은 낯설게 느껴질지라도, 1930년대의 스페인에 만연한 다른 양상들은 현재의 많은 나라들에서 벌어지는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주의적 독재정권과 토지, 교육,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오랫동안 공정한 분배를 거부당한 수백만 명의 힘없는 사람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그렇다. 1930년대의 스페인이 그 시대의 주요 전역이 되고, 우리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전역이 된 것도 그래서였다.

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밖에도 또 있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전쟁, 특히 베트남,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이라크 혹은 여타 나라들에서 일어난 내전이나, 혹은 다른 나라 내정에 미국 정부가 간섭하는 것에 50년 가까이 맹렬하게 저항해왔다. 그런데 유독 스페인 내전에는 그때 미국이 관여했더라면 세계가 한층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전 세대 미국인들도 영웅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다 보니 먼 타국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때는 따로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은 다수의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의 내전에 참여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그것도 미국 정부의 끈질긴 방해를 물리치고 행한 일이었다. 참여자들의 출신 성분도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온 빈자와 부자, 아이비리그 졸업생, 화물열차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다닌 사람들 등 다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그곳에 감으로써 자신들, 전쟁, 자신들이 지켜주려고 한 나라, 자신들이 떠나온 나라에 대해 무엇을 배웠을까? 혹시 나중에 그 일을 후회한 사람은 있었을까?

이 시기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일부 미국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가 행하는 전투에 이끌려 스페인에 간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전선 뒤에서 벌어진 사회혁명에 이끌려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의용병들이 스페인에 오기 몇 달 전에 이미 신혼여행차 스페인 땅을 밟은 정열적인 켄터키 여성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무리의 사람들도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나 자신이 해외에서 자주 취재를 하고 때로는 분쟁 지역에서 취재 활동을 해온 저널리스트이다 보니, 이제는 다분히 신화적 존재가 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미국 기자들의 면면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이다. 매슈스, 헤밍웨이, 그들의 동료 기자들은 기사를 정직하게 썼을까? 열정-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장에서 취재하는 특파원이 백악관에 전문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에 하는 말이다-이 지나쳐 기사를 왜곡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의 삶을 조사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범위를 조금 넓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영국인 세 명-미국인들 편에서 싸운 사람, 미국인들에 맞서 싸운 사람, 모든 미국 독자들이 알만한 사람-도 조사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도 스페인 내전의 역사만은 아니며,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들만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격동의 시대에 고향을 떠나 바다를 건너 삶의 진로를 택한 일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물론 역사는 말끔하게 포장된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당시 스페인에 간 남녀들 중에는 아무리 용기 있게 행동했다 해도 지금 시각으로는 환상과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이상주의와 용기가 지혜와 언제나 같을 수는 없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알아가고, 그들이 속한 시기와 장소에서 나라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은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내가 그들의 삶을 알기 위해 그들의 후손을 만나고, 도서관과 기록 보관소를 찾아다니며, 벽장이나 서랍속에 오랫동안 쑤셔 박혀있던 문서들을 끄집어내고, 마지막에는 에브로 강가를 찾은 것도 그래서였다.

 


5. 이 수치에는 의료 지원병들도 포함돼 있다. 크리스토퍼 브룩스가 관리하는 ALBA 데이터베이스에는 미국인 의용병이 2,644명, 사망자가 734명으로 데이터가 정리돼 있다. 그러나 브룩스도 그렇고, 링컨 대대를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은 실제로는 의용병과 사망자 수가 그보다 많았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책의 본문 175쪽에도 언급되었듯, 링컨 대대와 관련된 일부 초기 기록물들이 트럭 두 대와 함께 사라진 것이 숫자의 정확성을 기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1938년 3월과 4월의 혼란스러웠던 퇴각 때처럼, 다른 때에는 그보다 더 많은 기록물이 분실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6. Matthews, Herbert L. The Education of a Correspondent. New York: Harcourt Brace, 1946, p. 67.

7.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빈센트 쉬안 기자가 전문을 보낸 부분은 Voros, Sandor American Commissar. Philadelphia: Chilton, 1961, pp. 430-431을 참조할 것. 매슈스는 “전투기 200대를 즉시 보내지 않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고 말하는 전문을 여러 매개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James Roosevelt papers, Franklin D. Roosevelt Presidential Library, Hyde Park, NY. Box 62에 나타난 것처럼 《시카고 트리뷴》의 제이 앨런 기자도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남 제임스 루스벨트에게 전문을 보냈다.

8. Chapman, Michael E. Arguing Americanism: Franco Lobbyists, Roosevelt’s Foreign Policy and the Spanish civil War, Kent, OH: Kent State University Press, 2011, pp. 226-227.

9. 교육부 기자 제임스 베넷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일한 또 다른 링컨 대대의 퇴역병이었다.

10. L’Espagne libre(Paris: Calmann-Lévy, 1946),p. 9.

데이터 분석으로 비교한 역사상 최고의 장군?

흥미로운 글[1]을 봐서 그냥 포스팅해 봄. ㅋ

농구에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ins Above Replacement; WAR)라는 시스템이 있는 듯 한데, 나는 스포츠에 문외한이라 처음 듣는 이야기다. ㅎ

WAR이라고 줄여서 부르는 듯 한데, 어떤 선수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선수로 대체된 것 보다 팀의 승리에 얼마나 더 기여를 했는지, 점수로 정량화하여 승리 기여도를 평가하는 시스템 같다. 농구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인가???

뭐 여하간 이 아이디어에 기반하여, 역사상 각종 전투에 대해 장군들의 WAR 평가 시스템을 적용하면, 누가 뛰어난 장군이었는지 비교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같다. ㅎㅎ 블로그 저자가 직접 만든 인터랙티브 페이지[2]가 있으니 직접 클릭해서 확인하기 바란다.


전쟁 데이터는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대부분 구했다고 한다. 카이사르 같은 고대 장군도 있고, 마마보이-_-[3] 맥아더 같은 현대의 장군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 같은 일본의 장수도 포함된 듯 한데, 영문 위키피디아가 부실한건지 몰라도 이순신은 없는 듯. ㅎㅎ 대부분 장군들의 WAR 점수가 하단부에 있는 반면에, 최우측 상단에 아웃라이어가 한 명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WAR 점수가 16.703으로서 2위의 두 배가 넘는다.

나폴레옹하면 Nasica 선생의 블로그[4]가 떠오르는데, 웬만한 책보다도 더 많은 나폴레옹 시대의 정보가 있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 나름 인기가 있는 사람인 듯 하다. 나폴레옹에 관심있으면 이 블로그[4]의 정독을 추천함. ㅎㅎ

글[1]의 뒷부분에 현대의 장군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알렉산더 대왕한니발의 비교도 잠시 언급되어 있다. 근데 포위섬멸작전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캐니 전투의 위키피디아 내용이 엄청 자세하구만. ㅋ 우리로 치면 고조선 끝자락인데, 기원전 전투를 어째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지 신박하네. ㅋ 훨씬 후대인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만 하더라도 자세한 tactics는 거의 알려진게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뭐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은 결과지만, 단 한 명이 유럽 전체를 뒤흔든 역사 무용담을 들어보면 나폴레옹이 진짜 역사상 최고의 장군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 하긴 하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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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apoleon was the Best General Ever, and the Math Proves it. (towardsdatascience.com)
[2] https://ethanarsht.github.io/military_rankings/
[3] 내 백과사전 더글라스 맥아더의 성격 2011년 3월 1일
[4] Nasica의 뜻은 ? (nasica1.tistory.com)

보불전쟁 당시 일본의 반응

도널드 킨 저/김유동 역, “메이지 라는 시대1“,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2017
p396-398

그러는 사이 천황의 관심은 아득히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쏠려 있었다. 보불 전쟁(1870년 7월-1871년 5월)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 정부는 전황 시찰을 위해 네 명의 무사를 유럽으로 파견했다. 이들이 현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프로이센은 연전연승을 거듭해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네 명은 파리로 가서 양군의 전황, 장병의 강약, 병기의 장단점, 승패의 원인, 유럽의 동정 등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프로이센군의 막강함과 전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때까지 일본은 근대 육군을 조직하는 데 프랑스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패배로 일본은 모범으로 심을 모델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때부터 독일식이 일본 육군의 모범이 되었다.450

천황은 이 전쟁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다음은 육군 사관이었던 다카시마 도모노스케(高島鞆之助)의 회상이다.

천황은 보불 전쟁의 전황 보고서를 세밀하게 살펴보고 양군이 채택한 전략에 대해 자꾸만 신하들에게 질문하셨다. 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독일 군함이 요코하마 항에 기항했을 때, 함장은 천황에 게 한 장의 사진을 바쳤다. 그것은 보불 전쟁 때 사진이었는데, 포연이 하늘을 뒤덮고 창공에 살기가 꽉 차 있는 피가 끓고 살이 떨리는 장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독일 함장이 사진 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다고 제의하자, 천황께서는 즉시 허락했다. 사진이 촬영된 날의 양군의 전략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천황은 깊은 관심을 갖고 설명에 귀를 기울이셨다. 용안을 빛내시며 경청하셨다.451

천황은 1S72년 4월 7일, 독일 변리공사로부터 보불 전쟁 개선 축제 사진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물론 천황이 외국인을 이러한 목적으로 어전에 부른 일은 전례가 없었다.452 그 다음 날 천황은 다시 전례를 깨고 다른 나라로 전임하는 영국 대리공사 F. O. 애덤스를 접견했다. 천황은 애덤스에게 “이번 영전은 귀국 황제가 귀하의 가치와 공적을 인정한 결과요, 기뻐할 일이다. 석별의 정은 있으나 차마 붙잡지는 않겠다. 원양만리 자중자애하라”는 칙어를 내렸다.

천황의 말 자체에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은 없으나 일본 궁중이 유럽 궁중의 관습에 대해 얼마나 급속도로 익숙해져 있던가를 보여준다.

프로이센 왕 빌헬름은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1871년 1월, 베르사유에서 독일연방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그 뜻을 전하는 국서가 메이지 천황에게 도착했다.453 천황은 빌헬름 황제에게 축하의 뜻을 전하며 야마토 회화첩 두 질을 보냈다. 이것은 전년 가을, 빌헬름 황제가 보내온 전쟁 화집 세 권에 대한 답례였다.454 일본과 유럽의 거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천황이 ‘사촌’인 유럽 황제들의 새로운 소식을 항시 접하고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450메이지 천황기』 제2권 pp. 326-327, p. 333. 처음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네 명의 시찰단 대표격으로 선택되었으나 번(落)의 사정을 이유로 사퇴했다. 네 명 중에서 연장자에 해당하는 오야마 야스케(大山弥助=이와오巖)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촌으로서 후에 육군대신이 되었고 청일 전쟁 때는 제2군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는 그대로 유럽에 6년간 머물렀으며 후에 내무대신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451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진무(神武) 이래의 영주(英主)」(〈태양〉, 임시 중간호, 『메이지 성천자』 p. 34). 와타나베 이쿠지로는 『메이지 천황』상권 p. 129에(함장이 아니라) 공사가 사진을 가져와서 천황에게 보여주었다고 쓰고 있다. 와타나베는 이 사실을 오하라 시게미(大原重実)가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쓴 1872년 4월 14일자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다. 물론 보불 전쟁은 일찌감치 끝난 뒤였다. 다카시마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똑같은 일이 두 번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아스카이는, 『메이지 대제』 p. 149에서 다카시마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독일 공사가 개선 축제 사진을 바치며 설명했다고 한다. 『메이지 천황기』제2권 p. 665의 기술도 동시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452 와타나베, 『메이지 천황』 상권 p. 129. 장소는 학문소로 되어 있다.

453 일본어 번역문은 『메이지 천황기』 제2권 p. 429에 있다. 메이지 천황의 답신은 동 P. 430에 있다.

454 황제는 메이지 천황에게 주기 위해 전쟁 사진을 독일 대리공사 폰 브란트에게 보냈다. 대리공사는 그것을 가지고 1870년 9월 12일 입궐했으나 천황은 몸이 편치 않았기 때문에 아키히토 친왕이 대신 받았다. 『메이지 천황기』 제2권 p. 336.

[서평] 임진난의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임진난의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l 그들이 본 우리 1
루이스 프로이스(저자) | 정성화(역자) | 양윤선(역자) | 살림 | 2008-03-28

 


살림 출판사의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1] 책이 꽤 많이 출간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권이다. ‘그들이 본 우리’ 시리즈는 나름 흥미로운 책들이 포진해 있으므로 몇 권 사 놓고 있긴 한데, 게을러서-_- 여태 읽지 않고 있다. ㅠㅠ

16세기 예수회 소속의 루이스 프로이스라는 포르투칼 사람이 포교를 위해 일본에 체류할 당시의 일을 남긴 기록이 ‘일본사‘인데, 이 책은 그 중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부분을 번역한 책이다. 프로이스가 직접 쓴 원본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몇 종의 사본이 남아있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번역으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번역한 책[2]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보다는 분량이 적다. 이 책은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의 p163부터 내용이 겹치고, 그 이후로 끝 부분까지 동일한 내용이다.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도 읽은지 오래되어 생각이 나지 않아서 두 책을 끝까지 비교해가면서 읽어봤다. 동일한 내용이므로 사실 어느 책을 읽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본인 같은 문외한에게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배경지식을 주석으로 비교적 상세히 설명해 주는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 쪽이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 책은 국립진주박물관 번역본[2]에서는 보이지 않는 원본의 빈칸이나 소소하게 다른 해석의 여지를 소개하고 있어, 비교하며 읽는 재미는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프로이스의 생애와 ‘일본사’의 집필과정, 서지학적 해석, 몇 가지 판본의 비교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어, 이 부분은 흥미롭게 볼만하다.

다만 주석이 각 장 뒤쪽에 있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보기 불편하다. 사람들이 왜 미주 따위를 쓰는 건지 이해가 안 됨-_- 특히 책을 파쇄하여 스캔해 두면 페이지를 찾아가며 넘기기 불편하기 때문에 각주가 무조건 좋다. ㅋㅋㅋ

특히 어지긴한 일본사 덕후가 아닌 이상-_-,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등장하는 수많은 장수들이 전부 누구인지 꿰고 있기란 쉽지 않으므로, 장수들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나무위키에 전국 시대의 장수들에 대한 설명이 쓸데없이 엄청 잘 돼있다. ㅋㅋㅋ 책을 읽으면서 계속 참고했다. ㅎㅎ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번역한 책이 근래 또 한 권[3] 출간되었던데, 본인은 읽지 않았다. 다만, 책 소개에 따르면, 두 번이나 번역된 임진왜란 부분은 제외 했다고 나와 있어, 한 번 사서 읽어 볼만 할 듯 하다.

 


[1] 그들이 본 우리 (aladin.co.kr)
[2] 내 백과사전 [서평]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2011년 8월 1일
[3] 루이스 프로이스 저/박수철 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 위더스북, 2017

게임 이론을 비스마르크 해전에 적용하기

앤터니 비버 선생의 책[1;p694]을 읽으니 본인이 좋아하는 비스마르크 해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용이 많이 간략하다. ㅋㅋ 이걸 보니 비스마르크 해전에 관해 본인이 아주 오래전에 게임 이론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교재를 만든 게 생각나서 온통 뒤져봤는데, 디지털 파일은 분실하고 인쇄물로만 남아 있었다. 이걸 그냥 버리기도 그렇고 해서 걍 블로그에 남겨본다.

이 글의 뼈대는 Haywood의 논문[2]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이나, [2]에 나와있지 않은 역사적 사실 부분은 모두 위키피디아의 Battle of the Bismarck Sea 항목, Skip bombing 항목, ビスマルク海海戦 항목이 출처이므로, 본 블로그는 역사적 내용의 정확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문제 1

1943년 2월, 맥아더 장군의 남서 태평양해역군이 부나(Buna)를 함락하고 라에(Lae)에 주둔한 일본 기지를 위협하게 되자 일본군은 라에의 기지를 증원하기 위해 대규모의 병력 이동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2월까지 제 20사단과 41사단이 일차적으로 후송되었고, 다음 18군 사령부와 제 51사단을 실은 8척의 수송선이 8대의 구축함과 100대의 폭격기의 호위를 받으며 라바울(Rabaul)에서 라에로의 수송 작전에 돌입하였다. 제 3함대를 지휘하는 기무라 마사토미(木村昌福) 제독은 라바울의 심슨항에 정박한 구축함 시라유키(白雪)에 승선하였다. 이 작전은 연합군의 세력이 상당히 강한 비티아즈 해협(Vitiaz Strait)을 통과해야하는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으므로 참모 측에서 전멸을 예감하고 중지를 건의하였으나 81호 작전계획 담당인 제 8함대 작전참모 카미 시게노리(神重徳) 대좌는 “명령이니까 전멸할 각오로 임하라”라는 답변만 할 뿐이었다. 이미지 출처 [2;p366]

미군의 암호 해독팀은 일본군의 무전 통신 전파를 가로채어 해독하는데 성공하였고, 남서 태평양 공군 제독 소장 조지 케니(George Kenney)의 지휘하의 연합군 공군과 뉴기니에 있는 연합군 육군은 그러한 조우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특별히 개조된 미공군 B-25 미첼 폭격기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뷰파이터 폭격기의 조종사들은 대공 선박 폭격 연습을 준비해왔다. 미첼 조종사는 “물수제비 폭격(skip bombing)”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이 폭격 방식은 B-25같은 쌍발폭격기들이 고도 60~150m, 시속 420km의 속력으로 적함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여 철갑폭탄을 투하하면 폭탄이 물수제비처럼 수면을 튀어 배의 측면에 타격을 주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발사 후 명중까지 수 분이 걸리는 어뢰와 달리, 폭탄 투하 후 수 초 이내에 표적에 도달하므로 회피가 불가능하고 선박의 수선 부근에 타격을 주어 어뢰처럼 표적함정에 침수를 일으키므로 구축함 급 이하의 전투함이나 수송선 등 현측장갑이 없는 함정들에게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과시하였다.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의 선택은 두 가지로 크게 압축되는데 라바울에서 라에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북쪽 경로와 남쪽 경로가 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정찰의 시계가 상당히 나쁜 시기였고 조지 케니 장군 역시 정찰의 집중도를 북쪽과 남쪽 두 군데 중 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가상적으로 수치화 해 보자.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기무라 마사토미가 어느 경로를 택하든 거리는 비슷하므로 (논문[2]에 첨부된 저 그림은 안 비슷해 보이는데, 구글맵으로 보면 비슷해 보임-_-), 양쪽 모두 약 3일 간의 항해가 예측된다. 실제로 솔로몬 해역 및 비스마르크 해역에서 2월 말부더 태풍이 불어와 시계가 상당히 나쁜 상태였다. 조지 케니 역시 정찰기의 태반을 뉴 브리튼 섬 북쪽 지역 아니면 남쪽 지역 중 어느 한 쪽을 따라 집중시킬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미군이 남쪽으로 정찰하는데 일본군이 북쪽올 항해한다면 미군은 1일 간의 폭격을 할 수 있고, 일본군이 남쪽으로 항해를 하면 미군은 3일간의 폭격을 할 수 있다고 하자. 반면에 미군이 북쪽으로 정찰할 때 일본군이 남쪽으로 항해한다면 2일간의 폭격이 가능하고, 일본군이 북쪽으로 항해해도 2일간의 폭격이 가능하다고 하자. 이미지 출처 [2;p368]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은 표로도 만들 수 있다.

케니\기무라 북으로 항해 남으로 항해
북으로 정찰 2일 폭격 2일 폭격
남으로 정찰 1일 폭격 3일 폭격

이려한 상황은 게임이론에서 메우 전형적인 설정이다. 즉, 제로섬 게임이고, 단판으로 게임이 종결되고, 한번 선택온 돌이킬 수 없고, 게임 내의 제반 정보는 모두 쌍방에 공개되어 있으나 서로 상대방의 선택을 알 수는 없다. 각 게임 참가자 (케니와 기무라)는 최악의 결과를 가급적 회피하려고 한다고 할 때 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을까?

 


문제 1 풀이

케니의 관점에서 보자. 미군은 가능한 많은 날수를 폭격할 수 있는 선택을 원한다. 그래서 각 선택에 대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보자.

케니\기무라 북으로 항해 남으로 항해 각 행의 최소값
북으로 정찰 2일 폭격 2일 폭격 2
남으로 정찰 1일 폭격 3일 폭격 1

따라서 그 최소값들 중에서 최대가 되는 값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케니는 북으로 정찰하는 방향을 택하게 된다.

기무라의 관점에서 보자. 일본군은 가능한 적은 날 수를 폭격할 수 있는 선택을 원한다. 마찬가지로 각 선택에 대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자.

케니\기무라 북으로 항해 남으로 항해
북으로 정찰 2일 폭격 2일 폭격
남으로 정찰 1일 폭격 3일 폭격
각 열의 최대값 2 3

따라서 그 최대값들 중 최소가 되는 값을 선택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따라서 기무라는 북으로 항해하는 방향을 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최대들 중에서 최소, 최소들 중에서 최대를 선택하는 전략을 미니맥스 전략이라고 한다.

실제로 기무라 마사토미 제독은 북쪽 경로인 비스마르크 해를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였고, 2월 28일까지 흐리던 날씨가 3월 1일부터 맑아지고, B-24폭격기 조종사의 순찰에 발각되면서 비스마르크 해전이 시작된다. 이미지 출처

3월 2일부터 이틀 사이에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의 대규모 폭격이 시작되었고, 물수제비 폭격술을 이용하여 57발 중 28발을 명중(이 숫자의 출처가 불명)하는 기염을 토해내는 놀라운 명중률을 보이며 일본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거의 살육에 가까운 이 비스마르크 해전으로 인해 미 공군과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은 겨우 13명의 조종사를 잃고 5대의 전투기가 파손되었지만, 일본군은 8척의 수송선([1;p694]에는 7척)과 4척의 구축함이 가라앉고 약 3000명의 지상군이 사망하는 재앙을 맞게 된다. 이 전투의 타격으로 인해 일본군은 파푸아 뉴기니에서의 장악력을 점차 잃게 되고 나아가 태평양에서의 세력을 잃게 된다.

 


[1] 앤터니 비버 저/김규태, 박리라 역, “2차 세계대전”, 글항아리, 2017
[2] O. G. Haywood, Jr. “Military Decision and Game Theory”, Journal of the Operations Research Society of America, Published Online: November 1, 1954 p365-385 https://doi.org/10.1287/opre.2.4.365

앤터니 비버가 양경종 이야기에 낚였나?

얼마전에 언급[1]한 앤터니 비버 선생의 ‘제2차 세계대전’을 읽고 있는데, 머리말에 한 페이지 정도 짧게 노르망디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된 양경종 이야기가 나온다.

전쟁사 관련 블로거인 ‘길 잃은 어린양’ 선생의 블로그에 이와 관련하여 쓴 글[2]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아주아주 예전에 슐리펜 계획에 대해 검색하면서 이 블로그를 알게 되었는데, 여태 글을 쓰고 계시는 줄 몰랐네. ㅎㅎ

나무위키의 항목[3]도 그렇고, 이 이야기가 국내에서는 거의 구라 확정인 듯한 분위기인 듯 하다. 구라가 군사사학자까지 낚은 사건일지도 모를 일이긴 하나, 책의 전체 내용상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거의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라서 저자 본인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듯한 느낌이 든다. 뭐 이런 사소하게 한국인이 엮인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나 관심있을 터이니, 아무래도 영원히 진위 여부는 밝혀지지 않을 스토리가 될 것 같다.

그러나 앤터니 선생의 책에서 이 이야기 부분은 확실히 출처가 미약한 것은 사실이니, 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1] 내 백과사전 앤터니 비버 선생의 신간 ‘제2차 세계대전’ 2017년 3월 25일
[2] 앤터니 비버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르망디의 조선인’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네요? (길 잃은 어린양)
[3] 노르망디의 한국인 (나무위키)

[서평] 전격전, 프랑스 패망과 거짓 신화의 시작

전격전, 프랑스 패망과 거짓 신화의 시작
로버트 알란 다우티 (지은이) | 황금알 | 201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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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및 현대 전쟁사는 매우 러프하게 기동과 화력의 양면으로 분류가능하다고 본다. 나폴레옹이 주로 기동성을 중심으로 승리를 하였다면, 1차대전은 화력에 비중을 둔 벙커전이라 생각할 수 있다. 1차 대전의 경험에 매몰되어 화력 중심의 벙커전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혔던 시대에, 현대적 무기인 전차를 이용한 기동중심의 작전을 펼친 시기가 2차대전의 서부 전역이라 볼 수 있다.

1940년 독일의 서부전역 당시 독일군의 스당진격은 흔히 ‘전격전’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이 사실은 사전에 잘 계획된 작전이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독일 장군의 반대 및 수많은 실패 가능성을 넘어서 우연적인 결과에 가깝다는 주장은 칼 하인츠 프리저의 ‘전격전의 전설'[1]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책도 칼 하인츠의 책[1]과 관점은 거의 동일하지만 책의 분량이 적은 관계로 그 책과 비교하여 디테일한 설명이 훨씬 적고 축약되어 있다. 사단 및 군단의 지휘체계 편성 단대호도 칼 하인츠 쪽이 더 자세하다. 저자인 Robert A. Doughty의 위키피디아 항목을 확인해보니 이 책의 원저 ‘The breaking point. Sedan and the fall of France 1940’가 쓰여진 시기는 1990년이고 칼 하인츠의 책은 2005년이므로 아무래도 칼 하인츠 쪽이 후대에 발굴된 더 많은 자료를 참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칼 하인츠의 책을 읽은 사람은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몇몇 사건에서 미세한 관점의 차이는 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 제2군의 반격작전을 지휘한 플라비니와 브로카르 장군의 책임론에서 칼 하인츠[1;p320]는 플라비니와 브로카르 장군이 무능했던 것처럼 묘사하지만, 이 책(p339)에서는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듯한 묘사를 하고 있다.

동일한 지명이 칼 하인츠의 책[1]과 이 책에서 약간 차이가 나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동일한 강을 프랑스에서 뫼즈 강(Meuse)이라 부르고, 네덜란드에서 마스 강(Maas)이라 부르기 때문에, 두 책에서 차이가 있다.

전반적으로 1940년 서부전역은 독일의 상식을 깬 도박적 전략+프랑스 지휘계통의 무능함의 복합적 결과라는 점에서, 두 책의 큰 관점의 차이는 없다.

 


[1] 전격전의 전설 칼 하인츠 프리저 (지은이), 진중근 (옮긴이) | 일조각 | 2007-12-31 | 원제 Blitzkrieg-Lege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