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의 적은 그린스펀

앨런 그린스펀의 삶과 시대
세바스찬 말라비 (지은이),박홍경 (옮긴이) 다산출판사 2018-10-30 원제 : The Man Who Knew (2016년)

p183~188

모든 일이 벌어진 후에 당시를 돌아보면 그린스펀의 입장은 인상적이기도 하고 모순적이기도 하다. 그린스펀의 비판자들은 그가 연준 의장에 있던 시절에 부의 효과와 버블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훨씬 전부터 이러한 문제를 시대를 앞질러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부분에서도 시대를 앞서 있었다. 1970년대와 그 이후의 대다수 예측 모델은 기본적으로 금융을 배제했다. 자본을 예금자에서 투자자로 이동시키는 일은 유틸리티와 같은 기능일 뿐 성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가정했다. 주택 지분가치 추출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금융 분야의 변화가 경제의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8 이처럼 경제 전문가들이 금융을 과소평가하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옳지 않다는 점은 2008년 금융위기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그린스펀은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1950년대에 존 걸리와 에드워드 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이래 금융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강조했다. 1970년대에는 경제 예측에 금융을 고려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욱 굳건해졌다. 이 당시 논문에서 그는 “오늘날의 금융기관은 수십 년 전보다 더 유연하고 복잡하다. 금융시스템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도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요소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낙관적으로 위험을 감수(risk taking)하는 태도에서 비관적으로 안전 자산을 추구하는 태도로 변화하는 것은 곧 두드러지는 요소에서 눈에 띄지 않는 요소의 변화이며 지출과 생산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 타운센드-그린스펀에서 그린스펀은 채권 발행과 MMF, 일반 은행 업무를 추적했고 관찰한 내용을 예측 모델로 바꾸는 작업에 매달렸다. 이러한 접근은 그린스펀의 멘토이자 파트너였던 빌 타운센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존 테일러가 2011년에 회고했듯 “시대를 앞서가는 접근”이기도 했다.

(중략)

그린스펀은 세금 관련 증언을 한 3개월 후인 1978년 10월에 주택금융에 관련된 주장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주장을 내놓은 곳은 다소 의외의 장소인 유타주립대학교였다.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13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산지 속 소도시에서 연설을 해 달라고 초대받았다. 연설에서 그는 주택 지분가치 추출에 대한 논문에 함축되어 있던 의문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금융 분야에서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모기지 대출이 폭증하였다.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우선 그린스펀은 금리와 주택시장의 관계가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금리가 인상되면 모기지금융은 말라버렸다. 그러면 주택 수요가 감소했고 자연히 주택 가격도 떨어졌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에는 금리 인상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린스펀이 유타에서 연설을 하던 시기 즈음에 연준은 단기금리를 9퍼센트로 인상했지만 여전히 모기지 대출은 손쉽게 받을 수 있었고 주택가격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12

그린스펀은 정부로 인해 게임의 규칙이 바뀐 것이 변화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건설업계는 고금리 때문에 주기적으로 부동산시장이 타격을 입자 분개하여 워싱턴 정가에 구제해 달라는 로비를 펼쳤다. 정치인들은 업계의 요구에 응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시도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가 지나쳤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1970년 불황기에 페니매(Fannie Mae)라는 정부지원기관(Government Sponsored Enterprise)이 설립되어 처음으로 민간 모기지를 인수했다. 같은 해 의회는 페니매와 경쟁할 두 번째 GSE인 프레디맥 (Freddie Mac)을 설립했다. 페니매와 프레디맥은 경쟁적으로 은행과 저축대부조합의 모기지를 사들였다. 덕분에 대출 기관은 거대한 자금 조달원을 새로 확보하였고 ‘모기지 신용 가능성(credit availability)의 대규모 확대’ 가 일어났다. 십년 전만 해도 모기지의 신규 창출은 연간 150억 달러 남짓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금액의 여섯 배가 평범한 수준이 되었다.

그린스펀은 이러한 혁명이 주택시장의 변화를 일으킨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모기지시장은 새롭고 중요한 금융기구로 인해 폭발했는데 이 기구는 연방 적자, 기업 대출, 주 및 지방 정부의 차입을 작아 보이게 만든다. 또한 전체 금융시스템에서 가장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 GSE는 주택가격을 끌어올리고 가계의 부를 늘려 소비를 증가시켰다. 정치적으로 금융이라는 배관에 실시된 변화는 휴가, 교육, 대형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지출이 늘어나는 데 일조했다. 결과적으로 모기지 폭발은 단순히 주택시장과 금리의 연계를 끊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최소한 단기적으로 경제 전체와 금리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연준이 단기금리를 4년래 최고 수준까지 인상했지만 페니매와 프레디맥 덕분에 값싸게 대출을 얻을 수 있었고 대출 기관의 대출 여력도 풍부했다. 분명 통화정책은 긴축적이었으나 실계 금융환경은 완화적이었다.13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은 아니었다.14

그린스펀은 훗날 이러한 상황에 ‘수수께끼(conundrum)’ 라는 이름을 붙였다.15 2005년 2월 의회 증언에서 그는 연준의 금리 인상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밝혔다. 외국인의 국채 매입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장기채 금리를 끌어내려 단기금리의 인상이 장기금리 상승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린스펀은 연준이 주택 버블을 진정시키기에 거의 무력할 정도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장기 모기지 금리는 연준의 단기금리 조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장단기금리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그린스펀이 지적한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그는 박사 논문을 통해 금융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끊임없이 경제활동을 변화시켰다고 밝혔다. 2000년대 외국인의 미국채 매입은 이를 잘 보여주며, 1970년대 페니매와 프레디맥의 출현은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린스펀은 경제 성장이 일시적이나마 금리와 무관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곧 문제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훗날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거액을 차입하는 등 새로운 신용 경로가 개방되면서 자산가격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1978년 그린스펀은 모기지라는 호스가 열리면서 소비자물가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페니매와 프레디맥으로 창출된 소비력은 이미 CPI 인플레이션을 연율 8퍼센트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게다가 이에 맞서는 연준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에 그 효과는 더욱 강력했다. 그린스펀은 연준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고 질타했는데 이제와 돌아보면 무척이나 아이러니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연준은 금융 혁신이라는 자극을 단기금리 인상으로 맞서는 대신 금융시스템이 제 길을 가도록 방조했다. 그 결과 ‘금융시스템에 거대한 신용 과잉’이 발생했다.16 결국 연준이 칼을 빼들면 파티는 멈추겠지만 칼을 꺼내는 시기가 늦춰질수록 주택 버블이 꺼질 때의 고통은 심해질 것이다.

그린스펀은 1978년 10월 유타주립대의 연설을 마무리하면서 “불황이 다가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특히 최근 금융시장에 발생한 불균형을 숨길 방법을 찾으려 한다면 그런 시도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정확히 같은 내용의 경고가 2006년 1월, 연준 의장에서 사임하던 그린스펀에게 내려졌다.

 


8. 이 아이디어의 여러 버전이 케인스 이전에도 존재했다. 화폐를 경제의 실제 작용을 숨기는 ‘베일’ 로 묘사하거나 거래에서 바퀴가 아닌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비유했다.

12. 그린스펀이 연설할 당시 주택가격은 인플레이션 조정 후 연 6퍼센트 이상 상승했다.

13. 연준의 정책이 겉보기보다 긴축 정도가 약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근원 PCE 인플레이션을 차감한 실질단기금리는 그린스펀의 연설 당시 2퍼센트 남짓이었다。하지만 단기금리와 모기지금리의 탈동조화추세는 뚜렷했다. 1975년 10월 초부터 1978년 10월 초까지 연준은 단기금리를 6.2퍼센트에서 8.9퍼센트로 인상했지만 30년 모기지금리는 9.22퍼센트 에서 9.86퍼센트로 0.6퍼센트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쳤다。모기지 데이터는 세인트루이스 연준의 FRED (Federal Reserve Economic Data) 데이터베이스를 참고.

14. 1978 년 초부터 9월까지 인플레이션 조정 후 성장률은 5.3퍼센트를 기록했다.

15. 모기지 금리 관련 ‘수수께끼(conundrum)’의 존재는 이 기간 학계의 연구에서 빠져 있다. 하지만 회고 분석에 따르면 그린스펀의 견해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1954~69년에는 실질 연방기금금리와 주택모기지의 계절 조정의 상관관계가 강했다(외교 협회의 워커(Dinah Walker)의 계산에 따르면 R2가 0.4로 집계 됐다). 1970~84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약화됐다(R2가 0.06). 다시 말해 1978년에는 금리와 모기지 대출 성장률 간에 존재했던 강한 상관관계가 깨졌다.

16. 2007년 이후 그린스펀은 ‘수수께끼’가 연준을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시사했다. 하지만 1978년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준이 강하게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예전에 박근혜의 주장은 박근혜의 과거 주장으로 반박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박적박(박근혜의 적은 박근혜)라는 개그가 생각나는데, 비슷하게 윤적윤도 있다-_- 그린스펀 선생의 전기를 보니 그적그-_-라고 해야할 판이구만-_-

근데 사실 나도 옛날에 쓴 블로그 글을 읽으면 ‘내가 이렇게 생각했었나’-_- 싶은 경우가 좀 있다. 반성하면서 발전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 같다. ㅎㅎ

앨런 그린스펀의 연방준비은행 반대론

앨런 그린스펀의 삶과 시대
세바스찬 말라비 (지은이), 박홍경 (옮긴이) | 다산출판사 | 2018-10-30 | 원제 The Man Who Knew (2016년)

p84-86

그린스펀은 서두에서 “자유방임주의가 경제 체제에서 유일하게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라면서 강연 취지를 밝혔다. 시장가격의 공정성을 공격하는 태도는 곧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가격을 형성하는 개인을 비난하는 도덕적 판단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사업가, 또는 그린스펀의 표현대로 기업가(enterpriser)’는 영웅이다. 기업가는 사회의 생산적 에너지를 평범한 시민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핵심적인 인물이며 이러한 작업을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해낸다. 미국은 자유방임주의를 채택한 덕분에 경쟁자들을 제쳤다. 하지만 미국의 실용적이고 기업가적인 사고는 ‘물질 추구가 악하고 비도덕적이라는 윤리적, 종교적인 견해’와 충돌했다고 그린스펀은 탄식했다. 그린스펀은 청중들에게 “『아틀라스』가 미국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온전히 평가하려면 미국사에 나타난 이런 모순의 해악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객관주의자 신념의 인내심을 발휘해 그는 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개인이 분업을 하는 이유, 상업적 교환에 참여하는 이유, 비교우위와 절대우위의 차이 등을 다뤘다, 또한 통화의 목적과 기원에 대해 심도 깊게 고찰하였으며 특히 금을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1913년 연방준비법이 통과되기 이전의 ‘자유은행’ 시대를 찬양했다. 당시 은행은 금 보유고를 근거로 민간통화(private money)를 발행했고 정치적인 간섭을 받지 않았다. 그는 도덕적 근거에서 민간통화가 정부가 발행하는 통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민간은행의 지폐의 경우 은행가의 말이 금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진다.” 반면 정부가 발행하는 지폐가 가치를 지니는 근거는 명예가 아니라 강제적 명령에 있다, 법이 강제하기 때문에 지폐가 통용되는 것이다. 그린스펀은 화폐에 대한 『아틀라스』의 유명한 구절을 읊으면서 불태환화폐(fiat currency)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성을 강조했다, “지폐의 궁극적인 보증은 민간인의 신성한 말이 아니라 정부 관료가 겨누는 총구다.”

그린스펀은 민간 발행 화폐를 선호하는 이유를 도덕적 근거뿐만 아니라 실용적/실제적/현실적 차원에서도 드러냈다. 그는 민간화폐는 수량이 한정되어 있는 이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처럼 화폐의 사용을 강제할 힘이 없었던 19세기 ‘자유’ 은행은 오로지 은행의 금 보유고로 확실히 보증할 수 있는 가주권(scrip)만을 발행했다. 따라서 화폐를 무한정 찍어낼 수 없었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기도 했다. 중앙은행의 안전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민간은행이 가주권을 금으로 교환해 주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금을 보유하고 있는지 항상 의심을 샀던 것이다. 그러한 의혹이 짙어지면 은행은 경영이 악화되어 대출을 전면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경제는 둔화되었다. 연방준비법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의 지도자들이 ‘탄력적 통화(elastic currency)를 공급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설립하도록 이끈 원인이 바로 ‘머니 패닉’ 이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이러한 논리를 멸시했으니 경제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린스펀이 보기에 19세기의 머니 패닉은 유익한 면이 있었다.20 분명 단기적으로는 경제활동을 위축시켰지만 자산 버블의 팽창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은행은 머니 패닉 덕분에 금 보유고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신용이 창출되지 않았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했다. 다시 말해 버블이 위험한 수준으로 커지도록 돈을 찍어내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역사에서 완전히 잘못된 교훈을 얻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머니 패닉이 은행의 금 보유고 부족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한 정치인들은 “머니 패닉의 치료책이란 은행시스템에서 보유고의 부족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이는 무척 간단하다.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란 얼음 사이에 온도계를 꽂아 열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미국 역사상 재앙에 버금가는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연방준비제도의 설립이었다.”

이 ‘역사적 재앙’, 즉 훗날 그린스펀이 이끄는 중앙은행의 설립은 은행시스템이 정치적으로 무한한 지급준비금을 갖추는 멋진 신세계를 열었다.21 은행은 보유하던 금을 연준에 넘겼고, 그 대가로 연준 예치금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예치금은 은행시스템의 새로운 지급준비금이 되었다. 금과 달리 새로운 지급준비금은 중앙은행의 명령에 따라 탄력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다. 연준은 은행이 보유한 국고채를 매입하면서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늘리는 방식으로 정산하는데 이는 신용을 창출한다. 혹은 은행의 기업채권을 받아들이면서 준비금 계좌를 더 차감하여 은행이 보유한 기타 자산을 ‘할인’ 할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은 마법이 가능해지자 은행은 더 이상 자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경제는 머니 패닉을 방지하는 예방주사를 맞았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솜씨 좋은 새 시스템이 썩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준비금의 부족을 방지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영원한 번영을 가져오는 대신 세계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경제적 재앙을 초래했다. 1930년대에 대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강의가 종반부로 가면서 그린스펀은 뉴프런티어 경제에 대한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연준은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의 보좌진들이 약속한 완전 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은행준비금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려 경제를 부양하고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이는 단순히 기술관료의 실수가 아니었다. 인간 진보의 진실한 동력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뉴프런티어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경제를 하나의 기계로 이해하고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듯 미세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경제 발전은 사회 경제, 시스템 등의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기능이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정도까지 우리 사회는 인간 의 성취가 일궈낸 잔광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 부를 창출하던 위대한 인물들은 복지국가가 부상하면서 역사 속에서 오명을 얻었다.”라고 한탄하면서 어릴 때 흠모했던 영웅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제임스 힐J. P. 모건은 평범함을 숭배하는 사회에 대한 모욕이다.” 과감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평범함이 서서히 국가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말 것이다. 그는 아인 랜드의 레퍼토리에서도 한 구절 빌려 왔다. 미국이 스스로 “원초적인 이타주의적 도덕성에 순응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노예, 폭력, 발전 없는 오류, 제물로 바쳐진 용광로”라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처럼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는 엘리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답하면서 일종의 자유의지론 레닌주의(libertarian Leninism)를 설파했다, 19세기의 자유국가를 회복하기 위해 대중을 전부 객관주의자로 개종시킬 필요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대신 “수백, 많아야 수천 명 정도인 지식인 지도자들이 트랜드를 설정하는데 이 지도자들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대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공산주의는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면서 루스벨트 호텔에 모인 열정적인 형제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전투 준비를 명령했다. “객관주의는 공산주의와 과거의 철학적 운동과 비교해 대단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객관주의는 올바를 뿐만 아니라 현실에 부합하고, 이 땅에서의 삶과 일치한다.”

 


20. 그린스펀의 설명과는 극명하게 엇갈리게도 19세기 말의 일부 금융공황은 일시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불황을 야기했다. 가령 1873년의 패닉은 당시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불렸던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그린스펀은 강의에서 남북전쟁 중 금본위제가 정지된 결과로 이런 불황이 일어났다고 제시했다. 전쟁중 정부가 소위 그린백(greenback)을 발행한 것이다. 그린스펀의 설명에 따르면 1970년대의 불황은 투자자들이 1879년(금태환의 재개로) 그린백이 금에 자리를 내줄 것을 예상함에 따라 신용이 수축되어 디플레이션이 찾아온 결과였다.
21. 금본위제는 1914년 연준이 설립된 이후 1971년 닉슨이 달러와 금의 연계성을 폐기하기까지 단계적으로 해체됐다. 그렇더라도 1914년 이후 정부가 임의로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만들어 낼 능력을 얻었다는 지적은 옳다. 곤란할 때마다 남은 제약 사항의 완화를 명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연방은행장으로 명성을 얻은 그린스펀으로서, 젊었을 때 연방은행과 Fiat money에 반대하고 금본위제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인식조차 배리 아이켄그린 선생의 주장[1]과 정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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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서평] 황금 족쇄 –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2019년 1월 11일

파인만 샌드위치

블랙홀 전쟁 – 양자 역학과 물리학의 미래를 둘러싼 위대한 과학 논쟁
레너드 서스킨드 (지은이), 이종필 (옮긴이) | 사이언스북스 | 2011-08-31 | 원제 The Black Hole War

p27-28

파인만과 토프트는 재기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파인만은 말하자면 미국형이었다. 경솔하고 무례하며 마초스러우면서도 늘 한발 앞섰다 한번은 칼텍(Caltech,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의 젊은 물리학자들과 같이 있는데, 파인만이 대학원 학생들한테 당한 이야기를 해 줬다. 패서디나에는 ‘명사들’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누구나 험프리 보거트, 마릴린 먼로 등의 이름이 붙은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파인만의 생일이었던 것 같다) 학생들은 점심을 먹자며 파인만을 데리고 그 가게로 가서는 차례로 파인만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학생들이 지배인과 사전에 모의한 것이다. 카운터 점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내가 말했다. “세상에나, 파인만, 파인만 샌드위치하고 서스킨드 샌드위치하고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요?”

“뭐, 거의 똑같겠지.”라고 하면서 파인만이 대답했다. “다만 서스킨드 샌드위치에는 햄(햄(ham)에는 ‘아마추어,엉터리’ 같은 의미도 있다 – 옮긴이)이 더 많겠지.”

“그래요,” 내가 응수했다 “하지만 볼로냐 소시지(볼로냐 소시지(balony)에는 ‘잠꼬대 같은 소리’같은 의미도 있다. – 옮긴이)는 훨씬 덜 들었겠죠.’ 아마도 그것이 내가 그런 게임에서 파인만을 이겨 본 유일한 경우였을 것이다.

ㅋㅋㅋ 파인만 샌드위치 함 먹어보고 싶구만. 근데 내가 보기에는 서스킨드 선생이 이겼다기 보다는 둘이 비긴 듯 하다. ㅎㅎ

[서평] 아베 삼대 – ‘도련님’은 어떻게 ‘우파’의 아이콘이 되었나

아베 삼대 – ‘도련님’은 어떻게 ‘우파’의 아이콘이 되었나
아오키 오사무 (지은이), 길윤형 (옮긴이) | 서해문집 | 2017-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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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가 이번 총재선거에서 압승[1]하면서, 일본 역대 최장기 집권 총리가 사실상 확정되어 일본 정치사를 다시 쓰고 있다. 모리토모 학교 비리[2]나 후쿠다 준이치 성희롱[3] 등등 각종 부도덕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력한 집권을 유지하고 있으니, 현재 일본의 리버럴계는 거의 재앙적 상황일 듯 하다.

그는 화려한 정계집안으로도 유명한데, 이 책은 저널리스트인 아오키 오사무씨가 할아버지인 아베 간, 아버지 아베 신타로에 이어 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아베가 3대 정치인의 성격, 행적 및 가치관을 추적하는 책이다.

저널리스트 답게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하고 있고, 다양한 정보를 조립하여 당대 인물들의 성격, 행적, 가치관을 재구성하고 있다. 일본인들도 잘 모르는 일본 현대 정계사 이야기라고 하니, 확실히 발로 뛰어 쓴 책이라는 인상이 든다.

흥미롭게도 그의 할아버지 간은 도조 히데키에 저항했던 강한 반전론자였고, 그의 아버지 신타로도 온건 자유주의 정도로 볼 수 있는 비교적 합리적 성격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아베 신조는 지금까지 중의원 선거에서 그의 집안의 후광의 덕을 봐 지역구 당선을 계속 해 왔던 만큼, 현 총리의 극우적 행보와 꽤나 거리가 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신조의 학창시절 및 사회경력의 증거를 토대로, 그의 정치관은 매우 늦게 형성되었고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나무위키의 아베 신조 항목[4]에 한국계 떡밥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명확한 이유가 이 책에 설명되어 있다. 재일 한국인이 일본내에서 차별받던 시절에 아베 신타로가 정치적으로 비교적 공정성 있는 영향력을 발휘하여, 재일 한국인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신타로는 재일 한국인들과 가깝게 지냈고, 경제적으로 성공했던 재일 한국인의 지원을 받았던 것 같다.

p90에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간이 같이 찍혀 있는 사진 한 장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사진을 직접 볼 수 없을까 싶어 구글 검색을 해 봤지만, 암만 해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흔히 알려진 사진은 아닌 듯 하다. 책에 사진이 있으면하는 아쉬운 생각도 들지만, 이런 구하기 어려운 사진을 발굴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저자가 탐사 조사를 많이 했다는 느낌이 든다.

p213에 아베 신타로의 이부동생인 니시무라 마사오가 별세하기 직전에 기고한 글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는데, 쇼와사와 전쟁사에 무지한 정치가에 대한 비판, 야스쿠니 신사의 총리참배 비판 등, 실질적으로 아베 총리에 대한 비판과 직언이 인용되어 있다. 평균적인 일본인이 이 정도의 역사인식만 있었어도 아마 일본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과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한편 신조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알아왔던 몇 안되는 생존자들도 당연히 3대째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증거기반의 객관적 서술도 많지만, 책 전반적으로 anti-신조의 논조가 상당히 강하므로, 정작 아베 신조 본인의 인터뷰가 없는 것은 당연히 이해가 되면서도 아쉽다. 하지만 아베 신조의 부인인 아베 아키에씨까지 인터뷰한 것에는 꽤나 놀랐다. 기자정신이 투철하다고 할지, 무모하다고 할지. ㅎㅎ

역자인 길윤형 기자는 한겨레 소속의 도쿄 특파원으로 근래 아베 신조에 대한 책[5]을 쓰신 듯 한데,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내용으로 짐작된다. 역자가 저자를 인터뷰한 기사[6]가 p330에 언급되어 있는데, 검색해보면 쉽게 나온다.

다양한 정보를 토대로 아베 집안 세 사람의 행적과 성격을 재구성한 저자의 노고가 돋보이는 책이다.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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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1
한겨레 아베는 평화주의자 할아버지를 말하지 않는다 2018-09-29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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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3.15
경향신문 일본 여당 ‘아베 총리 4선론’ 불지피기 2019.03.13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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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1
아베의 아키하바라 유세 당시 현장사진 및 영상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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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2
한겨레 아베 “그만둬” 야유 속 마지막 아키하바라 연설 2019-07-2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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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0
이코노미스트 에스프레소 Staying power: Shinzo Abe’s longevity Nov 20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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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뉴시스 아베, 자민당 총재선거 당선…전후 최장수 총리 기록 2018-09-20 14:17:32
[2]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나무위키)
[3] 내 백과사전 후쿠다 준이치 차관이 성희롱으로 사임하다 2018년 5월 2일
[4] 아베 신조 (나무위키)
[5] 아베는 누구인가 – 아베 정권의 심층과 동아시아 길윤형 (지은이) | 돌베개 | 2017-10-01
[6] 한겨레 “선대 후광 ‘세습 정치인’ 아베와 박근혜 닮은꼴이죠” 2017-02-07 21:20
[7] buzzfeed news 安倍首相の「聖地」秋葉原で何が起きたのか 最後の演説会で衝突、そして 2019/07/20 22:07

프랑스에서는 수학자가 정치가가 될 때도 있다 : Paul Painlevé

제목을 보고 얼마전에 국회의원에 당선된[1] 필즈상 수상자 Cédric Villani를 연상하시겠지만, 아쉽게도 이번 포스트는 수학자 Paul Painlevé에 대한 내용이다. ㅋㅋㅋ

사실 나도 누군지 몰랐는데, Mathpresso 블로그[2]를 보고 알게 된 수학자임. ㅎ 그는 프랑스 제 3공화국 당시 수상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고 한다. 수상까지 했다니 영향력이 적은 정치인이라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위키피디아를 대충보니-_- 그의 수학적 업적은 미분방정식을 푸는 테크닉 쪽으로 있는 듯 하다. 특히나 n체 문제에 관해서 그의 이름이 붙은 추측이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Painlevé conjecture는 이러한 문제다. 중력장을 만드는 n개의 물체가 상호 중력 작용을 할 때, 유한한 시간내에 항상 두 물체가 충돌(collision singularity)하는지, 아니면 영원히 충돌하지 않는 초기 상태(noncollision singularities)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추측이다. 물론 n개의 물체는 크기가 없는 점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 Painlevé는 n=3일 때 해결하였고, n이 5보다 큰 경우는 여러 수학자들에 의해 해결한 모양인데, n=4인 경우만 아직 미해결이라고 한다. n이 클 수록 더 어려운거 아닌가??? 초 신박하네-_- n=2일 때는 태양-지구 처럼 돌면되니까 자명한 듯 하다. ㅋ

위키를 보니 일반 상대성이론과 관련해서도 업적이 있는 듯 하다. 그의 이름이 붙은 좌표계가 있는데, 본인이 물리학에 까막눈이라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음. ㅋ

정치인으로서는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전쟁 장관으로 활약하고, 1917년에 수상을 한 번 역임한다. 이후 전간기인 1924년 대통령에도 출마해는데 낙선했다고 한다. 1925년 4월 프랑스 프랑의 금융위기 발발로 Édouard Herriot가 사퇴하고,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수상이 되었는데, 금융위기 수습을 잘 하지 못해서 11월에 사퇴한 모양이다. 프랑스 정치사는 잘 모르니 이쪽은 패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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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4
황금 족쇄 – 금본위제와 대공황, 1919~1939년
배리 아이켄그린 (지은이), 박복영 (옮긴이) | 미지북스 | 2016-12-10 | 원제 Golden Fetters: The Gold Standard and the Great Depression, 1919-1939 (1992년)

p302-306

1924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된 세금 인상은 좌파의 재정 부담을 증가시켰다. 1924년 총선에서 국민연합이 권력을 잃은 이후에 중도 좌파 정당들이 에리오 내각을 구성했을 때, 그들은 재정 부담을 다른 곳으로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에리오는 효과적인 경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넓은 허리둘레 못지않게 폭넓은 문화적 취향을 가졌던 에리오는 불행히도 경제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거의 없었다. 그의 재정 담당 장관들은 재정 부담을 다른 곳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지지를 하나같이 얻지 못했다. 불확실성이 일상처럼 되었다. 에리오 내각의 초대 재무부 장관이었던 에티엔 클레망텔은 국민연합이 소득세 개혁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도 총세수 대비 간접세 비중을 1913년보다 높여 놓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자신의 재정 개혁안을 마련했다. 카르텔, 즉 좌파연합을 지지하는 몇몇 정당들은 식품과 기타 필수품은 거래세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클레망텔의 1925년 예산안은 직접세 인상과 소비세 감축을 담고 있었다.65 재무부 장관 개인은 회의적이었지만 자본세가 새 정부의 공식 정책이 되었다.

자본세와 관련하여 내각은 모든 재산에 대해 10%를 과세하고 이를 10년에 걸쳐 납부하도록 하는 안을 선호했다. 이런 안은 투자자 들이 돈을 국외로 빼돌릴 확실한 유인을 제공했다. 이 자본세를 공식 정부 정책의 지위로 격상시킨 1925년 4월의 금융 프로젝트는 금융 불안정의 재발과 시기상으로 일치했다. 부동산보다는 국방채를 처분하는 것이 더 쉬웠다.66 일부 투자자들이 자산을 국외로 일단 이전시키면 다른 사람들도 따라할 유인이 금방 생겼다. 자본 도피는 자본세의 기반을 흔들었는데, 남아 있는 재산에 대해 인상된 세율이 적용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은행 밖에 늘어선 줄 때문에 유발되는 예금 인출 사태처럼 국방채시장에서의 이탈도 자본 도피 소식 때문에 유발되었다.67

결국 ‘좌파연합’은 자본세 부과에 필요한 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68 연립정부에 참여한 정당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이 나뉘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특히 논란이 된 그런 정치적 어려움과 다수 의석의 불확실성 때문에 정부는 신규 차입이나 긴축 혹은 과세에 관한 어떤 계획도 완수할 수 없었다.”69

재정정책의 불확실성은 또다시 정점에 이르렀다. 1925년에 재무부 장관이 계속 교체되었지만, 모두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클레망텔은 소득세에 초점을 맞춘 자신의 제안이 내각에서 거부되자 그해 4월에 장관직을 사임했다. 내각은 좌파연합에 속한 사회당이 줄곧 주장한 자본세를 더 선호했다. 그의 후임자인 드 몽지에는 반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본세를 강제 대출로 바꾸었지만 도입에는 실패했다. 에리오가 상원에 의해 축출된 후, 폴 팽르베가 새 정부를 구성했다. 재무부 장관으로 복귀한 카요는 자본세에는 반대했지만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없었다.70 팽르베는 중도파가 선호하는 소득세와 좌파가 선호하는 자본세를 모두 도입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산업계와 우파 정당들의 반대로 채택이 무산됐다. 다시 정부가 와해되었다. 루이 루셰르는 특별 상속 및 증여세와 부동산 거래세 인상에 초점을 맞춘 안을 제시했다. 의회 재정위원회는 5일간의 논의 끝에 이 제안을 거부했다. 폴 두메르는 거래세를 활용하는 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세금을 증권 거래와 연계시켜 좌파의 지지를 끌어낼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 무렵 “포트폴리오의 왈츠”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1926년 전반기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불확실성으로 금융 시장이 파탄에 이르렀다. 모든 경제 집단이 각자 증세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며 자산 도피처를 찾았다. 이자 소득자들이 국방채 갱신을 중단했고, 그 결과로 추가 화폐화가 불가피했다. 예금자들이 자금을 국외로 빼돌렸고, 그 결과로 환율이 절하되었다. 좌파연합은 금융 혼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자본세 도입을 담고 있는 특정한 제안들을 통제했지만, 1926년 7월에도 자본세는 여전히 좌파 재정 프로그램의 핵심 요소로 널리 인식되었다.71 초인플레이션의 유령이 어른거렸다. 『뉴욕 선』은 7월 21일자에서 “지금 프랑스 전역이 불안으로 떨고 있다”고 전했다.72

결국 위기가 이 정체 상황을 타개했다. 러셀 레핑웰은 1925년 7월 18일에 모건은행의 동료 토머스 라몬트에게, “나는 지금 프랑스 전 국민이 불안정한 통화에 너무 지쳐 건전한 재정 원칙의 채택을 환영하고 진심으로 지지할 것이라는데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네”라고 편지를 보냈다.73 레핑웰의 낙관적 시각이 시기상조였을 수는 있지만, 1926년 여름 무렵에는 그가 예상한 태도 변화가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중도 좌파 의원들 중 점점 더 많은 수가 금융 불안정의 비용이 결국 자본 과세를 통한 사회 ‘개혁의 이득을 훨씬 능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금과 교사 월급의 인상을 밀어붙이려고 했던 이들의 시도는 인플레이션으로 이미 좌절되었다.

급진사회당 의원이자 경제 전문가인, 베르트랑 노가로Bertrand Nogaro는 좌파 반란의 주도자였다. 그는 통화 안정의 회복이 사회 개혁에 필요한 전제조건아라고 주장했다. 저명한 전직 은행가인 자크 뒤부앵Jacques Duboin과 함께, 그는 금융 안정화를 추진할 10여 명의 중도 좌파 의원들 모임을 결성했다. 1926년 중순경에는 상당수의 다른 중도 좌파 의원들의 지지도 얻었는데, 이들은 당 지도부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7월경에 그 수는 70명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이 집단은 위기의 절정기에 구성된 에리오 정부를 와해시키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국민연합의 2차 내각 형성과, 확고한 자본세 반대론자인 푸앵카레의 복귀가 가능해졌다. 이 의원들 중 많은 수는 1924년 선거 운동에서 푸앵카레의 금융정책을 반대한 사람들이었다. 그 후 2년간의 금융 혼란을 겪으면서 이들은 재정을 둘러싼 소모전을 끝내기 위해 자신들의 입장을 뒤집은 것 이다.

결과는 그 이상 극적일 수 없었다. 의회는 푸앵카레에게 일방적 금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했다. 금융에 관한 의사 결정은 일시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사실상 분리되었다. 푸앵카레는 예산 상황을 강화하기 위해 간접세를 인상하고 지출을 삭감했다. 금융 안정으로의 극적인 복귀가 이런 정책의 도입과 때를 같이했기 때문에, 이런 조치들의 영향력이 다소 과장되었다.74 사실 예산은 이미 균형에 가까운 상태였으며, 새로운 세금이 재정 수입 확대에 기여한 부분은 크지 않았다. 의회의 전권 부여를 통한 조세 개혁이 갖는 의미는, 간접세와 보통 수준의 소득세를 지지하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자본세 도입의 우려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피 자본은 복귀했으며 전쟁채시장은 안정을 되찾았다. 물가도 다시 안정 되었다.75

 


65. Haig, Robert Murray (1929), The Public Finances of Post-War Franc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03쪽.

66. 국방채 투자자들은 상환 연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1개월에서 6개월 후 만기의 국방채를 담보로 돈을 차입하려고 했다. Commercial and Financial Chronicle (July 24,1926), 404쪽. Meynial, P. (1927), “La Balance des Comptes,” Revue d’Économie Politique 41, pp.271-289은 자본 도피 규모에 대한 추정치를 제시하고 있다.

67. Eaton, Jonathan (1987), “Public Debt Guarantees and Private Capital Flight,” World Bank Economic Review 1, pp.377-399과 Alesina, Alberto, Alessandro Prati, and Guido Tebellini (1990), “Debt Management and Debt Panics in Italy,” in Rudiger Dornbusch and Mario Dragi (eds.), Public Debt Management: Theory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94-117는 이 과정을 모델로 만들었다.

68. 엘리노어 덜레스(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179쪽)가 말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그룹은 의회에서 분명하고 지속적인 다수 의석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강력하고 일관된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Peel, George (1937), The Economic Policy of France, London: Macmillan and co. 128쪽과 Hermens, F. A. (1941) Democracy or Anarchy? A Study of Proportional Representation,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28쪽을 참고하라.

69. Dulles (1929), 192쪽. 유사한 분석을 하고 있는 Schmid, Gregory C. (1974), “The Politics of Currency Stabilization: The French Franc, 1926,” Journal of European Economic History 3, pp.359-377도 참고하라.

70. 재무부 장관 카요는 1926년 7월 8일 의회에서 “자본세 도입에 단호히 반대하며 자본세가 다른 어떤 조치보다도 더 심각한 인플레이션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Commercial and Financial Chronicle (July 10, 1926), 151 쪽.

71. 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195쪽. 벤저민 스트롱은 자신의 유럽 여행을 알리며 5월 중 순에 조지 해리슨 앞으로 보낸 한 편지에서, 기존 정부를 축출하고 에리오 정부를 지지할 수 있다는 프랑스인들의 공포에 대해 언급했다. “에리오 정부는 자본세를 강력히 옹호하는 블룸 분파(레옹 블룸을 대표로 한 프랑스 사회당을 가르킴一옮긴이)의 지지를 확실히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상황이 악화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프랑스인들은 경악할 것이고 그러면 프랑으로부터의 도피가 지금보다도 훨씬 심각해질 것이다.” FRBNY (Strong Papers), Strong to Harrison, 15 May 1926.

72. Commercial and Financial Chronicle (July 24,1926), 404쪽에서 재인용.

73. Lamont Papers 103-111, Leffingwell to Lamont, 18 July 1926, 3쪽.

74. 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Yeager, Leland and Associates (1981), Experiences with Stopping Inflation, Washinton, D. C.: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Sargent, Thomas (1986b), “Stopping Moderate Inflations: The Methods of Poincaré and Thatcher,” in Thomas Sargent, Rational Expectations and Inflation, New York: Harper and Row, pp.110-157 등은 큰 폭의 세금 인상이 재정 적자를 해소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Makinen, Gail E. and Thomas G. Woodward (1989), “Some Sadly Neglected Monetary Aspects of the Poincaré Stabilization,” Southern Economic Journal 56, pp.191-211는 이런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75. “푸앵카레 국민연합 내각의 수립 이후 프랑 포지션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면서 도피 자본의 복귀와 외국의 투자 증가가 모두 나타나 해외로부터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었다.” Rogers, James Harvey (1929) The Process of Inflation in France 1914-1927,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7쪽. 예산 적자 해소를 위한 보조적 역할이 없다면, 위기에 대한 이런 설명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수년 후 결제 계정에서 예산이 균형을 이루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1929년에도 엘리노어 덜레스는 “1925년 적자 규모는 여러 측면에서 1924년 규모에 비해 훨씬 더 불명확하다”(Dulles, Eleanor Lansing (1929), The French Franc 1914-1928, New York: Macmillan, 380쪽)고 기록했다. 당시의 추정에 따르면 상당한 규모의 적자가 예상되었다. 결국 1925년 11월 팽르베는 사임을 하게 되는데, 이는 상당한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 되는 상황에서 소득세 인상이나 자본세 도입을 의회가 거부한데 대해 낙담했기 때문이다. 예산 적자의 화폐화를 예상하던 투자자들은 당시와 예산 전망에 반응한 것이지, 수년 동안 알 수 없었던 결제 계좌에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예산 상황에 대한 가용한 정보에 따르면,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급박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금융 위기가 그렇게 심각했던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전간기 당시 Painlevé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언급이 나오길래 인용해봄. 1925년은 금융위기라기 보다는 자본세 도피로 인한 환율불안정과 인플레이션이라고 봐야 할 듯 하다. 그리고 참고로 이 글에 등장하는 푸앵카레는 물론 그 유명한 수학자가 아니라 그 사촌인 정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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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필즈상 수상자 Cédric Villani의 최근 행보 2018년 4월 9일
[2] Paul Painlevé, a french mathematician and politician (mathpresso.wordpress.com)

마윈과 손정의의 만남

알리바바 – 영국인 투자금융가가 만난 마윈, 중국, 그리고 미래
던컨 클라크 (지은이), 이영래 (옮긴이)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8-06-05 | 원제 Alibaba: The House That Jack Ma Built (2016년)

p178-180

처음 마윈을 만났을 때 손은 이미 엄청난 부호였다. 그는 신속한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최고의 선견지명을 발휘한 것은 1995년의 야후 투자였다. 야후가 1996년 상장되었을 때 소프트뱅크는 37퍼센트의 지분을 가진 최대 투자자였다. 손은 소프트뱅크가 야후의 일본 내 독점 파트너가 되는 협상도 성사시켰다. 이 계약은 그에게 또다시 수백억 달러를 안겨 주었다.

손을 만난 마윈은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느꼈다. “우리는 매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죠…우리는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모두 판단이 빠른 사람들이죠.” 마윈이 회상했다.

“마사요시 손을 만나러 갔던 날 저는 양복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5~6분 후 그는 나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고 저도 그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소울 메이트라고 말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마윈이 10만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알리바바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손은 바로 소프트뱅크가 얼마를 투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전환했다. “저는 마윈 씨의 이야기를 5분간 듣고 그 자리에서 알리바바에 투자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손이 회상했다. 손은 마윈의 프레젠테이션을 중단시키고 그에게 소프트뱅크가 “돈을 즉시 내놓을 생각이니 알리바바는 소프트뱅크의 돈을 빨리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알리바바의 IPO가 있을 즈음에 손은 2000년 마윈에게 베팅을 하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눈빛이었습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감각’이었습니다…직원이 대여섯에 불과한 야후에 투자했을 때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제 감각에 의존해서 투자를 합니다.”

이런 충동성은 손을 대표하는 특징이었다. “마사는 마사입니다. 그는 AD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가지고 있고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죠. 그는 당신에게 돈을 주고 싶을 뿐입니다. 당장… 당장 말입니다!” 이전에 손과 함께 사업을 했던 사람의 말이다.

베이징에서 첫 만남이 있고 몇 주 후, 손은 계약을 마무리 지으려고 마윈을 도쿄로 초청했다. 조차이가 동행했다.

두 사람이 손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협상이 시작되었다. 마윈은 후에 이 회의를 무술을 빗대 설명했다. “협상의 고수들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듣기만 합니다.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이류입니다. 진정한 고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가 검을 움직이자마자 상대는 완전히 무너지죠.”

이 여행 전에 소프트뱅크 차이나의 천시셰이를 만났던 조차이는 나에게 회의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골드만과 다른 펀드들은 알리바바의 가치를 1,000만 달러로 평가하면서 회사 주식의 절반인 500만 달러를 투자했었습니다. 마사는 회사의 40퍼센트로 2,000만 달러를 제의하면서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알리바바의 ‘투자 후 기업가치’를 5,000만 달러, ‘투자 전 기업가치’를 3,000만 달러로 평가한 것입니다. 단 몇 주 만에 골드만의 투자가치가 세 배로 늘어났죠.” 조차이와 마윈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와, 세 배나 되잖아!’라고 생각했다. 조는 이렇게 회상했다. “하지만 이후 우리는 주식을 지나치게 많이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윈이 ‘마사, 저희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죠. 마사는 계산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여전히 마사는 40퍼센트를 원했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죠.

‘그렇다면 액수를 두 배로 하면 어떻겠소. 40퍼센트에 4,000만 달러를 넣겠소.’ 그 액수는 투자 전 기업가치를 6,000만 달러로 본다는 의미였습니다.”

마윈과 조차이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마윈은 손에게 4,000만 달러의 투자를 거절하는 이메일을 썼다. 대신 그는 30퍼센트에 2,000만 달러를 제안했다. 그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조건에 동의하신다면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약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마윈은 이후 엄청난 액수의 투자를 거절한 이유를 설명했다. “제게 왜 그런 큰 돈이 필요할까요? 저는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분명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손의 답장을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답장은 한마디였다. “추진하시오.”

이거 무슨 허생과 변씨의 만남[1]도 아니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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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백과사전 다시보는 허생전 2014년 2월 28일

필즈상 수상자 Cédric Villani의 최근 행보

Cédric Villani 선생의 이름은 필즈상 수상자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종종 듣는데, 잘은 몰라도 나름 똘끼-_-가 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뭐 수학계에는 똘끼가 워낙 흔해서 이런 건 눈에 띄는 축에도 안 들지만… ㅋㅋㅋ

Villani 선생의 최근 행보에 대해 이야기하는 The Verge의 기사[1]를 읽어 봤다. 수학계의 레이디 가가-_-라네…. ㅋㅋㅋㅋ

이 아저씨 얼마 전에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하원에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마크롱 내각에 합류해서 나름 활약중인 듯 하다. 근데 국회의원에 당선돼 놓고 왜 행정부로 옮겼는지는 모르겠음. 마크롱씨가 젊은 정부로서 나름 개혁의지가 강한 듯 한데, 노동 유연성을 좀 높이려다가 근래 철도 노조의 파업[2]으로 꽤 고생하고 있는 듯. 얼마전에는 사르코지도 뇌물 수수 혐의로 잡혀있다[3]고 하던데, 여기나 저기나 똥같은 전직 대통령을 잡아 넣고 개혁하느라 나라가 꽤 시끄러운 것 같다. ㅋ

뭐 여하간 마크롱 내각에서 수학/과학 쪽을 담당하는 테크노크라트 역할을 하는 모양이던데, 근래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정부의 정책 방향과 전략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발간한 것 같다. 웹사이트[4]가 별도로 있는데, 보고서는 이 사이트[4]에서 pdf 포맷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사업하느라 바쁘신 분들은 10페이지부터 시작되는 executive summary를 보면 된다. 근데 나는 영어 울렁증이라…. -_-

유럽을 기반으로 하는 빅테크 기업(GAFAM; 구글, 애플, 페북, 아마존, 마소)이 없어서, 유럽 정부들은 나름 고심을 하는 모양인 듯 하다. 이제 인터넷 시대, 모바일 시대를 지나서 인공지능 시대로 들어가는 듯 하니, 이 시류에 따라 빅테크 기업을 하나 키워보려는 정부의 소망 비스무리한 걸 느낄 수 있다. 레이 쥔이 ‘태풍의 길목에 서면 돼지도 날 수 있다‘ 고 말했더라는 진위불명의 소문이 있던데, 출처는 불명해도 여하간 이 말 대로 멍때리지 말고 새로운 기술 도래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될 듯 하다. 마크롱씨도 나름 노력하는 듯.

필즈메달이 미래에 업적을 이룰 사람에게 주는 격려상이라는 취지에서, 필즈메달 수상자가 딴 일 하는 걸 별로 안 좋게 보긴 하는데, 뭐 정부에서 중요한 과학기술 정책에 의미있는 조언을 해서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Villani 선생의 책은 국내에 역서[5]가 한 권 있는데, 게을러서 사 놓고 여태 읽지 않고 있다. 대충 앞부분만 보니 수필에 가까운 내용인 듯 한데, 별달리 설명도 없이 전문 용어를 사용하는게, 아무래도 대중적 독자를 염두해서 쓴 책은 아닌 듯 하다.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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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21
Cédric Villani is running for mayor of Paris (aperiodical.com)

 


[1] the verge MEET THE ‘LADY GAGA OF MATHEMATICS’ HELMING FRANCE’S AI TASK FORCE Mar 28, 2018, 8:10am EDT
[2] 로이터 French train chaos strikes again as standoff with Macron deepens APRIL 8, 2018 / 2:05 PM
[3] 가디언 Nicolas Sarkozy in police custody over Gaddafi allegations Tue 20 Mar 2018 09.04 GMT
[4] https://www.aiforhumanity.fr/en/
[5] 세드릭 빌라니 저/이세진, 임선희 역, “살아 있는 정리“, 해나무, 2014

트럼프 당선 직후 CIA에서의 연설

마이클 월프 저/장경덕 역, “화염과 분노”, 은행나무, 2018

강조는 원문을 따름. 주석은 역자의 것임. 원문에 마침표가 있을 것 같은 자리에 쉼표가 상당히 많은데, 이유는 모르겠음.

그러나 대통령이 즉시 시작한 공식 업무는 CIA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토요일인 1월 21 일에 트럼프는 쿠슈너가 계획한 대로 대통령으로서 첫 행보로 랭리*를 방문했다. 배넌의 희망 섞인 설명에 따르면 “정치를 좀 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으로서 첫 행보인 만큼 주의를 기울여 준비한 발언을 통해 그는 CIA와 마구 뻗어나가고 정보를 흘리는 그 밖의 미국 정보기관들에게 유명한 트럼프식 아첨을 할 예정이었다.

그는 어두운 외투를 벗지 않은 채 몸집 큰 깡패 같은 인상을 주면서 CIA의 희생된 요원들을 기리는 추모의 벽 앞에서 서성거렸다. CIA 직원과 백악관 참모 약 300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새 대통령은 청중이 그에게 집중하고 있는 게 즐거워 언제나 그렇듯이 잘난 체하며 갑자기 그의 연설문을 무시하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이 한 연설 중 가장 이상한 것들 중 하나라고 할 만했다.

“나는 웨스트포인트**에 관해 많이 압니다. 나는 학업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늘 MIT의 훌륭한 교수로 35년 동안 재직한 숙부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여러모로 굉장한 일을 했습니다, 그는 학문적인 천재였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지식인인가?’ 하고 묻지요. 그래요, 나는 똑똑한 사람에 들어갑니다.”

이는 모두 곧 인준을 받을 새 CIA 국장 마이크 폼페이오를 칭찬한답시고 한 말이었다. 폼페이오는 웨스트포인트에 다녔고 트럼프는 그를 데려와 청중들 앞에 세워두었다. 폼페이오는 이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젊었을 때 말이죠. 물론 나는 젊다고 느낍니다. 나는 내가 서른, 서른다섯, 서른아홉 살인 것처럼 느껴요, 누군가 ‘그렇게 젊으냐?’고 물었어요. 나는 내가 젊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지요. 나는 선거운동 마지막 몇 달 동안 여러 곳을 들렀어요, 네 군데, 다섯 군데, 일곱 군데…… 2만 5000명, 3만 명…… 1만 5000명, 1만 9000명이나 되는 청중 앞에서 연설하고 또 연설했지요. 나는 젊다고 느낍니다. 우리 모두 정말 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젊을 때는 우리나라가 언제나 이기고 있었어요. 우리는 무역에서 이기고, 우리는 전쟁에서 이기는 나라였습니다. 몇 살 때인가 강사 한 명이 미국은 전쟁에서 진 적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어떤 것도 이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전리품은 승리자의 것이라는 옛말도 있잖아요? 내가 언제나 석유를 지키라고 한 말을 잊지 마세요.”

“누가 석유를 지켜야 한다고?” 당혹스러운 한 CIA 직원이 방 뒤쪽에 있는 동료에게 몸을 구부리며 물었다.

“나는 이라크의 팬이 아니었어요, 나는 이라크로 들어가는 걸 원치 않았어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서 잘못 나왔어요. 그리고 나는 항상 그 말만 한 게 아니라 석유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제 나는 그걸 경제적 이유로 말합니다, 하지만 그에 관해 생각해보면, 마이크一그는 방 건너편에 있던 국장 지명자의 이름을 불렀다一, 우리가 석유를 지켰다면 ISIS는 없었을 겁니다, 왜냐 면 처음부터 그들이 자금을 마련한 건 그곳에서 였으니까요,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석유를 지켰어야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아마도 당신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석유를 지켰어야 했다는 겁니다.”

대통령은 잠시 멈추고 명백히 만족감을 나타내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첫 방문지로 이곳에 들른 건, 아시다시피 나는 언론과 전쟁을 벌이고 있어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정직한 인간들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내가 정보기관들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곳이 내 첫 번째 방문지가 된 이유는 정확히 그 반대라는 걸 여러분에게 정말 알리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그들도 그걸 압니다. 나는 숫자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는 어제 연설에서 큰일을 하나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 연설을 좋아했나요? 분명 좋아했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넓은 광장을 메웠어요. 여러분도 보았을 겁니다. 빽빽했지요. 내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 TV 채널 한 곳을 켜니 그들은 텅 빈 광장을 보여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잠깐만, 내가 연설을 했잖아. 나는 멀리 내다봤어요, 그 광장에 모인 인파는 100만 명, 150만 명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들은 사실상 아무도 안 서 있는 광장을 보여주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을 많이 모으지 못했다고 했고, 나는 거의 비가 내리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비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져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려다보면서 네 연설에 비가 내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했고, 실제로 내가 연설을 시작했을 때 내가 말했어요, 어~ 안 돼, 첫 줄을 읽을 때 나는 빗방울을 두어 개 맞았고, 내가 그랬죠, 오, 이건 너무 안 좋아,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갈 거라고. 사실은 말이죠, 즉시 비가 멈췄어요…….”

“아니, 안 그랬는데.” 그를 수행하는 직원 한 명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하던 말을 뚝 끊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누가 엿듣지 않았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정말 햇빛이 났고 내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와 그곳을 떠난 직후에 비가 쏟아졌어요. 비가 쏟아졌지만 우리는 놀라운 걸 보았어요. 솔직히 100만 명, 150만 명은 되는 것 같았어요, 얼마가 됐든 정말로 그랬습니다, 인파는 워싱턴기념관까지 쭉 이어졌어요, 그런데 내가 실수로 그 방송을 틀었고, 방송은 텅 빈 광장을 보여주었지요, 방송은 우리가 25만 명을 모았다고 했어요. 그것도 괜찮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제 또 다른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대통령 집무실에 마틴 루서 킹 박사의 멋진 조각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또 마침 처칠一윈스턴 처칠—을 좋아해요, 우리 대부분은 처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우리와 관련이 많지요, 우리를 도왔고요, 진정한 동맹이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처칠 조각상은 치워버렸지요……. 그래서 〈타임〉기자가 한 명 있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 표지에 열네 번인가 열다섯 번 나왔어요. 나는 〈타임〉역사를 통틀어 최다 기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톰 브래디가 표지에 나왔다면 그건 한 번이고 그가 슈퍼볼인지 뭔지 하는데서 우승했기 때문이에요. 나는 올해에 열다섯 번 나왔어요. 나는 그게 언젠가 깨질 수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이크…… 어떻게 생각해요?”

“맞습니다.” 폼페이오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가 말씀드리겠는데, 그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그 흉상, 마틴 루서 킹 박사의 조각상을 끌어 내렸다’는 건 매우 흥미롭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어요, 카메라 기자도 그 앞에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이런…… 〈타임〉에서…… 내가 그걸 끌어 내렸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마틴 루서 킹 박사를 대단히 존경해요. 그러나 이 일은 언론이 얼마나 부정직한지 보여주지요. 큰 기사를 써놓고는 철회하는 건 이런 식이에요.” 그는 손가락으로 아주 작은 크기를 표현했다. “한 줄 이나 될까요, 아니면 그들이 그걸 쓰기나 할까요? 나는 단지 정직성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나는 정직한 보도를 좋아합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들어오려고 줄곧 애를 썼던 다른 수천 명의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할 때 말하겠지만요, 왜냐면 나는 다시 올 거니까요, 우리는 여러분에게 더 큰 방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더 넓은 방을 만들어주어야 할 것 같고, 아마도, 아마도, 그건 누군가 건물을 어떻게 지을지 아는 사람이 지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둥을 세우지 않을 겁니다. 이해하시겠죠? 우리는 기둥들을 없애버릴 겁니다, 그건 그렇고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존경하고, 내가 더 존경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는 걸 알 겁니다. 여러분은 굉장한 일을 하고 있고 우리는 다시 이기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걸 지휘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에게 대단히 감사합니다.”

트럼프의 연설이 ‘라쇼몽 효과’***를 내는一환희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一징후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CIA에서 있었던 그의 리셉션을 비틀스식 감정의 분출로 묘사하거나 아니면 너무나 터무니 없고 기가 막혀 그가 연설을 마치는 순간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던 반응을 전했다.

 


* CIA 본부소재지
** 미국육군사관학교
*** Rashomon effect, 일본 영화〈라쇼몽〉에서 사용한 플래시백 기법으로 한 가지 사건을 여러 시각으로 재현하는 이 방식에 빗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습성을 라쇼몽 효과라고 부른다.

대안적 사실‘이 콘웨이의 작품이 아니란 걸 알았다-_-

[서평] 얼음의 제국 – 그들은 왜 남극으로 갔나

얼음의 제국 – 그들은 왜 남극으로 갔나
에드워드 J. 라슨(저자) | 임종기(역자) | 에이도스 | 2012-01-12 | 원제 An Empire of Ice (2011년)

 


남극 Adare 곶에서 과거 캡틴 스콧 팀의 식량으로 추정되는 케이크가 발견되었다는 BBC 뉴스[1]를 본 기억이 있다. 무려 106년(!)된 케이크지만 보존이 잘 돼 있어서, 마치 먹을 수 있을 듯 한 향을 내뿜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직접 먹어본 용자는 없었는 듯 하다. ㅎㅎㅎ

이 책의 핵심 내용은 과학사적 관점에서 캡틴 스콧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일전에 언급한 대로[2], 스콧 팀과 아문센 팀은 근본적으로 탐험의 목표가 달랐다. 과도하게 경쟁적 구도의 관점에서 부각되는 바람에, 스콧 선장의 테라 노바 탐험대는 마치 사전 준비와 지식의 결여, 실패한 리더십으로서 출발하기 전부터 약속된 실패자라는 세간의 인상을 가지고 있고, 사실 나도 책을 읽기 전까지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무위키의 ‘아문센 vs 스콧’ 항목[3]에서도 과학적 가치를 무시하는 무지렁이들이 가지는 관점이 반영된 서술을 볼 수 있다. 특히, 스콧이 개썰매를 쓰지 않은 이유[4]와 같은 패착이 스콧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약속된 실패자로서의 인상이 부각된 소개가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저자인 Edward J. Larson은 역사 저술가로 나름 유명한 사람인 듯 하다. 그의 다른 저술인 ‘Summer for the Gods’로 1998년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는데, 국내에서 ‘신들을 위한 여름'[5]으로 역서가 출간되어 있다. 이 책도 재미있을 것 같아 사놓고 아직 안 읽어 봤는데-_- 너무 게을러 탈이다. ㅎㅎ

역자인 임종기씨의 이름을 어디서 들어봤다 싶더니만, 아주 오래 전에 읽은 SF의 개략적 역사를 소개하는 책[6]의 저자였다. 헐… 나름 재미있게 읽었는데, SF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주는 책으로 SF에 관심있으면 읽을만하다.

여하간 이 책에서는 스콧 이전의 영국의 사회 문화적/과학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왜 그런 탐험을 하게 되었고/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시대적 설명도 들어 있어 텍스트의 분량은 꽤 많은 편이다. 비록 탐사의 동기에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욕망이 깔려있긴 했으나, 본질적으로 다양한 필요성과 학문적 발전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탐사였고, 아시다시피 결국 참사로 끝나고 말았다.

p60에 영국의 세금이 ‘한낱 이론적인 연구’(즉, 남극 탐사)에 쓰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는데, 이건 과학 발전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렁이들이 현대에서도 묻는 질문이다. ㅎㅎ 세상은 돌고 도는 듯. ㅎㅎ

p135부터 설명되는 챌린저 호의 탐사는 인류 최초의 Big Science라고 볼 수 있는데, Edward Forbes심해 무생대 가설을 폐기시킨 대규모 세계 해저 탐사로서 유명하다. 일전에 본 김명호 화백의 만화 ‘생물학 공방'[7]에서 이 탐험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으니 참고 바란다.

p194에 영국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퍼진 제국의 위기의식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전혀 언급을 안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신흥 강대국인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하던 시기로, 영국사회에서 제국의 위기를 강조하는 분위기는 피터 홉커크 선생의 저서[8]에도 잘 나와 있다.

지구가 자석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누구나 아는 간단한 사실이지만, 과거에는 북극성이 자석이다/자극이 여러 개 있다 등의 잘못된 (그러나 당대에는 어느정도 설득력 있었던) 가설들을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 목숨을 걸고 극점에 찾아가서 자기장을 측정해야만 했다. 과학의 발전은 데이터의 축적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지나치게 1등을 강조하는 세간의 무지렁이적 인식[3] 때문에 스콧의 업적이 지나치게 과소평가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목숨과 바꾸며 채집한 화석이 지구과학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는 사실[9]만 봐도 캡틴 스콧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아참, 참고로 스콧 선장의 테라노바 탐험대 직후에 남극점 정복을 시도한 시라세 노부라는 사람이 있다. 스콧이 1912년 1월 17일에 남극점에 도달했는데, 시라세 노부는 1월 16일에 남극 대륙에 상륙했으니 간발의 차라 할 수 있다. 일전에 읽은 김예동 선생의 저서[10]를 참고하기 바란다.

 


[1] BBC Antarctica fruitcake: 106-year-old dessert ‘left by Capt Scott’ 12 August 2017
[2] 내 백과사전 스콧/새클턴과 아문센의 차이 2018년 3월 2일
[3] 아문센 vs 스콧 (나무위키)
[4] 내 백과사전 스콧이 개썰매를 쓰지 않은 이유 2018년 3월 11일
[5] 에드워드 J. 라슨 저/한유정 역, “신들을 위한 여름“, 글항아리, 2014, ISBN : 9788967351144
[6] 임종기, “SF부족들의 새로운 문학 혁명, SF의 탄생과 비상“, 책세상, 2004, ISBN : 9788970134383
[7] 내 백과사전 [서평] 김명호의 생물학 공방 – 그래픽 노블로 떠나는 매혹과 신비의 생물 대탐험 2016년 12월 24일
[8] 내 백과사전 [서평] 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2012년 12월 20일
[9] 내 백과사전 스콧이 목숨과 바꾼 돌의 가치 2018년 3월 16일
[10] 내 백과사전 [서평] 남극을 열다 – 아시아 최초의 남극 탐험가, 시라세 노부 2016년 1월 3일